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못 푼 굴레… 조선인·아이누의 홋카이도 잔혹사 [일본 속 우리문화재]

강구열 2024. 2. 2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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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해 5월, 호주 멜버른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홋카이도 원주민 아이누의 유골 4구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 학자가 1911∼1936년 호주에 연구 목적으로 건넨 것이었다. 직접 도굴하거나 가져간 것은 아니었으나 박물관은 “조상이 겪은 굴욕과 여러분이 겪은 고통에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일본 아이누 단체 대표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2. 2015년 9월, 경기도 파주의 한 납골당에 유골 115구가 모셔졌다. 홋카이도에서 시작해 도쿄,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등 일본열도를 위아래로 횡단한 긴 여정의 끝이었다. 일제강점기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끝내 목숨을 잃은 이들의 귀국은 70년 만에야 이뤄졌다.  
 
일본 삿포로시에 위치한 홋카이도박물관
홋카이도에 새겨진 두 민족의 아픔이 깊고, 크다. 20세기 초 일본의 팽창정책이 낳은 굴레는 생전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벗어날 수 없었다. 홋카이도박물관은 긴 역사를 되짚으며 홋카이도의 선주민 아이누와 이방인 조선인의 고통을 들여다 본다.     

◆와진의 홋카이도 진출, 아이누의 소멸 위기

홋카이도박물관이 재현한 아이누 전통가옥.
전근대기 혼슈(本州) 일본인은 아이누를 ‘에조’(蝦夷)로, 아이누는 일본인을 ‘와진’(和人)이라 부르며 서로를 구분했으나 가까이 살아 오래전부터 교류가 이어졌다. 홋카이도박물관이 소개하는 두 민족간 교류는 와진의 에조치(蝦夷地) 진출 여정이자 에조 자유, 독립의 훼손 과정처럼 보인다. 

1604년 홋카이도 남쪽 지역에 자리잡은 마츠마에번이 도쿄 막부로부터 아이누와의 교역에 관한 권리와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보장받은 문서 ‘고쿠인죠’(黑印狀)를 받으면서 이전까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이뤄지던 교류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구나시리·메나시 봉기 당시 마츠마에번의 진압에 협조한 아이누 유력자를 그린 그림. 
마츠마에번은 아이누에게 불리한 거래를 강요했고, 사금 채취 등의 목적으로 와진이 몰려들면서 아이누의 삶은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샤쿠샤인 전쟁(1669), 구나시리·메나시 봉기(1789) 등은 긴 시간 감내했던 고통의 폭발적 표현이었다. 
홋카이도 개척기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홋카이도 개척촌 모습. 
1869년 일본 정부는 에조치의 명칭을 홋카이도로 바꿔 자국 영토로 분명히 하는 한편 본격적인 개척에 나섰다. 이즈음 아이누는 살아온 땅에서 쫓겨났고, 긴 시간 일궈 온 문화는 ‘야만’으로 멸시됐다. 박물관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행해지던 사슴사냥이나 연어잡이가 금지되고 살고 있던 토지에서 강제로 퇴거 당했다”며 “개척이 진행되는 가운데 아이누의 생활, 문화는 큰 타격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홋카이도 내 인구비율 감소는 아이누의 위기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도카치 지역의 경우 1883년 67.4%에 달했으나 1903년에는 4.8%로 격감했다고 한다. 구시로 지역은 같은 기간 31.2%에서 5.9%로 감소했다. 

소멸마저 걱정해야 했던 아이누는 20세기 들어 토지권, 편견·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냈다. 1930년 아이누 청년단체가 마련한 연설회 포스터에는 차별적인 아이누관(觀) 시정, 아이누 정책의 문제점 등을 지적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 각지에서 강제징용됐다”

현재의 홋카이도를 만든 지난 100년을 돌아보며 주로 금속광산, 탄광에서 일한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에 주목한 박물관이 이들의 희생과 고통을 비교적 솔직하게 들여다 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홋카이도 유입을 ‘강제징용’으로 못박은 점이 우선 눈길을 끈다. 1930년대 일제가 중국, 동남아시아, 서태평양에서 전쟁을 확대하면서 홋카이도 젊은이들이 전장으로 끌려가 생긴 공백을 메꾸기 위해 강제로 끌려왔다고 했다.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배상소송과 관련해 강제성 자체를 부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일본 정부의 태도와는 다르다. 박물관은 조선인 노동자의 홋카이도 도착을 다룬 당시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1939년 가을 조선 각지에서 모집된 조선인들이 홋카이도에 왔다”며 “10월 하순 이후 (홋카이도) 각지 금속광산, 탄광에서 그 조선인들이 작업을 거부하는 사건이 계속됐다”고 소개했다. 

‘1939년 10∼12월 발생한 이주 조선인 노동자 관계 쟁의’라는 제목의 전시 패널에는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이 격었던 참담한 상황이 담겨 있다. 

10월 21일 미쓰비시테이네 광산에서 293명이 7개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작업거부에 들어갔다. 요구 조건에는 식사개선이 포함되어 있었다. 구타는 일상이었던 듯 여러 건의 쟁의에서 원인이 됐다. 스미모토코노마이광산에서는 일본인 지도원, 광부가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것에 항의하는 쟁의가 있었다. 미쓰비시비바이광산에서는 일본인 광부가 조선인 노동자에게 상처를 입혀 30명이 항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사고는 극단적 분노를 촉발했다. 미쓰이비바이광산에서 동료 2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98명이 작업 거부에 돌입했다. 미쓰비시테이네광산에서는 시신 처리, 장례 참가 인원 제한 등에 대대적으로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39년 조선인 필요수를 8만5000명으로 한 노동동원 각의 결정서. 
강제징용이 일본 정부의 기획, 주도 아래 진행됐음을 암시하는듯한 전시물도 눈길을 끈다. ‘1939년 조선인 필요수를 8만5000명으로 한 노동동원 각의(국무회의) 결정서’가 그것이다. 

홋카이도=글·사진 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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