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만 원은 돼야 명품이죠?" 소니 바이오 노트북의 전성기
누구나 전성기라 여기는 시기가 있다. 새 천년, 밀레니엄 시기를 맞이해 IT 기술들이 하나 둘 기지개를 켜던 그 시절, 노트북 시장에서 프리미엄을 넘어 명품 반열에 오른 브랜드가 있었다. 바로 소니의 바이오 시리즈다. 소니 바이오는 그야말로 가격, 성능, 디자인 등 노트북을 평가하는 모든 면에서 경쟁사 제품들을 압도하며 뭇 소비자들의 버킷 리스트로 오르던 시리즈였다. 물론 소니 바이오 시리즈 중에서도 가성비를 표방한 제품들도 분명 존재했으나 소비자들의 뇌리에는 Z나 TR 같은 최고가 라인업이 각인되어 “명품” 취급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번 기사에서는 소위 "쏘빠(쏘니 빠돌이)"로 불리던 필자의 기억에 남아 있는 바이오 노트북의 흔적을 회상해보며 찬란했던 바이오 노트북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쏘빠의 시점으로 회상한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누락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존재할수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또한, 극단적인 찬양이나 편견에 사로잡힌 발언이 존재하므로 독자 여러분의 극심한 인내를 부탁드린다.
소니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바이오
잘 알다시피 소니는 80년대 일본 버블 경제를 상징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그 유명한 워크맨과 브라비아 TV, 각종 캠코더 등 전 세계적으로 히트 상품을 선보이며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소니가 손만 대면 빵빵! 터지는 그런 시절이었다.
소니가 한참 최고 절정기를 맞이한 시기는 마침 PC와 디지털 기기들이 태동했을 무렵이었다. 이에 소니의 CEO였던 이데이 노부유키(出井伸之)는 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의 일환으로 1995년 PC 시장 진출을 갑자기 선언하고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먼저 나온 제품은 데스크톱 PC인 PCV-90 이었다. Windows 95 운영체제에 3D GUI를 적용해 초보자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을 펼쳤다. 하지만, 타사 데스크톱 PC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졌음에도 가격은 높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소니는 이 데스크톱 PC에 TAPE 데크와 CDP, 그리고 앰프까지 융합시켜 가전과의 경계를 애매모호하게 하는 시도도 강행했었다.
바이오 노트북은 그런 데스크톱 PC가 나온 지 1년 후 탄생했다. VAIO는 Visual Audio Intelligent Organizer의 약자라고도 하고 아날로그 파형의 V, A와 1과 0을 상징하는 IO를 붙여 만들었다고도 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이라는 중의적인 네이밍 전략이다.
1997년 최초로 내놓은 바이오 노트북 모델은 PCG-505였다. 당시 유통되던 노트북은 거의 대부분 어두운 블랙 컬러에 두껍고 묵직한 박스 형태였다. 하지만, PCG-505는 훗날 소니 바이오만의 퍼스널 컬러로 자리매김한 연보라색으로 제작되어 등장과 동시에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또한, 인텔 펜티엄 MMX CPU에 메모리는 32MB, 10.4인치 SVGA 디스플레이를 장착한 스펙도 출중했다. 그러나 소니가 가장 전면에 내세운 점은 당시 기준으로는 정말 얇아진 두께와 테두리를 마그네슘 합금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데스크톱 PC 라인업과 마찬가지로 PCG-505도 자칫 가전제품과 융합할 뻔했었다. 후속 모델인 PCG-707이 확장 배터리를 비롯해 각종 주변기기를 장착할 수 있는 도킹 스테이션까지 선보이게 된 것이다. 이는 훗날 극강의 휴대성으로 유명해지는 바이오 라인업과는 정반대의 행보였다. 그래서인지 PCG 시절의 바이오는 아직 명품 대열엔 올라가지 못하고, 그냥 소니에서 만든 “뭐가 많이 붙어있지만 얇은” 노트북에 불과했다.
