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 이복현의 3년, ‘금융감독의 정치화’

금융감독 역사상 최고 실세…정책도 좌지우지

개별 기업 유상증자에 사실상 인허가제 도입

금융지주 회장 연임 문제도 그때그때 마음대로

오는 6일, 3년 임기가 끝나는 이복현 원장의 퇴임을 앞두고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중순부터 수석부원장 등 주요 간부들이 나서 4주 연속으로 기자들을 상대로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보험사의 IFRS17, K-ICS 등 신제도 도입과 감독 방안, 부동산 PF 추진 성과, 자본시장 혁신, 금융소비자 보호 등입니다. 이번 릴레이 브리핑은 퇴임을 앞둔 이복현 원장이 자신의 3년 재임 기간 중 성과를 널리 알리고 차기 정부 출범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는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정부 조직이든 기업이든 퇴임이 임박한 기관장이나 CEO는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고 떠들기보다는 평가는 후임자와 외부에 맡기고 조용히 떠나는 게 상례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복현 원장의 이런 행보는 참으로 특이하고 낯섭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스스로 생각하듯 지난 3년간 밖으로 자랑할 만큼의 성과와 치적을 쌓았을까요? 이 원장은 과거 검찰 재직 시절 ‘윤석열 사단’의 일원으로 윤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고, 그 덕분에 윤석열 정부 내에서 핵심 각료로 활약했습니다. 금감원은 금융위 산하의 작은 조직에 불과하지만, 이복현 원장은 역대 금융감독기관장 가운데에서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을 겸직했던 이헌재 전 원장이 최고 실세로 꼽혔지만 이복현 원장은 금감원장 직만으로도 이헌재 전 원장을 압도하는 파워를 지녔습니다. 금융감독은 물론 금융정책까지 마음대로 주물렀습니다.

이복현은 윤석열 정부의 금감원장 겸 금융위원장

이 원장의 막강한 파워의 원천은 당연히 윤석열 전 대통령입니다. 정권 초기 대통령이 요구한 금융권 채용 확대 방침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던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대통령의 신뢰를 잃은 이후, 윤 전 대통령은 금융 현안이 있을 때마다 이복현 원장을 통해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복현 원장은 사실상 윤석열 정부의 금융위원장 겸 금감원장이었습니다. 금융정책과 감독 모두 이 원장이 방향을 정하면 금융위는 여기에 맞춰 행정 절차를 밟는 식이었습니다. 때로는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이복현 금감원장의 지시를 받는 민망한 장면이 외부에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열린 마지막 월례 기자간담회에서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상급 기관장으로서 이복현 원장을 제대로 관리하고 제어하지 못했다는 지적에 대해 자신의 리더십 부족 탓으로 돌렸지만 윤석열 정부의 금융위원장들이 가슴에 품었을 자괴감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경제·금융정책 혼란의 중심엔 늘 이복현

비상계엄 선언과 내란 사태는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될 때 벌어지는 끔찍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금감원장이 금융위원장 역할까지 맡고, 금융 관련 정책과 감독업무를 독점할 때도 해괴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더욱이 전문 경제관료도, 전문 금융관료도 아닌 검찰 출신 인사가 칼을 휘두른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치의 비전문가 윤석열 전 대통령을 통해 확인됐지만 비전문가가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행사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혼선과 갈팡질팡입니다. 이복현 원장은 재임 기간 내내 정책 혼선을 자초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하반기의 가계대출 관련 혼란입니다. 처음에는 무리한 대출 확대가 가계부채 문제를 악화시킨다며 은행들의 대출금리 인상을 유도하더니 금리 인상이 은행만 살찌운다는 비판이 나오자 다시 대출 한도 축소를 지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보자 다시 대출 확대를 요구했습니다.

이 원장으로부터 비롯된 대출 혼란은 결국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개입하면서 가까스로 수습되었지만 이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합니다. 증권시장에서의 공매도 재개 논란과 혼선, 상법 개정을 둘러싼 ‘사의 소동’ 등 윤석열 정부 내내 경제·금융정책 혼란의 중심에는 늘 이복현 원장이 있었습니다.

한화에어로 유상증자가 힘들었던 이유

정책 혼선보다 더 큰 문제는 규제 강화와 함께 정치적·정무적 판단에 따라 금융감독권이 행사되었다는 것입니다. 금감원은 지난 2월 소액주주 보호를 명분으로 ‘유상증자 중점 심사’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주식 가치 희석, 일반 주주의 권익 훼손, 재무적 위험이 큰 경우 금감원이 집중 심사를 통해 유상증자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입니다. 명분은 그럴싸하지만 실상은 기업이 유상증자를 하려면 금감원의 허가를 먼저 받아야 하는, 사실상의 유상증자 허가제를 도입한 것입니다. 상법과 자본시장법에 따라 처리하면 될 일을 금감원이 개별 기업의 유상증자를 일일이 심사하겠다는 것은 명백한 직권 남용이자 관치 행정입니다.

