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새로운 것들은 프로토 타입을 거쳐 완성됩니다. 시제품 또는 초기모델을 뜻하는 ‘프로토타입’ 시리즈는 모든 것의 탄생 이야기를 다룹니다. 지금은 당연한 여러 발명품과 기업의 초창기 이야기, 프로토타입에서 들려드립니다.
조립PC의 추억...CPU칩은 인텔
지금 30~40대 분들이라면 학창 시절 조립PC의 추억이 있으실 텐데요. 값비싼 브랜드 PC를 사기 부담되던 당시, 호기롭게 직접 컴퓨터 부품들을 하나 둘 조립해 자신만의 PC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추억이 있을 겁니다.
물론 요즘에도 조립PC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과 달리 당시엔 유튜브도 없고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밤새가며 메인보드에 부품을 장착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PC조립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 중 하나. 크기는 작지만 가장 비싼 부품이며 컴퓨터의 두뇌라 불리는 중앙처리장치(CPU)를 끼워 넣을 때는 다른 부품보다도 더 긴장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대다수의 분들은 아마 CPU의 대명사, 바로 인텔 제품을 선택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 역시 인텔의 i5 칩을 설치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PC가 대세였던 시절, 압도적 시장 점유율을 보였던, 반도체의 황제. 한때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호령했던 인텔이 오늘 프로토타입의 주인공입니다.
반도체칩 황제, 인텔의 몰락
앞서 인텔의 전성기 시절의 추억팔이를 잠깐 했지만 최근 인텔의 상황은 권불십년, 격세지감이라는 성어로 대신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전 세계 CPU 시장 점유율 독보적 1위를 달렸던 인텔은 현재 엔비디아, 삼성전자, TSMC 등 주요 반도체 기업에 하나둘 추격을 허용하더니 올해 3분기 매출은 SK하이닉스보다도 뒤처질 것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가 분기 매출로 인텔을 꺾게 된다면 이는 역대 최초의 일이라고 합니다. 인텔은 어쩌다 이렇게 무너지게 된걸까요. 인텔의 프로토타입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노벨상 탄 천재 공학자, 사실은 성격파탄자?
인텔의 시작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미국의 대표적 전자·전기 연구소인 벨연구소에는 불세출의 스타 연구원들이 있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윌리엄 쇼클리, 존 바딘, 월터 브래튼인데요. 이 3명은 1940년대 반도체 시장의 게임체인저라 불리는 ‘트랜지스터’를 개발하게 됩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이 3명의 연구원은 1956년 노벨상을 받았는데요. 그중 윌리엄 쇼클리로부터 인텔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910년 영국 런던에서 출생한 그는 캘리포니아 공대를 졸업하고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공학자입니다.
그는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미국 서부의 IT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로 실리콘밸리에 ‘실리콘’을 가져온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반도체 시장에 이바지한 바가 큽니다.
그러나, 천재는 괴짜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쇼클리 역시 괴팍한 성격과 원만치 못한 대인관계로도 정평이 나 있었는데요. 그로 인해서 벨연구소에서도 동료 학자들과 연일 다투고 문제를 일으켜서 결국 벨연구소를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벨연구소를 떠난 그는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세우게 됩니다. 그의 훌륭한 실력 덕에 당연히 유수의 인재들, 그리고 쇼클리의 제자들이 해당 연구소에 합류했는데요.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 등 20여명의 젊은 과학자들이 곧바로 쇼클리 연구소에 입사합니다.
하지만 동료들과도 잘 지내지 못했던 쇼클리는 리더로서의 자질 역시 부족할 수 밖에 없었고 직원들과 갈등이 지속됩니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연구소를 떠나기 시작해 1957년 노이스와 무어까지 총 8명의 연구원이 쇼클리 연구소를 떠나 창업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8인의 배신자’ 실리콘밸리를 구축하다
당연히 쇼클리는 이들을 ‘8인의 배신자’라고 낙인찍고 맹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쇼클리 성격을 잘 알던 업계 사람들은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실리콘밸리에서는 괴팍한 쇼클리 덕에 우수한 인력들이 훌륭한 IT벤처기업들을 창업하며 지금의 실리콘밸리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쇼클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 8인의 배신자가 만든 기업이 오늘의 주인공 인텔을 포함해, 내셔널 세미컨덕터,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스 등입니다.
인텔을 창업한 인물은 다름 아닌 8인의 배신자 중 마지막 배신자 2인. 바로 노이스와 무어입니다. 서로 코드가 잘 맞았던 그 둘은 힘을 합쳐 창업을 결심하는데요. 연구 역량은 뛰어났으나 역시나 자본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셔먼 페어차일드라는 사업가를 만나게 됩니다.
페어차일드는 당시 페어차일드 카메라 앤 인스트루먼트라는 군수업체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노이스와 무어는 트랜지스터와 반도체가 바꿀 세상의 미래를 설명했고 페어차일드를 설득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창업한 회사가 바로 1957년 탄생한 페어차일드 반도체입니다. 사실 지금은 일상어가 된 벤처캐피털(VC) 투자가 이뤄진 첫 사례가 해당 창업이라고 불립니다.
페어차일드는 트랜지스터 생산에 성공하고 실리콘 집적회로를 설계 및 생산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12명에서 시작한 회사는 곧 1만2000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커졌습니다. 하지만 자본을 댄 페어차일드의 경영 간섭이 심해지면서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노이스와 무어는 다시한번 퇴사를 결심하고 또 한번의 창업을 엿봅니다.
