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전기차? 엔진 없어 미래가 불안한 제조사들

마세라티 그레칼레 엔진

캐즘(chasm)이란 말이 익숙해진 요즘이다. 그리고 여기엔 전기차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코로나19 시대의 시작과 함께 전기차 시장은 크게 성장했다. 여기에 반도체 수급 문제까지 겹치면서 테슬라 등 일부 전기차에는 프리미엄도 붙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시대가 다시 올까 싶을 만큼 전기차에 대한 소비자 관심이 크게 떨어졌다.

메르세데스-벤츠 EQE

현대차그룹의 마케팅 본부는 올해 초부터 전기차 시장 붐을 일으키려 많은 비용을 쏟아붓는 중이다. 전통 미디어는 물론 유튜브 등 자사가 동원 가능한 홍보 채널에 수십억 원을 투입해 전기차의 장점을 알리려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런 투자가 허무하게 벤츠 EQE 발 청라 아파트 화재로 전기차에 대한 관심이 역으로 커졌다. 구입을 위한 관심이 아니라 구입하면 안 되는 대표 상품으로 관심을 받게 된 것. 지금은 소강상태지만 하루에도 수십 건의 전기차 화재 관련 뉴스들이 자리를 채웠다.

사실 전기차 화재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지난 2022년 2월 독일 공장에서 생산돼 수출 중인 폭스바겐, 포르쉐, 벤틀리, 람보르기니 등 4천여 대의 차량이 갑작스러운 화재에 의해 타버리며 침몰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당시 화재의 원인도 전기차 배터리에 의한 것으로 정리됐다.

근래 들어 각 전기차 제조사 및 배터리 생산 업체들은 화재 예방을 위해 다 각도로 노력 중이라며 언론에 대응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아직 숙제가 남았다는 얘기다.

문제는 당장 자동차를 팔아 회사를 유지해야 하는 자동차 브랜드들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브랜드 중 하나인 재규어는 좋은 디자인과 성능을 갖췄음에도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BMW 3시리즈만큼 좋은 주행 밸런스를 갖췄던 XE를 예로 보면 제네시스 G70 보다 좁은 공간, 잔고장 문제 등 지속적으로 소비자에게 실망을 주는 등 여러 문제들이 따라다녔다. 또한 중심 상품인 XF도 소소한 변화로 수명을 늘리다 단종되는 아픔을 겪었다.

결국 재규어는 브랜드 재런칭 차원에서 벤틀리에 맞먹는 최고급화, 그리고 전기차로의 전향을 목표로 전략을 다시 짰다. 그리고 이제 결실을 맺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는 중이다. 그러나 브랜드의 재런칭,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기에 (전기차) 시장 분위기가 너무 달라졌다. 롤스로이스처럼 초고가 모델로 VIP들만 상대한다면 모르지만 재규어 정도의 브랜드가 소량 판매로 수익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지금의 분위기에서 재규어라는 브랜드에 많은 비용을 낼 소비자들이 많지 않다.

마세라티 그레칼레 트로페오

고성능 지향 고급 브랜드인 마세라티도 처지는 비슷하다. 현재 주력 모델인 그레칼레는 입문에서 중급 모델 라인업을 4기통 엔진으로 채웠다. 최상급은 3리터의 고성능 모델 트로페오 버전인데 성능은 좋지만 많은 소비자들이 찾는 모델이 아니다. 고급차 소비자들은 엔진이 갖춘 상징성도 따진다. 4기통 엔진으로 볼 때 마세라티의 엔진은 꽤 좋은 성능을 내준다. 그렇다고 해도 소비자들이 볼 때는 그냥 4기통 엔진이다. 이렇게 마세라티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일상용 6기통 등 중심 엔진의 부재에 있다.

