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만원으로 11평 시골집 짓기 4.

고향 시골집, 도시화 세대의 딜레마인가
은퇴 후 교외 지역에 농막이나 작은 주택을 마련하고 전원생활을 원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올해 초부터 10평 규모에 숙박까지 가능한 ‘농촌체류형 쉼터’가 허용되면서 시골에 소형 주택을 짓는 건축주가 많아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건축업과는 무관한 공무원 출신 방송국 PD가 고향 시골에 직접 집을 짓고 그 경험을 <이 PD의 좌충우돌 4천만원으로 11평 시골집 짓기>라는 책으로 펴내 화제가 됐다. 저자 이상철 씨는 2024년 7월호부터 3회에 걸쳐 본지에 프롤로그 성격의 내용을 연재했는데 짧은 기간임에도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에 독자들의 아쉬움을 충족시키고자 잠시 중단됐던 ‘4천만원으로 11평 시골집 짓기’의 좌충우돌 스토리 연재를 재개한다.

진행 이형우 기자 | 글 사진 이상철(국악방송 프리랜서 PD)
내가 태어난 고향마을에 본격적으로 도시화 바람이 분 것은 1960년대였다. 집집마다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아 너나없이 농촌을 떠나 서울로 부산으로 대구로 향했다.
경제 성장 시기 성공을 찾아 고향을 떠났던 그 행렬 속에 아버지가 뛰어든 것은 1969년, 당시 2녀 1남의 막내였던 나는 다섯 살 꼬마였다. 아버지는 짊어지고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해 상경하던 그 완행열차 안에서 유행가를 힘차게 불러 젖혔던 기억이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도시 생활 속 고단한 고향길
상경 1세대였던 부모님께는 누구에게나 그러했을 고단한 도시 생활이 기다렸다. 그 고된 도시 생활 속에서 고향 방문은 삶의 오아시스가 아니셨을지…. 작은집 종손이셨던 아버지는 명절 때를 비롯해 벌초나 묘사 참례를 위해 고향에 다녀오시곤 했다. 아버지에게 고향은 곳곳에 쌓인 추억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예전보다 많이 완화됐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설 추석이면 어김없이 고속도로 위에 심한 교통 정체가 발생하고 있다. 그런 긴 귀향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은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고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시골에서 간난 아기를 구경하기가 힘들어진 만큼 앞으로 귀향이라는 풍경도 점점 보기 어려워지지 않을까 싶다.
제사를 집에서 지내게 되면서 나는 명절에 귀향하는 수고로움은 면할 수 있었지만 여름 끝자락이면 고향에 벌초를 다녀와야 했다.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벌초를 하는 주말의 교통 정체는 명절에 못지않다. 하루 종일 땡볕 아래 예초기를 돌리고 땀에 젖은 피곤한 몸으로 오랫동안 운전해야 하는 것은 몹시 힘들고 위험한 일이다. 그런 행사를 의무감으로 매년 치러오고 있다.
상경 1.5세대에게 고향의 조상묘 참배는 교통 정체 등을 감수해야 하는 고단한 일이다. 하지만 어릴 때 시골마을을 떠난 세대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하다.
고향에 작은 집 한 채 있었으면
세월이 흘러 상경 1.5세대인 나도 은퇴 시기에 이르렀다. 직장 생활하느라 뒤돌아볼 틈이 없었던 내게도 자연스럽게 한가한 시간이 찾아 왔고 고향의 유산을 다시 보게 됐다. 고맙게도 내게는 물려받은 약간의 전답과 집터가 있었다. 그리고 고조부모님부터 부모님까지 살펴야 할 산소가 있었다. 우리 가족이 상경하고도 한참을 건재하던 시골집은 사람이 살지 않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해 1990년대 초반에 허물 수밖에 없었다. 집터는 나대지 상태로 밭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퇴직하고 집에 홀로 남겨지자 쓸쓸했다. 친척들의 왕래도 점차 끊기면서 대가족은 자연스럽게 해체됐고, 도시 속에서 전통사회의 공동체는 경험하기 어려웠다. 30여 년 직장생활 동안 정신적 육체적 피로도 쌓여 있었다. 조용한 전원생활이 그리웠다.
