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140km의 슬라이더가 좌타자의 무릎 쪽을 절묘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스트라이크, 그 스트라이크는 세 번째 스트라이크였고 타자는 삼진으로 처리됐습니다.
그 아웃카운트는 경기의 마지막 아웃카운트기도 했습니다.
때마침 카메라는 투수를 잡았습니다.
투수의 표정은 정말 오묘했습니다.
웃음을 띤 것도 같고, 감격한 것도 같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 그의 얼굴 안에 있었습니다.
이 삼진은 한 유망주 투수가 잡아낸 1군 무대 통산 첫 삼진이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2025년 최고의 장면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유망주 투수가 데뷔 후 7년 만에 그렇게 갈망하던 1군 무대 마운드에 올라서 본인의 힘으로 직접 아웃카운트를 처리하고 지었던 그 복잡 미묘했던 표정. 저는 그 표정의 의미를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9월 24일, 시즌을 마치는 시점에서 의외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투수가 은퇴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듣고 싶었습니다. 그 표정의 의미를. 그리고 은퇴의 이유를 말이죠.
기사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29일, 상암동 프리즘타워에서 기아 타이거즈의 홍원빈 전 선수를 만났습니다.
사실 방송사라는 곳이 연예인도 많이 들락날락하는 곳이라 어지간한 외모가 아니면 눈에 띄지 않는데 홍원빈 선수는 195cm의 훤칠한 키와 작은 얼굴 때문에 금방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델인 줄 알았다는 제 말에 홍원빈 선수는 이렇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제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사실 홍원빈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던 것은 지난겨울 이영미 기자의 유튜브에서였습니다. 이영미 기자가 미국의 트레드 애슬래틱스에서 훈련 중이던 우리 선수들을 만나러 가서 찍었던 영상에 정우영(LG 트윈스), 최원준(두산 베어스) 선수와 함께 훈련하던 홍원빈이라는 선수가 있었거든요. 그때 이 선수가 누구인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미국에서 훈련을 하는 것이 돈이 한 두 푼이 드는 게 아닌데 1군에 자리 잡고 비교적 높은 연봉을 받는 두 명의 선수에 비해서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가 함께 있었던 것이 조금은 낯설었거든요.
“저로서는 승부수를 던진 미국행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냥 허송세월하다가 사라질 것인가, 그래도 내가 해볼 수 있는 걸 다 해보고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미국행을 결정했습니다. 사실 제 연봉에서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이걸 목표로 군대에서 받았던 월급을 차곡차곡 모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홍원빈 선수는 뭘 배웠을까요?
“아직 제가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배우고 온 것이 가장 컸습니다. 그냥 공만 던지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좋은 몸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됐습니다. 덕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유지하는 게 참 어렵더라고요.”
2025시즌을 퓨쳐스에서 시작한 홍원빈은 3월에 중간계투로 3승 1패를 기록했고 4월부터 본격적으로 마무리로 뛰기 시작하면서 4월에만 퓨쳐스 리그에서 5세이브를 기록했습니다. 이범호 감독은 그 당시부터 홍원빈의 콜업 가능성을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즌 초반에 퓨쳐스에서 정말 좋았습니다. 미국에서 배웠던 그대로를 마운드 위에서 유지할 수 있었고, 자신감도 붙었습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도 가득했던 시기였습니다.”

덕수고를 졸업하고 2019년 2차 1라운드로 기아 타이거즈의 유니폼을 입었던 홍원빈에게 2025 시즌은 꿈을 이룬 시즌입니다. 입단 후 처음으로 1군 무대를 밟게 됐으니까요. 2025년 5월 30일, 드디어 1군에 콜업됐습니다.
“정말 좋았죠.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1군 무대 첫 등판이었던 6월 3일 두산전. 기아 타이거즈는 8회 5득점의 대량득점을 통해서 11:2로 아홉 점 차의 큰 리드를 잡았습니다. 이범호 감독은 여유 있는 리드를 안은 상태에서 홍원빈의 1군 첫 투입을 결정했습니다. 홍원빈은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볼넷을 내줬고, 이후 아웃카운트를 잡아냈지만 안타와 희생플라이로 한 점을 내줬습니다.
“떨렸죠. 이게 1군 무대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운드에 올라서 처음에는 몸이 붕 떠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온갖 기록을 한 이닝에 다 했어요. 볼넷, 뜬공, 안타, 희플.”
그리고 9회말 2사. 홍원빈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궁금해했던 바로 그 표정이 나왔습니다.