마세라티 그란 투리스모

마세라티는 고급 쿠페 그란투리스모를 내놨다. 꽤 좋은 차다. 그러나 이 차가 얼마나 팔리겠는가? 가뜩이나 얼어붙은 경기 침체 상황에서 스포츠카, 슈퍼카 수요들도 지갑을 닫고 있다. 그래도 지금은 상황이 낫다. 내연 기관 모델을 팔고 있으니까. 그러나 재규어처럼 전동화를 서두른 것이 브랜드 차원에서 문제다. 전기차 시장이 더 크게 확대되는 추세였다면 2~3년 뒤를 내다보며 전동화를 통해 재도약하는 브랜드로 거듭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시장 분위기가 반전될 기미가 거의 없다.

전동화를 준비하는 동안 엔진 개발에도 제한이 생겼는데, 결국 현재 상황으로 수년간 4기통 엔진과 고성능 6기통 엔진으로만 시장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로터스 에미라 V6

영국 스포츠카 브랜드인 로터스(LOTUS)도 상황은 비슷하다. 쿠페인 에미라를 마지막으로 내연 기관 모델 생산을 고려하지 않겠다며 전기차 개발에 온갖 투자를 다해왔는데 전기차 시장과 함께 암흑 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됐다. 로터스는 과거부터 엔진의 자체 개발 여력이 없어 토요타 등으로부터 엔진을 공급받아 왔다. 이번 에미라에는 AMG가 만든 4기통 엔진과 토요타가 만든 3.5리터 V6 엔진이 함께 쓰인다. 로터스의 계획에 다음으로 쓰일 내연 기관 엔진에 대한 계획은 없다.

로터스 에미라 V6 엔진

이처럼 100% 전기차화를 꿈꾸던 브랜드들은 당장 짧은 미래(5년 안팎)에 대한 대책이 불분명한 상황이다. 재규어는 그룹 내 랜드로버가 쓰는 엔진을 공유해 신차를 개발한다면 된다지만 애초 전기차를 위해 설계된 플랫폼을 내연 기관용으로 바꾸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세라티도 수익성 문제로 스텔란티스 그룹의 눈치는 보는 상황이라 막대한 엔진 및 신차 개발 비용을 요구할 상황이 아니다. 로터스 또한 개발 여력이 불분명하다.

이들 브랜드 모두는 다시금 전기차 시장에 불이 붙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처럼 화재 이슈가 아닌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을 기대한다는 얘기다.

위 브랜드와 상황은 다르지만 국산 현대차, 특히 제네시스도 전동화(전기차) 확대에 열을 올리던 브랜드였다. 2년 전과 같은 상황이 지속됐다면 전기차만으로도 충분히 브랜드를 회전시킬 여력이 있었다. 전기차 시장의 선점도 중요 목표 중 하나였다. 이에 그룹 차원에서 전기차에 대한 대대적인 개발 지원, 내연 기관 엔진을 축소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싼타페 등에 쓰였던 인기 엔진 중 하나인 2.0 디젤 엔진의 퇴출이 이를 증명해 준다. (아직 쏘렌토에는 쓰인다.)

그러나 올 초 현대차그룹이 다시 내연 기관 엔진을 개발하기 시작한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현대차는 내연 기관도 꾸준히 개발해 왔다고 발표했지만 R&D 업계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결국 100% 전기차 전향을 꿈꾸던 제네시스에도 현재 개발 중인 하이브리드 엔진이 탑재될 예정이다.

기아 EV9

전기차 시장은 언젠가는 열린다. 불과 몇 년 만 해도 2025년 이후, 늦어도 2030년에는 전기차들이 승용차 시장을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2035년을 넘어 2040년, 또는 그 이상이 되어야 가능할 것이라는 수정된 전망으로 갈아타는 모양새다. 이제 가솔린과 디젤, PHEV, 풀 하이브리드, 전기차 모두를 가진 브랜드가 승기를 거머쥘 세상이 곧 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오토뷰 | 김기태 PD (kitaepd@autoview.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