최초의 벤쳐 캐피탈 투자 유치한 인텔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는 그간 연구해온 반도체 칩 설계 및 생산을 본격화할 자신들만의 기업 설립에 도전했습니다. 이번에는 독립적인 경영을 보장받는 것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두고 투자자 찾기에 나섰는데요. 이전 페어차일드를 그들에게 소개해준 장본인, 투자자 아서 록이 다시 한번 그들에게 손을 내밉니다.
1926년생인 아서 록은 시러큐스 대학 조럽 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을 졸합한 수재인데요. 그는 증권 분석가로 경력을 시작한 뒤 첨단기술기업에 관한 관심을 키워갑니다. 이후 자본가들로부터 투자금을 모아 기술기업에 투자하는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페어차일드 반도체 창업에 깊숙이 이바지하며 노이스와 무어를 눈여겨본 그는 그들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하다며 투자를 다시 결정합니다. 그렇게 노이스와 무어, 그리고 록은 힘을 합쳐 새로운 반도체 기업을 창업하기로 결의합니다.
그렇게 1968년 탄생한 기업이 바로 인텔입니다. 인텔은 integrated Electronics의 약자로 굳이 직역하자면 통합전자라고 번역됩니다. 집적회로로 대표되는 인텔의 반도체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됩니다.
반도체의 전설, 무어의 법칙의 주인공
인텔의 공동창업자 중 한명인 고든 무어는 1929년 출생해 UC버클리에서 화학을 전공한 뒤 캘텍(캘리포니아 공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공학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무어의 법칙’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무어의 법칙은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24개월 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법칙으로 그는 무려 1960년대 직접 반도체 회로를 연구·개발하며 체득한 경험을 법칙으로 만들었습니다.
로버트 노이스 역시 1927년 아이오와에서 태어나 그리넬대를 졸업하고 MIT 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물리학자입니다. 그는 인텔의 명성을 가져온 CPU의 원형,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많은 분이 잘 모르시겠지만 사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기업이 현재 주도하고 있는 메모리반도체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인텔은 SROM, ROM, DRAM과 같은 메모리반도체 생산에 주력하며 사세를 빠르게 성장시킵니다.
그렇게 1971년 첫 흑자를 기록했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노이스가 중심이 된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에 성공하며 메모리반도체와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성장의 양대축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일본의 반도체 치킨게임, 인텔의 위기
승승장구하던 인텔에게 일본이 첫 시련을 선사합니다. 바로 1980년대 버블경제로 호황을 누리던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미래 먹거리 발굴에 나선 것인데요. 최종적으로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 투자하기로 결론을 내립니다. 일본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NEC, 도시바, 후지쯔 등 일본 반도체기업이 전략 육성됩니다.
그렇게 반도체업계에 그 유명한 첫 ‘치킨게임’이 1980년대 발생합니다. 수익 대신 생존을 택한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가격 인하를 경쟁적으로 단행하며 시장 혼란을 일으킵니다. 기존 메모리반도체 강자였던 인텔은 일본의 가격 공세를 버틸수버틸 수가 없었고 1984년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40% 폭락하며 인텔은 원가조차 회수하지 못하는 처지가 됩니다.
결국 당시 사장이던 앤드루 그로브는 고든 무어를 찾아가 결단을 촉구합니다. 인텔의 모체이자 시작이었던 메모리반도체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결국 인텔은 1985년 메모리 반도체 사업 철수를 선언하고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2만4000명이던 당시 직원은 1만8000명으로 줄었고 인텔은 CPU 시장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몰립니다.
위기가 기회로...PC시대 이끈 인텔
그러나 오히려 1980년대 후반부터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등장에 힘입어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왔고, CPU 강자였던 인텔의 전성기가 왔습니다. 인텔은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의 그래픽 기반 운영체제 윈도우즈와 함께 ‘윈텔’이라는 조어로 불릴 정도로 컴퓨터 시대의 주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PC시대도 스마트폰 출시 이후 모바일 시대의 시작과 함께 그 전성기를 다하게 됩니다. 이후 인텔은 2010년대 큰 변화의 흐름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정확히는 새로운 강자의 등장 속에서 계속해 그 영향력이 줄어들었습니다.
그 사이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일본의 메모리반도체 기업들과 경쟁해 그 시장을 뺏었고 삼성전자는 2017년 2분기 처음으로 인텔보다 더 많은 영업이익을 얻으며 인텔의 자존심을 구기는데 일조합니다. 같은 해 파운드리(수탁 반도체 생산) 기업 TSMC 역시 처음으로 인텔의 시가총액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리고 2023년, 인텔과 경쟁조차 되지 않던 그래픽카드 제조업체 엔비디아는 인공지능(AI) 산업의 성장바람을 타고 모든 반도체 기업을 압도하고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으로 군림하기 시작합니다. 엔비디아가 이렇게 거대 반도체 기업이 될 것이라곤 3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어려웠던 일입니다.
현재진행형인 인텔 위기, 이번엔 극복될까?
인텔의 위기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몇 년 전부터 야심차게 뛰어들었던 파운드리 사업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 시각이 더 큽니다. 사업 매각설이 한차례 돈 후 결국 분사 결정을 했지만 경쟁력 확보까진 최소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란 분석입니다. 이런 가운데 모바일 칩 개발 기업 퀄컴이 인텔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며 인텔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구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닌 상황. 미국 정부에서도 미국 반도체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인텔의 몰락을 두고 보기만 할 것 같진 않을 텐데요. 위기의 인텔, 과거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철수하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던 당시처럼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인지 그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