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군 복귀 첫날부터 사고 치다
8회 말이다. 홈 팀이 위태롭다. 직전 수비 때다. 2점을 잃었다. 그 바람에 우세가 사라졌다. 4-4 동점을 허락한 것이다. 몹시 불길한 흐름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엎친데 덮친 격이다. 금쪽같은 주자 하나가 사라진다. 김영웅(볼넷 출루)이 2루에서 횡사한다. 투구가 빠진 틈이다. 득점권을 노렸지만, 포수 저격에 걸렸다.
투 아웃이다. 누상은 깨끗하다. 희망은 물거품이 된다. 그렇게 9회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10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 – NC 다이노스)
하지만 이때부터다. 드라마가 시작된다. 베이스가 하나씩 차곡차곡 쌓인다. 볼넷(강민호)-내야안타(전병우)-볼넷(김지찬). 어느 틈에 만루가 됐다.
이어서 장내 멘트가 들린다. “1번 타자 박승규.” 순간 라이온즈 파크가 들썩인다.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진다. 특히 3루 쪽은 더 뜨겁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도 그럴 법하다. 가장 핫한 타자가 등장한 탓이다. 이날 엔트리에 등록했다. 그러더니 4타수 3안타로 맹렬하게 폭발한다.
내용도 다채롭다. 3루타-단타-홈런을 골고루 쳤다. 맞다. 딱 하나가 빠졌다. 2루타다. 어쩌면 대기록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이 설레게 만든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3구째는 유인구다. 체인지업(127km)을 잘 참아낸다. 카운트가 2-1이다. 타자 편이다. 그리고 4구째다. ‘어쩔 수 없는’ 직구다. 146km짜리가 가운데로 몰린다.
용서는 없다. 매끄러운 스윙이 출발한다. 완벽한 타이밍이 만들어진다. “빡!!!” 공 쪼개지는 소리가 난다. 현장 용어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제대로 찍혔다.”
타구에는 강력한 백스핀이 걸린다. 덕분에 두 번은 살아가는 느낌이다. 중견수가 따라가지만 딱 한 뼘이 부족하다. 몸을 날려봤다. 그러나 소용없다. 공은 담장 바로 앞에 떨어진다.
그 사이 3명이 홈을 밟는다. 스코어 4-4는 순식간에 7-4로 바뀐다. 덕분에 이 안타의 수식어도 복잡하고, 길어진다.
‘싹쓸이, 혹은 주자 일소, 결승 3타점 적시타’.

3루 코치는 멈추라고 막았지만
이 한 방으로 사실상 승부가 끝났다. 홈 팀의 승리는 확정적이다. 그러나 진가는 따로 있다.
타자가 2루를 돈다. 그 순간 3루 코치(이종욱)는 양팔을 번쩍 든다. ‘그만, 됐다. 거기서 멈춰라.’ 그런 지시다. 주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사인이다.
하지만 ‘항명’이 일어난다. 코치의 명령은 무시된다. 달리기는 멈추지 않는다. 어느 틈에 3루까지 도달한다.
이종욱 코치만이 아니다. 덕아웃에서도 난리가 났다. 결승점은 뒷전이다. 다들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른다. 2루를 가리키는 동료들도 많다. ‘다시 돌아가.’ 그런 간절한 외침도 들린다.
심지어 구자욱은 뛰어 들어갈 기세다. ‘왜 달렸냐’고 펄쩍펄쩍 뛴다. 하다못해 외국인 선수는 머리를 감싸 쥔다. 르윈 디아즈다. 덕아웃 보호대를 쾅쾅 친다. ‘너무 아깝다.’ ‘너무 아쉽다.’ 그런 반응들이다.
그렇다. 2루에서 멈춰야 했다. 그래야 대기록이 성립된다. 그런데 3루까지 달렸다. 때문에 통산 33번째 사이클링 히트는 날아갔다.
일단 당시를 복기해 보자. 이미 승부는 결정적이다. 7-4로 기울었다. 9회 초만 막으면 된다. 게다가 2사 후다. 2루에 있으나, 3루에 있으나. 엄청난 차이는 아니다.
