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라서 가능한 거 아냐?" 미대졸업하고 사법고시 합격했다는 경찰의 정체는?
흔히 스스로의 재능을 문과형, 이과형, 예체능형으로 분류해서 "나는 문과라서 수학에 약해"와 같은 말을 하는데요. 이러한 분류가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역대급 스펙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은행원, 승무원을 거쳐 사법고시에 합격하더니 현재는 변호사 출신의 경찰로 활약 중이라는 과천경찰서 수사과장을 만나봅시다.
최근 예능토크쇼 '유퀴즈온더블럭'에는 어깨에 무궁화 3개가 박힌 경찰 근무복을 입은 송지헌 경정이 등장했습니다. 경찰서장 바로 아래 직급이라는 '경정'의 직급을 단 그는 지난 2014년 변호사 특채를 통해 경찰 경감으로 채용되었는데요. 2014년 시작된 변호사 경감채용은 2018년부터 '법조경력 2년 이상'이라는 지원조건이 빠지면서 젊은 변호사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3년차 이상부터는 본청 특수수사과나 지방청 지능범죄수사대 등 중요사건 직접 수사 부서에서 근무가 가능해 대형사건을 다룰 기회가 많은 점이 큰 매력으로 꼽히는데, 경찰 입장에서도 수사권 조정 논의 등에서 법조인 출신인 변호사경찰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윈윈'이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덕분에 2018년 20명을 뽑는 변호사 경감채용에 227명이 지원해 경쟁률 11.35대1을 기록했고 올해 역시 6.8대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습니다.
한편 변호사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의 송지헌 경정에게는 남다른 이력이 더 있습니다. 아버지가 대기업 협력회사를 경영하고 어머니는 미술전공을 했다는 송 경정은 스스로를 "흙수저는 아니다"라고 인정하는데요. "세상 풍파 겪지 말고 좋은 것만 보고 살라"라는 의미로 4살부터 미술을 시킨 어머니 덕분에 명문으로 불리는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이화여대 미술과까지 송 경정은 20년 가까이 그림만 그렸습니다.
그러던 중 2003년 대학원 1학기까지 경제적 지원을 해주던 아버지가 "이제 최소한 그림은 네가 벌어서 해봐라"라고 말씀하셨고 송 경정은 스스로도 독립을 생각하던 차에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내자 죄송하면서도 자존심이 상해 망설임 없이 경제적 독립을 결심했습니다. 다만 한국화를 전공한 송 경정은 아직 이름이 알려진 화가가 아니었고 작업실부터 물감과 종이까지 모두 사서 미술활동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결국 미대 출신의 송 경정이 취업의 문을 두드릴 만한 곳은 외국계 회사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미술전공자들이 유학 생활을 하다 보니 송 경정 역시 유학을 대비해 영어공부를 해 두었고 이를 바탕으로 홍콩 상하이은행 한국지점의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면접에서는 당연히 "그림 그리다가 왜 은행에 왔냐"라는 질문이 나왔고 송 경정은 "돈 벌어서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다"라는 솔직한 답변을 내놓았지요.
출중한 영어실력 덕분인지, 솔직한 답변 덕분인지는 모르나 송 경정은 미대 출신 은행원이 되었고 대출 업무를 맡았습니다. 첫 달에 15억 원을 유치해서 팀 1위를 달성할 정도로 성과도 좋았지요. 반면 업무에 익숙해질수록 사람의 가치를 신용이나 경제력으로 평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데요. 이마에 신용 몇 등급이라고 적혀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 송 경정은 10개월 만에 은행을 그만두었습니다.
은행을 그만둔 송 경정은 자연스럽게 대학원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고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 남는 시간 동안 학비를 더 모아둘 목적으로 새로운 직업을 찾았습니다. 토익점수가 900점 정도 되었기에 전공이나 나이를 보지 않는 외국계 항공사의 취업에 도전했지요. 하지만 아카데미를 다니며 승무원 시험을 체계적으로 준비한 지원자들 사이에서 송 경정은 '망 머리'도 하지 않고 긴 생머리에 원피스 차림으로 면접장에 가는 바람에 "진지하지 않다"라는 이유로 중국동방항공과 말레이시아항공에 모두 떨어졌는데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싱가포르 항공에서는 오히려 다른 지원자와 다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합격시켰다고 하니 취업 비결에는 정도가 없나 봅니다.
