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혜정 자유기고가]
미국 뉴웨이브 시네마 시대의 대표적인 배우이자 아카데미상을 두 차례 수상한 바 있는 진 해크먼(Gene Hackman)이 지난 2월 26일 아내와 반려견과 함께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금의 젊은 세대에겐 어쩌면 낯선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나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배우인지라 며칠이 지나도 그 먹먹함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특히 진 해크먼과 그의 연기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나는 솔직히 아직도 아연할 뿐이다.
배우 외에 원한 것 없었던 삶
2003년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을 때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함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던 마이클 케인과 로빈 윌리엄스가 번갈아 올라와 유머와 진지함으로 진 해크먼이 출연했던 주요 영화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는데 단상 아래에 앉아 때로는 겸연쩍어 하며 때로는 회한에 젖은 표정으로 화면을 찬찬히 바라보던 진 해크먼의 모습이 기억난다. 다혈질의, 강한 면모를 가진 역을 주로 맡았던 그였지만 간혹 스쳐가던 그 다정한 표정이, 그 부드러운 웃음이 난 참 좋았던 것 같다. 이 날 마이클 케인과 로빈 윌리엄스가 무릎을 굽힌 채 그에게 바친 상을 받아 쥐고 단상에 선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배우 이외에 어떤 것도 결코 원한 적이 없었습니다(I never wanted to be anything but an actor).” 그 소감을 들으며 ‘그래서 너무나 다행이었습니다’ 라고 나 혼자 조용히 중얼거렸었다.

내가 진 해크먼을 처음 본 것은 1972년 개봉작인 <포세이돈 어드벤처(The Poseidon Adventure)>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스콧 목사로 분한 그는 끊임없는 갈등과 두려움 속에서도 사람들을 이끌고 난관을 하나씩 헤쳐 나가는 강인한 리더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뜨거운 증기가 새어나오는 걸 막기 위해 밸브에 홀로 매달려 어렵게 돌려 잠그고는 힘이 다해 불바다 속에 뚝 떨어지던 마지막 장면에서의 그의 연기는 누가 뭐라 해도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던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밸브로 뛰어 오르기 전 스콧 목사가 신에게 절규하듯 외치던 말은 언제 봐도 뭉클함으로 다가온다. “우리를 위해서 싸워달라고는 안하겠습니다. 다만, 우리하고 싸우지만 마십시오. 우릴 그냥 내버려두세요.” 강하고 급진적인 성향이라 무섭게 다그쳐 가지만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인간적 고뇌로 힘들어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진 해크먼처럼 잘 표현할 배우가 있을까 싶었다.
"우릴 위해 싸워달라 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진 해크먼의 연기는 선과 악, 진중함과 유머, 사악함과 정의로움을 넘나들며 어디에서나 빛을 발했다.
충동적이고 강한 역으로 나왔던 대표적인 영화는 <크림슨 타이드(Crimson Tide)>(1995)를 들 수 있다. 뼛속까지 군인으로, 가족과도 친구와도 멀어져 애완견 한 마리에 애정을 쏟고 사는 고독한 램지 함장으로 나와 부함장인 헌터(덴젤 워싱턴)와 번번이 거칠게 부딪히는 장면들을 보여줬다. <용서받지 못한 자(The Unforgiven)>(1992)도 있다. 총기 소지 반대를 지지하던 진 해크먼이 이 영화에 출연할 것을 고사하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총기 소지를 반대하는 메시지를 넣겠다고 제의해서 수락했다는 뒷얘기는 유명하다.
이 영화에서 진 해크먼은 보안관 리틀 빌로 나와 잔인하면서도 비열한,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호탕하기까지 한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를 선사했고 이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탄 <프렌치 커넥션(The French Connection)>(1971)에서의 진 해크먼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마약 공급책을 쫓는 포파이 도일 형사로 분하여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과 대사 처리, 폭력적인 연기로 수사에 광기어린 집착을 보이는 형사의 모습을,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인 것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해냈다. 진 해크먼의 연기가 제일 멋질 때는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고 하나에 꽂혀 끝없이 파헤치는 역할을 할 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영화였다.
