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주역…전통시장을 꾸려가는 사람들 [장다르크 이야기⑥]
아침 이슬과 함께 문을 열고, 저녁노을이 질 무렵 하루를 정리하는 경기도내 전통시장 상인들. 이들 뒤에는 든든한 또 다른 여성이 있다. 고단한 아침 피로를 날려줄 맛 좋은 커피를 들고 뛰는 ‘커피 이모님’부터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아 얼굴만 봐도 반가운 ‘60년 단골’까지. 전통시장을 지키는 여성 상인들과 하루를 함께하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열한 번째 場다르크. 의정부의 ‘에너지’ 이영순 대표(69) 이야기
‘따르릉’…이른 아침 의정부제일시장에 울려 퍼지는 전화벨 소리에 이끌려 도착한 ‘지영커피’. 이영순 지영커피 대표(69)는 그 어느 시장 상인보다 분주한 아침을 보낸다. 하나둘 문을 여는 가게 사이로 물 맺힌 보냉가방을 들고 뛰어다니는 이영순 대표는 내년이면 칠십을 바라보는 지긋한 여성 상인이다.
이른 아침 분주히 장사를 위해 문을 열고 있는 상인들 손에는 상상만으로도 시원해지는 냉커피가 한 잔씩 들려있다. 대형 프렌차이즈 로고가 없는 이 물 맺힌 종이컵은 의정부제일시장 ‘지영커피’의 상징이다.
바쁜 아침을 보내고 한숨 돌리던 이 대표를 만나러 들어간 조그마한 가게. 반갑게 취재진을 맞이한 이 대표는 “우리 가게가 의정부제일시장에서는 커피숍이지. 너무 덥고 추우면 들러서 커피 한잔에 더위도 식히고 몸도 녹이고. 잠깐 수다 떨면서 시간도 보내고 그래”라고 답하며 바삐 커피를 준비했다.
1996년부터 커피 이모님으로 불리기 시작한 이 대표는 시장에서 보낸 28년의 세월이 순식간이라고 한다. 그는 “1996년에 시작했어. 올해가 2024년이니까 벌써 28년, 곧 30년을 바라보네. 처음엔 이런 가게는 어림도 없었지. 백화점에서 떡볶이랑 순대를 팔던 사람이 무슨 돈이 있어서 가게를 내. 그래도 ‘내 일 한 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용기 내 시장에 나왔어. 처음엔 시장 구석에 있는 계단에서 커피를 만들어 배달하다가 지금은 작지만, 아늑한 이 가게를 얻어서 장사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쉴 틈 없이 울리는 전화에 아침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간다는 이 대표는 “바빠서 전화를 놓치는 일도 있지. 그래도 참 이곳 시장 상인들한테 고마워. 시장 앞 큰길 하나만 건너면 큰 커피가게가 수두룩한데, 그래도 같은 시장 상인이라고 우리 가게를 이용해 주잖아”라며 “내가 이분들 아침잠을 깰 수 있게 하고, 점심 식곤증을 물리칠 수 있게 하는 ‘에너지’라는 자부심도 있지”라면서 웃어 보였다.
서글서글한 성격, 호탕한 목소리와 웃음을 지닌 이 대표는 ‘긍정 에너지’로 가득했다. 그는 “지금은 손님도, 상인도 많이 줄었어. 와 보면 알겠지만 나이 든 사람이 많아. 그래도 나처럼 몇십 년 동안 한 자리에서 꾸준히 일하신 분들이야. 다들 자부심도 있으시고. 그런 분들이 함께 힘 모아 꾸려가는 전통시장에 젊은이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어”라면서 “커피 이모도 있으니까, 데이트 코스로 와주면 달달한 커피 맛있게 타 줄게요”라고 전했다.
■ 열두 번째 場다르크. 파주의 ‘역사책’ 최조순 여사(87) 이야기
“여기를 잡아서 이렇게 까면 쉽지!” 파주문산자유시장을 거닐다 정겨운 웃음소리가 퍼지는 평상 앞에서 취재진은 걸음을 멈췄다.
고구마 순 껍질을 쉽게 벗기는 방법에 관해 각자의 노하우를 내며 연신 웃음꽃을 피워내던 상인들. 그 속에서 시장의 홍보대사를 자처한 최조순 여사(87)는 한 바구니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고구마 순을 다듬으며 실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는 “우리 시장은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 역사를 책으로만 배운 젊은이들, 아이들 교육하려고 내려오는 부모들, 관광하는 외국인들까지 좋아하는 곳이야”라며 시장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올해로 여든일곱이 된 최 여사는 6·25전쟁 이후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다. 최 여사는 “열세 살에 인민군 따라 잠깐 넘어왔는데 지금까지 살 줄은 몰랐지. 원래 우리 집이 38선 20리에 있는데 난 바라보기만 해. 날 밝으면 옷 걸쳐 입고 시장에 가는 게 하루의 전부야”라 활짝 웃었다.
최 여사는 구매할 물건이 없어도 매일 시장을 찾는다. 저녁 반찬이 될 고기와 나물을 사고, 시장 상인들의 안부를 묻다 반찬가게와 정육점 사이 조그만 평상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곳은 최 여사와 상인들의 수십년 된 학교이자 놀이터다.
최 여사는 “이 장터에 단골이 된 지 60년이야. 내가 열세 살에 여길 와서 여든일곱까지 나이를 먹는 동안 이 시장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겠어. 지금 앉아 있는 이 평상도 처음엔 없었다고. 하나둘 가게가 늘더니 시장이라는 구색을 갖췄지”라면서 “정육점 갓난쟁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이 되는 모습까지 다 지켜봤으니. 가족이나 다름없지. 지금은 여기 사장님들이랑 같이 나이를 먹어 가는 중이야”라고 말했다.
상인들은 쉽게 꺼내지 못하는 속사정을 최 여사와 나누며 물건 대신 마음을 판다. 서로의 눈만 봐도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다는 그는 “나도 고민이 있으면 시장 여사장 동생들한테 마음 터놓고 얘기하기도 하고, 상인분들도 나를 편하게 대해주니 얼마나 좋아”라며 “여기만 앉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지난다”고 말했다.
간밤의 안부를 묻고 물건 정리를 도우며 상인과 함께하는 최 여사. 그는 손님이 아닌 주인의 마음으로 오늘도 시장을 지키고 있다. 전통시장의 매력과 장점을 끝없이 전하던 그는 “내 고향 같은 시장이 잘 되기만 하면 바랄 것도 없지. 이웃 간 정을 느낄 수 있는 시장이 있어 고맙다”고 말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기획취재반
이호준 기자 hojun@kyeonggi.com
이대현 기자 lida@kyeonggi.com
이지민 기자 easy@kyeonggi.com
금유진 기자 newjeans@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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