승무원 시절에 대해 송 경정은 '인생의 황금기'라고 표현합니다. 또래 동료들과 전 세계를 여행하는 경험이 즐거웠고 20대 중반의 나이에 세금을 제하고도 연 6천만 원 정도를 벌 수 있었기에 부족함이 없었지요. 다만 항공사 내 유일한 외국인 승무원이다 보니 오랜 시간 경력을 쌓기 어려웠고 미술의 길로 다시 돌아가고자 준비하던 차에 그야말로 우연히 사법시험이 폐지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번 '역마살'이 발휘되었습니다.
당시에 대해 송 경정은 "홈쇼핑에서 매진된다고 하면 마음이 불안해지지 않나. 동생이 법학을 공부해서 집에 책도 있었다. 비행기에서 공부했는데 생각보다 재밌더라"라고 담담한 회상을 했습니다. 비행기에서 처음으로 접한 법학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사법고시에 대한 확신이 든 송 경정은 2006년 10월 신림동 고시촌으로 향했습니다.
법학 학점도 없었기에 학점이수와 사법고시 공부를 동시에 해야 했던 송 경정은 "질이 안되면 양으로 승부해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아침 10시에 일어나 새벽 4시까지 공부만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던 시절 4~5시간 동안 한자리에 앉아 집중하던 게 몸에 배어 있어서 도움이 되었는데, 심지어 송 경정이 공부하던 독서실 방에서 그가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기가 너무 세다고 느껴서 자리를 옮긴 사람이 여럿 있을 정도였지요.
무서우리만큼 집중력을 발휘한 끝에 송 경정은 3년여의 공부를 마치고 2010년도 처음으로 도전한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연수원 41기가 되었습니다. 로스쿨 1기와 같이 배출된 기수니 송 경정 스스로 마감임박을 걱정하던 사법고시의 막차를 탄 셈이지요. 연수원 기간 동안 시보로 일하면서 송 경정은 수사 분야에 흥미를 느꼈지만 수료 후 경찰청 모집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2014년 변호사 특채가 시작되면서 원하던 경찰청 채용에 도전한 것인데, 사실 변호사로 일하면서 현장에 대한 간절함은 더욱 커졌습니다. 로펌에 일하면서 의뢰인들의 앞뒤 다른 모습에 회의를 느낀 것인데요. 한 번은 유망한 벤처기업을 인수하겠다는 사람들을 도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이 기업사냥꾼이었고 해당 회사의 자산을 다 빼먹고 도망간 사실을 알고 "더는 못하겠다"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검은색을 회색이라고 말해야 하는 변호사에 회의감을 느낀 송 경정은 현장에 뛰어들어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고 싶다는 목표로 경찰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경찰이 된 후 책에서만 보던 미란다의 원칙을 고지하고 피의자를 체포하는 경험을 하면서 송 경장은 하루하루 살아있는 느낌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요.
현재 경기 과천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송 경정은 "과장님 또 관두고 어디 가시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라는 부하직원들의 걱정에 "역마살도 능력이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기회를 넓혀가는 것 아니냐" 라면서도 "지금의 자리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라고 경찰직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또 변호사 업계에서는 "결혼은 언제 하냐, 애는 언제 낳을 거냐"라는 말을 늘 들었던 반면, 경찰에 들어와서는 한 번도 그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면서 만족감을 드러냈는데요. 최근 벤조선과의 인터뷰에서는 오히려 부하직원들이 결혼에 골인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결혼을 말하다'라는 책을 선물했다면서 라벨 스티커까지 붙여가며 읽은 책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해당 인터뷰에서 송 경정은 유복한 집안 덕에 퇴사와 도전을 반복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다소 민감한 질문에 "아버지께서 계속 후원하셨다면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다"라고 단호한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이직을 결심할 때마다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마련했다는 송 경정은 "승무원을 할 때도 다음 직업을 위해 돈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 2년 동안 안 쓰고 5천만 원을 모았다. 면세점에서 사고 싶은 거 많았는데 참아서 3년간 사법시험 준비 자금으로 썼다"라고 말했습니다.
학자금이 끊기고 경제적 독립을 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직업들, 법학 전공이 아니었기에 더욱 치열하게 공부했던 사법시험 등 송 경정이 다양한 도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금수저 배경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간절함 때문입니다. 때로는 결핍이 성공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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