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이라면 안 쓸 수 없는, 마치 정체성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아래아한글’. 1980~90년대생 왱구라면 어릴 때 워드 자격증 준비하면서 이 프로그램 탓에 고생한 사람도 많을 거다.

업무 관행상 주로 아래아한글만 써야 하는 한국 공무원들에겐 애증 섞인 녀석이지만, 그래도 한글로 문서를 작성하는 데 이만한 것도 없다.

그런데 같은 한글을 쓰는 북한에선 어떤 도구를 활용해 문서를 만들고 있을까. 유튜브 댓글로 “북한 사람들은 문서 작성할 때 무슨 프로그램을 쓰는지 알아봐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취재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북한에도 나름 아래아한글 역할을 하는 워드프로세서가 있다. 이름은 ‘창덕’이다. 프로그램명은 김일성이 다녔던 학교에서 따왔다

[김흥광 북한지식인연대 대표]
순수 한글 문서 편집을 위해서 ‘창덕’이 있고 그리고 또 표 계산 프로그램 그걸 위해서 ‘룡마’라고 하는 프로그램이

한국에서 아래아한글은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문서작성 프로그램 계의 왕좌를 차지했다.한글 표현력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민간 경쟁에서 살아남은 아래아한글과 달리, 창덕은 북한 정권 주도로 1986년 개발됐다. 애초에 북한 주민은 다른 나라 소프트웨어를 접하기가 어려우니 그냥 다 창덕만 쓴다고 봐도 된다.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할 정도로 북한 IT 개발자들의 수준은 상당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영재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창덕 개발에는 일본에 기반을 둔 조총련계 개발자들도 참여했다.

[김흥광 북한지식인연대 대표]
오사카 정보전문학교, 조총련하고 연결됐죠. 조총련 전자 소프트웨어 회사하고 북한에서 평양정보센터(現 평양기술정보국)하고 서로 협력을 해서 소스코드도 그렇고 개발을 서로 협력해서 하는 거죠.

창덕 프로그램 곳곳에는 지배층 우상화의 흔적이 남아있다. 일단 창덕을 실행하고 화면에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이름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굵은 글꼴로 나타난다.

김씨 일가 이름에는 단축키도 붙는데, Ctrl키에 I를 누르면 김일성이, J를 누르면 김정일이, K를 누르면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각 첨부)이 굵은 글씨로 나온다고 한다. 이들의 이름이나 호칭, 직책은 줄이 바뀌어도 띄어쓸 수 없다고.

창덕은 현재 13.0 버전 혹은 그 이상 업데이트 된 걸로 알려져 있다. 최신판을 구하려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북한의 잇따른 핵실험 때문에 대북 제재가 실시되면서 국내 반입 통로가 사실상 끊겼기 때문이다.이게 다 김정은 때문이다.

[통일부 관계자]
북한 물품을 반입할 목적으로 이걸 중국에서 사오는 경우에는 또 북한에서 반입하는 물품으로 볼 수도 있다고

아래아한글과 창덕은 비슷하다. 북한에서 공대 교수를 하다 탈북한 김흥광 대표 논문에 따르면 창덕과 아래아한글 기능은 약 82.6% 일치한다. 두 소프트웨어 모두 MS 워드 등 기존 제품을 모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차이점은 창덕과 비교해 아래아한글에 탑재된 기능이 좀더 많다는 정도. 아래아한글 기능이 더 좋다면 북한 입장에선 그냥 이 프로그램을 가져다 쓰는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주체성을 강조하는 북한의 자존심 탓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두 소프트웨어는 호환도 되지 않는데, 일단 확장자부터 다르다. 또 남북한이 각자 쓰는 키보드 체계가 다른 것도 문제다.

그럼 한가지 의문. 남북 주민들이 과거 한글로 된 문서를 주고받을 때는 어떤 방식을 썼을까. 북한과 공동 한글사전 편찬작업을 했던 전문가 얘기를 들어봤다.

[최준호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편찬1부장]
공식적으로는 북측에서 hwp 그 당시 사용을 안한다고 해가지고요. 그래서 그쪽은 워드 파일로 가져오고요. 저희가 3가지 파일(hwp, 워드, pdf)로 CD에 구워가고 했었습니다.

최근에는 남북이 문서 교류 할 일이 있으면 PDF 파일을 주로 활용한다고 한다. 2018년 판문점 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건넨 문서파일이 PDF였다고.

미래에 남북 교류가 재개된다면 남북 간 문서 호환 프로그램이 새롭게 개발될 수도 있겠지만, 그 시기는 아마 김정은도 잘 모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