조선시대 미스터리…양동마을 ‘향단’

백희성의 고택향연(故宅蒼然)

경주 양동마을의 대표적인 전통 가옥인 향단은 조선시대 집 중 가장 미스터리하고 불편한 구조를 지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고 전파하려 했던 성리학자의 철학이 삶의 공간으로 옮겨온 흔적이다.

경주 양동마을의 향단(香壇)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1491~1553)께서 경상감사로 재직 중에 임금이 지어준 집이라고 한다. 병

환 중인 이언적 선생의 어머니를 위한 집이다. 이언적 선생께서 한양에 올라가게 되자, 동생인 이언괄이 대신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 이의주의 호를 따라 집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집은 아주 미스터리하면서도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특별한 공간적 특징을 지녔다.

먼저 향단에 들어가려면 경사로를 지나 올라가야 한다. 그런 후 처음 만나는 공간이 대문채다. 위엄 있는 대문채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보이고, 오른편에 대문이 보인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다가가면 또 하나의 숨은 문이 보인다.

자, 그럼 제일 먼저 눈에 띈 문을 열어보자. 앗! 축대(기단)가 너무 높다. 그 높이가 어림잡아 90cm 정도인데 계단도 없다. 그런데 가파른 축대 위에 떡하니 문 하나가 또 있다. 기어 올라가다시피 해서 기어코 그 문을 열어본다.

아뿔싸, 또 다른 축대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옆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있다지만, 누가 봐도 오르지 못할, 1m도 더 돼 보이는 축대가 가로막는다. 이쯤 되면 ‘이 문은 도대체 왜 만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다시 내려와서 남아 있는 작은 문을 열면 사랑채 마당이 나온다. 이곳이 입구가 맞는 셈이다. 이곳을 오르려면 다시 좁은 돌계단을 타고 가야 한다.

그런데 이곳은 더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다.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폭이 70㎝도 되지 않고 난간도 없는 돌계단. 병환 중인 어머님이 이 계단을 걷기라도 한다면, 어느 누가 마음 편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물론 자식이나 하인들의 부축을 받는다면 가능하겠지만, 이런 형태는 누가 봐도 따로 의도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구조다.

자, 이제 계단을 다 올라오면 누구의 부축도 받을 수 없어 오롯이 혼자 걸어 들어가야 하는 길이 나타난다. 들어올 수 없는 문이 있던 행랑채 지붕이 눈 아래로 보인다. 안채로 들어가는 길에 건물 지붕이 보이는 집 구조는 국내에서도 향단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조선시대 주택을 모두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향단 외에는 이런 구조를 아직 찾지 못했을 정도니 무척이나 희귀한 공간 구성이다. 그러나 낮은 지붕 덕분인지 하늘은 더 드라마틱하게 보인다.

이제 이언적 선생이 도대체 어떤 철학과 사고를 가지신 분이길래, 이렇게 집을 지었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왼쪽) 향단 전경. 오른쪽 빨간 화살표 방향으로 경사를 이용해 올라오면 마당이 보인다. 마당 정면에 검게 칠한 부분은 누가 봐도 문이다. 그러나 들어갈 수가 없다. 축대가 너무 높아서 들어가려면 기어 올라가야 하는 이상한 문이다. 결국 두 번째로 보이는 문을 따라 초록색 방향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리학적 이치와 철학을 담은 건축

조선시대 성리학자 이언적. 당시 성리학자들 사이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바로 주리론(主理論)·주기론(主氣論) 논쟁이다. 달리 이기론(理氣論) 논쟁이라고도 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주기론은 자연 만물의 현상이 우선이고, 그것을 통해 원리나 이치를 찾는다는 견해다. 더 쉽게 말하면, 기(氣)는 자연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전통 건축의 자연친화적 사상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잘 알려진 ‘차경(외부의 자연환경을 창이나 문, 담 등 건축적 요소를 통해 내부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끌어오는 조경 기법)’도 바로 이러한 주기론적 사고에서 발전한 결과물이다. 전통 가옥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면, 거의 모든 집이 주기론자들의 집인 경우가 많다.

주리론은 이와는 정반대다. 세상의 이치나 원리가 먼저 있고, 그것을 통해서 자연 만물이 만들어진다는 견해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이(理)는 세상의 원리, 이치, 의미,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론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사고를 가진 성리학 이론인데, 이 영향을 받아 퇴계 이황 선생께서 주리론 학통을 계승했다. 이를 흔히 영남학파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주리론자의 집들은 하나같이 뭔가 불편하거나 이상하기까지 한 공간 구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주리론자의 건축에는 그들의 사고와 철학이 담겨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궁금증 하나가 떠오르게 마련이다.

왜, 하필이면 사람이 살아가는 집에 이렇게 불편하고 이상한 공간을 만들었을까? 철학과 사고는 책을 써서 읽고 토론하면 되는 게 아닌가?

필자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야기하고 싶다.

첫째, 학문적 사고관과 삶을 하나로 일치하려는 성리학자들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서책을 만들고 아무리 인쇄술이 발달한 조선조였지만, 책이 전국에 확산되려면 지금과 달리 꽤 시간이 흘러야 가능했을 것이다. 책을 읽고 토론하거나 피드백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사자가 죽고 나서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에는 상문(相問)이라 하여, 상대 선비의 집은 방문해 문안을 드린 후, 단순한 친목을 넘어 학문적 토론(교학상장 敎學相長)과 인격 수양, 예절을 실천하는 장으로 여겨졌다. 선비 사회에서 중요한 교류 방식이었던 것이다. 보름씩 걸려서 방문한 손님이 여독을 풀 만큼 충분한 시간을 집에서 모시고, 여러 가지 학문적 교류를 나눴다고 한다.