야구장에 부모님과 형이 와있었어요. 꼭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 고개를 들어서 부모님과 형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3루 쪽 관중석을 두리번거리는데 관중의 환호성이 들려오는 거예요. 처음으로 듣는 저를 향한 큰 환호성이었는데 그 순간 온갖 감정이 머리에 스쳤습니다. 아마 그게 표정에 나왔던 것 같네요. 저는 어떤 표정이었는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이후 역시 유지가 어려웠습니다.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잘했어야 하는데요. 1군에서의 다음 등판이 많이 실망스러웠고, 이후 바로 퓨쳐스로 내려갔는데 등판 기회가 시즌 초반처럼 자주 오지 않았어요.”
사실 KBO의 퓨쳐스 리그는 매우 어려운 운영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수단에서의 1군 멤버를 제외하면 전원 퓨쳐스 소속이다 보니 인원만 해도 30~40인에 이릅니다. 한 해설위원은 퓨쳐스를 이렇게 평가한 바 있습니다.
‘초중고교생들이 같은 시험지를 가지고 시험을 치르는 곳.’
각자 바라보는 지향점이 다르지만 같은 경기를 치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팀에 따라서 3군과 재활군을 운영하는 팀이 있지만 공식 경기를 통해 실력을 측정하고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무대는 퓨쳐스뿐입니다. 각 팀마다 퓨쳐스 팀의 운영 계획이 있고, 홍원빈이 다시 퓨쳐스로 내려갔던 6월 초부터 홍원빈은 필승조로 기용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퓨쳐스로 다시 내려갔는데 다른 선수들에게 기회가 많이 돌아갔습니다. 저는 일단 한 번 1군에 선을 보이고 내려왔으니 다른 선수들에게도 기회가 돌아가는 걸 이해하면서 등판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6월 중순부터 다시 경기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아쉬운 모습들이 나왔습니다. 시즌 초반에 느꼈던 좋은 느낌도 이때부터는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이때 기회가 왔을 때 잘 던졌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시즌을 마치고 과감한 결정을 했습니다. 은퇴 결정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저도 매우 놀랐습니다. 시속 150km를 수월하게 던질 수 있는 축복받은 어깨를 가진 투수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한다는 점에 대해서 말이요. 그래서 이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는지 물었습니다.
“마운드 위가 제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지난 시즌을 치르면서 깨달았습니다. 이것저것 다 해보고 안되면 그때 내 앞길을 결정하자고 생각을 했는데 지난 1년 동안 저는 이것저것 다 해봤다고 생각합니다.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다 해봐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에 제 결정에 후회는 없습니다.”
본인은 자신에게 충분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기회를 말하기 전에 제가 잘 던졌어야 했습니다. 저는 기아 타이거즈의 모든 코치, 감독님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홍원빈은 이제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요?
“우선 미국으로 다시 가볼 생각입니다. 작년에 트레드 애슬레틱스에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아직 배울 것이 훨씬 더 많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정말 수박 겉핥기처럼 다녀왔던 거라서 이번에 꼭 한 번 제대로 배우고 싶습니다. 아니면 트레드가 아닌 드라이브 라인으로 행선지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트레드는 한 번 봤기 때문에 드라이브 라인 쪽은 어떻게 가르치는지도 한 번 보고 싶기는 합니다. 미국에 최근 비자가 잘 안 나온다고 하는데 갈 수 있다면 꼭 다양한 걸 보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각오를 남겼습니다.
“제가 뭘 할지 아직 결정된 건 없습니다. 사실 지난해 트레드에 처음 갈 때도 그랬습니다. 그래도 그곳에 다녀오면서 제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다녀오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한 번 다시 그곳으로 가서 부딪혀 보고 싶습니다.”

지난 1월 초, 홍원빈은 트레드 애틀레틱스의 공식 게시물을 통해 그곳에서 투구 훈련을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후 본인도 SNS로 시속 100마일을 목표로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당시 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선수로 복귀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단 선을 그은 상태입니다. 홍원빈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하면 그는 100마일을 던져서 다시 선수로서 마운드에 오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100마일을 본인이 직접 던져보고 그렇게 던질 수 있는 투수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야구 세계는 강속구와 스위퍼, 킥 체인지업의 시대가 됐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투수 코칭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제자리걸음 중입니다. 현재 그가 훈련 중인 트레드 애슬레틱스는 킥 체인지업을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피칭 아카데미이기도 한만큼 저는 홍원빈 선수가 많은 것들을 보고 또 배워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100마일의 강속구와 킥 체인지업을 직접 던지면서 그 노하우를 선수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투수 코치. 이런 코치도 우리 야구계에 한 명쯤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시속 157km를 던지는 영건 파이어볼러의 은퇴가 끝이 아닌 KBO 투수들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기를 기대합니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