그리고 시골 고향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갖고 있는 마지막 세대로서 앞으로 도시에서 살아갈 후손들에게 조상님들의 터전을 알려주고 이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꼈다. 그래서 고향에 작은 집 한 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려받은 고향 집 대지에 집을 짓기 위해 터를 고르고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적은 비용으로 시골집 짓는 방법
하지만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다는 대한민국에서 고향에 세컨드하우스를 지을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을 가진 은퇴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나도 여유 자금이 별로 없었기에 일을 크게 벌이지 않고 집터에 농막 하나 갖다 놓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규정상 나대지에는 농막을 둘 수 없고 집을 짓는 방법뿐이었다. 적은 비용으로 집을 짓자니 여러 가지 궁리와 고민을 하게 됐다. 그러다 우연히 목수아카데미를 알게 되었고 주말반에서 5개월 동안 집짓기를 배워 그 기술로 직접 집을 지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적은 비용으로 집을 짓기 위해서는 장비 사용료와 인건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경량 목조주택을 직접 짓는 것이 그런 방법인 듯싶다. 경량 목조주택 시공은 목재 생산이 많은 북미 지역 등에서 발전된 표준화된 건축 방식으로, 3~4명이 힘을 합치면 직접 집을 지을 수 있다. 내가 배운 목수아카데미에서는 강사들과 함께 3.5평 규모의 경량 목조주택을 직접 지어보는 과정이 있어서 매우 실용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교육받았던 동기생들이 집을 지을 때 와서 도와줬기에 큰 힘이 됐다.
시골집의 규모는 크게 키우지는 않았다. 한동안은 도시 생활을 병행해 주로 주말에만 이용할 생각이었기에 상당 기간 비워 둬야 할 시골집을 크게 짓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초공사와 수도 인입, U관 매설 등 기반시설을 포함해 방과 거실과 화장실이 있는 3칸 11평 집을 비교적 저렴한 비용인 4천만 원으로 지을 수 있었다.
적은 비용으로 집을 짓기 위해서는 장비 사용료와 인건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경량 목조주택은 이미 표준화된 건축 방식으로 3~4명이 힘을 합치면 직접 지을 수 있다.
규모를 크게 키우지 않고, 비용을 줄이는 여러 가지 궁리와 고민을 통해 방과 거실과 화장실이 있는 3칸 11평 집을 비교적 저렴한 비용인 4천만 원으로 지었다.
도시화 1.5 세대의 수구초심과 역할
고향 마을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아 보니 집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안식처가 됐고, 가족에게는 추억 공간으로, 지인들에게는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아내와 아이들은 집 지을 때 함께 일을 도왔으며, 이제 이곳에서 지낼 모든 일들을 추억하게 될 것이다. 형제와 친구 모임을 비롯해서 그동안 다소 소원했던 집안 친척들의 시골집 방문도 이어졌다.
후손들에게 조상들의 터전을 알려주고 정신적인 뿌리를 이어가길 바랐던 생각도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미래 세대는 점점 더 시골과 멀어질 것이다. 다만, 세상이 변하더라도 시골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마지막 세대로서 현재 내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것이 부모를 따라 어릴 때 고향 시골마을을 떠났던 도시화 1.5 세대인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현재 베이비 부머 세대가 본격적인 은퇴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산업화와 고도 경제성장 시기에 치열한 삶을 살았을 이들이 이제 고향 시골에 내려와 편안한 전원생활을 누리길 바란다. 도시와 농촌, 선후先後 세대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도시화 1.5 세대의 귀향은 당면과제인 지방의 인구 소멸을 해소하고 지역경제 발전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저렴하고 안전한 시골집 짓기가 보급됐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고향 주택이나 농어촌 주택에 대한 1가구2주택 중과세나 상속세, 양도세 등 각종 조세 불이익이 지금보다 더 과감하게 개선돼야 한다.
우연히 알게 된 목수아카데미 주말반에서 5개월 동안 집짓기를 배워 그 기술로 직접 집을 지었다.
시골집 마당에 불 피울 공간을 마련하고 얼마 전 가족과 함께 바비큐 파티를 했다. 불을 피워 고기를 삶고 숯불에 꼬치구이를 하는 것이 그 자체로 즐거웠다. 왠지 앞으로 우리 가족과 지인들은 더 자주 시골집을 방문할 것 같다. 그래서 머물 곳이 부족해진다면 나는 손님을 맞이할 작은 사랑채를 한 칸 더 짓고 싶다. 그 집은 온돌학교에서 배워 전통 방식의 온돌방으로 직접 만들고 싶다. 나의 집짓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