더 큰 문제는 유상증자 심사과정이 정치적으로 결정되고, 여론에 따라 오락가락한다는 점입니다. 단적인 예로 삼성SDI(1조 7,000억 원), 한화에어로스페이스(2조 9,000억 원), 포스코퓨처엠(1조 1,000억 원)의 유상증자 중점 심사 과정을 보면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들 유상증자 가운데 가장 쉽게 관문을 통과한 곳은 삼성SDI이고, 가장 까다롭게 심사를 받은 곳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입니다. 삼성SDI의 유상증자에 대해 이복현 원장은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투자자금 조달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최대한 신속히 심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금감원은 빠르게 승인을 내주었습니다.

반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경우 금감원은 무려 세 차례나 유상증자 증권신고서의 정정을 요구했고 결국 당초 계획보다 한 달 늦게 유상증자를 진행하게 됐습니다. 이복현 원장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유상증자 공시 직후에는 “엄청나게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으나 승계 논란이 불거지자 돌변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삼성과 한화의 유상증자에 대해 금융당국 주변에서 정치적 해석이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각에서는 삼성SDI의 유상증자가 빠르게 승인된 배경으로 그룹 2인자의 직접적인 양해와 구명이 있었다는 말도 나옵니다. 금감원이 애초에는 오너의 직접 설명을 요구했지만 그룹 총괄부회장이 대신 나섰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러한 이야기가 시장도 아닌 금융당국 주변에서 나온다는 것 자체가 현행 유상증자 중점 심사 제도의 문제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40~50년 전에나 있을 법한 비상계엄 선포가 21세기 경제 대국 대한민국에서 현실이 돼 대한민국 공동체에 회복 불능의 충격을 준 것처럼 1980년대 군사정권 수준의 ‘유상증자 인허가제’라는 낡은 금융규제가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시행되면서 믿기 어려운 소문들이 무성합니다.

함영주 김기홍은 연임되고 조용병 손태승은 안되고

윤석열 정부 초기 이복현 금감원장은 금융지주사 회장들을 ‘제왕적 권력’이라 비판하고 금융지주와 은행의 지배구조 선진화를 지속적으로 강조했습니다. 그는 특히 금융지주 회장들의 연임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임기 만료된 윤종규 KB금융 회장,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 김태오 iM금융 회장 등이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일부 회장들이 연임에 의지를 보이면 이 원장은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는 식의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지난해 말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이복현 원장이 무슨 까닭인지 연임에 관대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은 사법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았음에도 연임에 성공했고, 김기홍 JB금융 회장은 3연임에 이르렀습니다. 이복현 원장과의 친소관계 또는 정치적 판단에 따라 금융지주 회장이 연임되거나 물러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전임 손태승 회장의 부당대출 사건과 관련해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에 대한 퇴진 압박은 금융감독권 남용의 전형적 사례입니다. 은행법 등 어디에도 금감원장이 직무 정지나 해임 권고와 같은 징계가 아닌 방식으로 금융사 CEO의 거취에 개입할 권한은 없습니다. CEO의 인사권은 이사회와 주주총회에 있을 뿐입니다. 더 기막힌 일은 비상계엄 사태로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이 확실시되자 “임종룡 회장이 중도에 물러나면 거버넌스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임기를 채우는 게 좋다”고 말을 바꾼 것입니다. 순전히 정치적 판단에 따라 금융지주 회장의 진퇴를 결정하고, 물러나라거나 계속 일하라는 식의 발언을 일삼았습니다.

금융감독체계 개편보다 더 중요한 일

이복현 금감원장의 절대 권력과 오락가락 행정은 경제·금융 정책뿐 아니라 금융소비자, 금융산업 전반에 피해를 주었습니다. 게다가 금융감독원이라는 조직 자체를 무너뜨렸습니다. 금감원의 내부 갈등이 심화돼 노조위원장이 불신임당했고 직원들의 이직과 퇴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인력 부족 상황 속에서 원칙 없는 인사 운영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업무가 없는 상태로 방치된 시니어 간부들이 세 자릿수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번 대선에서 집권이 유력한 민주당은 금융위원회의 정책 기능을 기획재정부로 이관하고 금융위와 금감원을 통합해 금융감독위원회로 개편하는 방안 등을 검토 중입니다. 그러나 조직 개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금융감독기관의 수장으로 앉히느냐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최흥식·김기식·윤석헌 금감원장 선임은 모두 실패한 인사였고, 윤석열 정부의 이복현 원장 인사는 그보다 더한 실패작입니다. 윤석열 정권의 금융감독원은 더 이상 관료조직이 아니라 정치집단으로 변질됐습니다. 새 정부의 금융감독기구 개편은 이런 ‘금융감독의 정치화’를 바로잡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새 정부가 ‘내란 종식’에 나선다면 금융감독기구 내에서 지난 3년간 벌어진 해괴한 일들도 함께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흘 뒤 금융감독원을 떠날 이복현 원장이 평생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 있습니다. ‘주역’에 나오는 ‘괄낭무구(括囊無咎)’입니다. “주머니를 단단히 동여매듯 입을 다물면 허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사는 대개 입이 화근입니다.

박종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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