실전에서도 나타났다. 다음 류지혁의 2루타가 나왔다. 설사 2루에 있어도 충분했다. 득점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타구였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경기 후 인터뷰 때다. 당연히 4안타의 주인공이 무대에 섰다. MBC Sports+ 중계 팀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다.
김수환 캐스터 “8회 얘기를 해보죠. (중략) 2루타가 부족한 상황에서, 잘 맞은 타구를 만들었는데. 뛸 때 3루 이종욱 주루 코치의 사인을 보셨나요?”
박승규 “아니요. 저는 보지 않았고, 일단은 3루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면, 언제든 3루로 달릴 생각을 가지고 타석에 임했습니다.”
김수환 “아~. 2루에서 스톱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박승규 “예. 물론 개인의 기록이 되게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조금 더 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했던 것 같습니다.”
허도환 해설위원 “아니, 벤치에 있는 선배들 다 보셨죠?”
박승규 “예.”
허도환 “전부 다 다시 2루로 돌아가라고 했잖아요. 그 마음인 거예요. 사이클링 히트가 프로야구 선수를 하면서 한 번 하기도 힘든 기록인데. 박승규 선수는 할 수 있었잖아요. 선배 입장에서는 아쉽긴 했거든요.”
박승규 “… …”
혹시 오해할 부분이 있다. 주인공의 답변 중이다. “코치의 사인을 보지 않았다”라고 한 얘기 말이다.
해석이 필요하다. 사실 그럴 리는 없다. 아마 이런 뜻이리라. ‘코치님은 내 기록을 생각해서 멈추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3루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 달렸다.”
실전 역시 그랬다. 상대 중계 플레이는 3루까지 오지도 못했다. 사실 슬라이딩도 필요 없었다. 그만큼 너끈한 세이프였다.

박진만 감독의 ‘신의 한 수’
하루 전이다. 그러니까 비로 휴식일이 된 9일이다. 상대 선발도 하루가 밀렸다. 구창모가 라이온즈 전에 등판하게 됐다.
그러자 박진만 감독이 회심의 묘수를 떠올린다. 25살짜리 외야수의 콜업이다.
“조금 빠른 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좌완 구창모가 나올 경우 박승규를 데려와 바로 선발 라인업에 투입하려고 한다.”
작년 8월에 빠졌다. 사구에 맞아 손가락 골절상을 입었다. 이후 200일이 넘었다. 이제 퓨처스 경기 1게임만 치른 상태다. 그럼에도 즉시 투입을 결정한 것이다. 그만큼 신뢰가 두텁다는 얘기다.
실제로 깜짝 기용이다. 1번 타자 자리를 맡긴다. 그리고 첫 타석부터 기대에 부응한다. 3루타(1회)로 포문을 연 것이다. 이어 우전 안타(3회)와 좌월 솔로(5회)를 연달아 터트렸다. ‘구창모 저격수’ 역할을 200% 해냈다.
이보다 더 흐뭇할 수는 없다.
“우리 타선이 좌타자 비중이 높다. 그런 상황에서 박승규의 복귀가 팀에 도움이 된다. 오랫동안 부상으로 고생했는데, 건강하게 돌아와서 다행이다. 오늘은 마치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팀을 위해서 열심히 뛰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박진만 감독, 10일 경기 후)
특히 8회 장면은 인상적이다. 대기록을 포기하고, 득점한 다음이다. 감독이 직접 벤치 구석까지 찾아간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 있는 주인공의 손을 꼭 잡는다. 기특함이 듬뿍 담긴 눈길이다.
KBO 리그는 1982년에 출범했다. 올해가 45번째 시즌이다. 그동안 사이클링 히트는 32번이 나왔다. 두 번이나 기록한 타자도 있다. 양준혁(1996년, 2003년)이다. 에릭 테임즈는 2015년에만 2회 달성했다.
박승규는 대기록 작성에 실패했다. 33번째 영광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때문에 KBO 사이트에는 등재되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3루타는 팬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팀보다 더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그의 또렷한 말과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