이는 최고의 타이밍이다. 성리학자가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최고의 순간일 것이다. 집을 찾아온 손님은 여기저기 돌아보면서 물을 것이다. 향단 같은 경우 “집 입구가 두 개인데, 왜 하나는 들어갈 수 없는지” 혹은 “어려운 문을 일부러 만들어 놓았는지” 묻게 되리라. 그러면 이를 시작으로 보름이 넘게 토론하고 또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떠나는 선비의 뇌리에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주리론이 어떤 것인지 강렬하게 남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향단이 들려줄 이야기에 끌린 또 다른 선비가 집을 찾아올 것이다.

이런 행위, 어디서 본 게 아닌가! 바로 현대의 SNS다. (집의 특별한 공간을 건축하는 것처럼) 특별하면서도 이상한 포스팅을 하면, 누군가 들어와서 보고, (상문하는 것처럼) 댓글을 달고, 나도 댓글을 단다. 소통의 시작이다. 물론 일부 키보드 워리어들은 빼고 하는 이야기다.

건축가인 나로서는 조선시대 집들 중, 주리론자의 집들이 바로 당대의 SNS 소통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들의 집들은 어느 한 부분이 꼭 너무 이상하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한 경우가 왕왕 있다.

다시 향단으로 돌아가보자. 들어설 수 없는 문, 위험하고 좁은 길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솔직히 지금까지 어떤 문헌에서도 자료를 찾지 못해 정확히는 알 방법이 없다. 단지 그런 구조에 이유가 있다는 것만이 확실할 뿐이다. 수많은 학자와 토론해봐도 정확한 해석에 대해 알고 있는 이가 거의 없다. 가설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문헌에 없다고 해서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은 더 위험하다. 적어도 이런 낯선 풍경과 공간 구성에 의구심을 갖고 해석하려는 노력을 해야 후학들도 더 연구하고 방향을 찾게 될지 모른다.

1. 1번 시선에서 바라다본 문. 높은 축대를 쌓아 오르기 어렵게 만들었다. 문을 열어도 더 높은 축대가 서 있어 올라갈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 / 2. 2번 시선에서 바라다본 풍경. 지붕을 아래 두고 하늘이 열린 좁고 불편한 길.
전통 건축이 들려주는 소통과 다양성

사료 중심의 문화재 연구는 매우 중요하지만 구비문학, 즉 말로 전달되는 이야기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고대사에서 궁예는 한동안 신화적 존재로 인식됐다. 일제강점기에 발굴 조사를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유적이 없었다. 그동안은 왕건의 집권 강화를 목적으로 만들어낸 신화적 인물로 보는 견해가 주류였다.

그러나 말로 전해지는 노래가 남아 있어, 신화적 존재가 아닌 실존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학계의 추론이 있었다. 결국 2000년대 초반 비무장지대(DMZ)에서 궁예의 유적이 발굴되고, 북한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작지만 궁예와 관련된 문화재들이 나왔다. 결국 추론이 바탕이 돼 후대 연구자들이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필자도 작은 추론(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모아 정리한 내용)을 담아서 지면에 소개하려고 한다.

우선 병환 중인 어머님이 향단에 들고 나실 때는 외부 중간에 숨겨진 협문을 이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협문을 통하면 널찍하고 평평한 땅을 밟고 안채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이언적 선생을 비롯한 자손들이 불효자로 오해될 수도 있으니, 이 점을 먼저 주지하고자 한다.

들어갈 수 없는 문은 학문적 이치에 대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학문의 길에 잘못 들어서면, 결국 끝까지 오를 수 없다는 의미를 담은 표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결국 제대로 된 방향의 문으로 들어서면, 아주 좁고 불편한 돌계단을 오르게 된다.

이 또한 성리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현상보다는 이치, 즉 개념이 더 중요하기에 불편하고 작은 시작의 개념일지라도, 끝내는 전체를 아우르는 힘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해석한다.

그렇게 올라서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좁은 길로 향하면, 주변 환경은 눈에 들지 않고 오로지 하늘만 선명하게 보인다. 주리론자들이 하늘의 이치와 이론을 깊이 있게 연구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결국 이곳에서 보이는 하늘도 그런 뜻을 나타내려 함이 아니었을까.

향단 끝자락에 있는 후원대(계단식 정원. 지금은 다른 건물이 있지만, 예전에는 경사진 정원이었다)에 오르면, 이제 드디어 자연 만물의 풍경이 바라다보인다. 세상의 이치인 이(理)로 시작해서 자연현상인 기(氣)로 끝나는 공간 구조인 셈이다.

그동안 전통 건축은 주로 주기론의 입장에서만 성리학자들의 집을 연구하고 해석해온 경향이 짙었다. 앞으로는 주리론자들의 이상하고 미스터리한 집들을 더 많이 소개하려고 한다. 낭설로 보아도, 비판도 좋다. 하지만 선조들이 남겨놓은 기억을 이대로 놓쳐버리기엔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다.

지금도 좀 더 구체적이고 합당한 결론을 찾기 위해 향단을 연구하고 있다. 독자들이 향단의 불편한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이런 생각들이 모여서 문화재를 해석하고 연구하는 새로운 시선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리학은 토론이 중심이다. 그리고 그 토론은 비난과 비판이 아닌 다름을 추구하고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주기론은 율곡 이이를 통해 더 발전했고, 주리론은 퇴계 이황을 통해 깊어졌다.

두 개의 철학적 근본은 다르지만, 동시에 성리학이라는 하나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성리학자들은 각자의 다른 해석을 중시하고 존중했다. 우리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문화재를 해석해봐야 하지 않을까. 훨씬 더 풍성할 토론의 장이 열린 거란 기대다.

백희성 /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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