<수퍼맨(Superman)>(1978)에서 맡았던 렉스 루터 역은 이후에 이 역을 맡은 후배 배우들 연기의 원조격으로, 아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진 해크먼이 처음 등장하던 장면에서 얼마나 놀랐던지. 뽀글뽀글한 머리에 익살스러우면서도 비열한 언사를 구사하며 주인공 수퍼맨을 죽이려고 하는 빌런의 역할을, 왠지 밉지 않은 캐릭터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건 진 해크먼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나중에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가발을 벗으며 대머리임을 드러낼 때 짓던 능청맞은 표정은 떠올릴 때마다 매번 웃게 된다.
2002년에 나왔던 <로열 테넌바움(The Royal Tenenbaums)>에선 또 어땠는가. 가족을 버리고 떠났지만 말년에 다시 가족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아버지 로열 테넌바움 역할을 맡아 유머와 페이소스가 가득한 연기를 보여줬었다. 특히, 천재였던 세 아이들이 자신 때문에 초라하게 살게 된 것을 확인하고는 복잡한 심정을 드러낼 때의 표정은 '역시 진 해크먼이다' 했다.
가장 각별히 생각했던 영화 '허수아비'
진 해크먼이 나왔던 영화들은 장르에 관계없이 영화사에 중요한 획을 그어왔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1967),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1974), <미시시피 버닝(Mississippi Burning)>(1988), <야망의 함정(The Firm)>(1993),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Enemy of the State)>(1998) 등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운 영화 모두가 소중하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허수아비(Scarecrow)>(1972)를 가장 애정한다. 진 해크먼 본인도 생전에 이 영화를 각별히 생각한다 말한 바 있었다.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맥스(진 해크먼)와 프랜시스(알 파치노)라는, 어디에도 정붙일 데 없는 두 남자가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우연히 만나 함께 피츠버그까지 동행하는 여정을 그린 로드 무비이다.

이 영화에서 맥스는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거친 남자로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인물이지만 잘 웃고 온순한 프랜시스와 다니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고 어느새 부자와 같은, 형제와 같은 우정을 쌓게 된다. 불행히도 영화 말미에 가서 허수아비 같은 인간의 삶은 겉으로는 허허실실 웃고 있으나 속은 빈, 그래서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맥스가 그토록 감춰뒀던 구두를 털어 ‘왕복’ 기차표를 사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산다는 게 마냥 불행하지도 마냥 행복하지도 않은 것임을 알려주는 진한 울림이 있다.
진 해크먼이 어느 바에서 마치 스트립쇼를 하는 것처럼 겉옷을 하나씩 벗어던지며 쓸쓸한 웃음을 자아내던 연기는 내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 깊은 영화 속 명장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좋은 작품으로 기억되는 배우이길"
어제(3일)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모건 프리먼이 진 해크먼을 추모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레거시(유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배우로 사람들이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는 그렇게 기억될 겁니다.”
그가 어떻게 죽음 저 너머로 갔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더욱 비통한 슬픔이 차오르지만, 진 해크먼은 인간이 가진 수많은 다양한 모습 아래 숨어 있는 따뜻함과 정의로움을 자연스레 보여주던 좋은 배우로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그의 연기와 영화로 인해 마음 깊이 위로받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그래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잊지 않겠다고, 멀리 떠나가는 그에게 꼭 전하고 싶다. R.I.P. Gene Hackman(1930~2025).
※ 변혜정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고 일해 왔다. 사회경제적 요인과 주거환경과의 연관성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연구소 및 기업체에서 EHS 컨설팅 및 전략수립, 안전보건관리 업무 등을 수행했다. 사람이 아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존재양식에 관심이 많다. 책과 영화와 음악과 공연 등에 대한 경험은 언제든지 마다하지 않고 있으며 여기에서 받은 영감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을 통해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역할이나마 할 수 있기를 늘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