여러 가지 시점과 의견이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소니 바이오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명품 대열에 올라간 것은 2003년 등장한 인텔 센트리노 CPU와 만나고 나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이때부터 이른바 '명품'으로 손꼽히며 직장인 한 달 월급에 버금가는 가격의 고가형 노트북 라인업이 연이은 히트를 쳤기 때문이다.
전설의 시작, 800g의 미학, PCG-X505
경쟁사들의 노트북이 주로 13.3인치와 15.6인치로 나뉘어 주력 상품을 내놓는 것과는 달리 소니 바이오 시리즈는 10인치와 11인치 등 더 작고 가벼운 노트북을 중점적으로 개발해 선보였다. 그 첫 신호탄은 바로 소니 바이오 PCG-X505. 2004년 등장한 X505는 10.4인치 디스플레이에 무게는 무려 780g! 배터리를 포함해도 820g이다. 두께도 제일 얇은 부위가 9.7mm에 두꺼운 부분은 21mm에 불과했다. 정말 당시엔 불가사의할 정도의 가벼운 무게와 얇은 두께로 소비자들이 내구성에 의심을 가질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X505의 가장 큰 혁신은 바로 배터리의 형태다. 제품 하판에 교체형 배터리를 장착했던 게 일반적이었으나 X505는 디스플레이 힌지 부분에 실린더 형태의 배터리를 장착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배터리가 아예 내장형인 것으로 인식할 정도. 엽기적인 것은 노트북 모양에 딱 맞는 핏의 배터리는 3셀짜리에 불과하며 6셀짜리를 장착하면 마치 소니 워크맨 CDP의 배터리처럼 실린더 하나가 더 붙어있는 모양새를 보인 것이다.
거기에 최초로 이른바 초콜릿 키보드, 엄밀히 따지면 키 캡이 모두 분리되어 배치된 아이솔레이션 키보드를 탑재했다. 물리적인 구조상 트랙패드 대신 포인팅 스틱을 배치했다. 그리고 디스플레이를 보호하는 상판에는 카본 섬유를 사용해 가벼운 무게와 내구성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소니 바이오 시리즈를 논하는 데 가격을 빼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PCG-X505의 2004년 당시 출시가는 무려 3,000달러. 현재 기준으로는 4,400~4,600 달러 정도로 가늠할 수 있다. 역시 직장인 한 달 월급은 그냥 훌쩍 넘어가는 명품의 가격이다. 이러니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카페에서 열어보는 얼리어답터의 상징, VGN-UX 시리즈 feat. P 시리즈
이후 소니는 'Personal Computer Group'의 약칭이었던 PCG 모델명을 VGN, 'VAIO General Network'으로 변경해 더 다양한 목적의 제품군으로 확장을 꾀했다. 2006년 등장한 UX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원래 존재했던 PDA 만한 크기의 U 시리즈를 UX라는 울트라 모바일 콘셉트로 발전시킨 것이다. 2G폰에서도 대히트를 쳤던 이른바 이효리 폰과 같은 상하 슬라이드 방식을 채택해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용자들은 괜히 카페나 공공장소에서 UX를 뜬금없이 꺼내 여닫아보곤 만족의 미소를 짓곤 했다.
당시 PDA가 대부분 스타일러스 펜으로 조작하는 것과는 차별화를 둔 배치도 특징이다. 마치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의 컨트롤러처럼 양손으로 잡고 조작할 수 있도록 측면에 여러 버튼을 배치한 것이다. 더불어 모태인 U 시리즈가 물리적인 한계로 인텔 셀러론 CPU를 탑재해 성능 면에서는 많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UX에 들어 인텔 코어2 솔로로 업그레이드했다. 운영체제는 WIndows XP를 설치해 GUI 디자인 면에서 살짝 언밸런스한 모습을 보였지만, 500g 수준의 무게로 모든 것을 용서(?) 할 수 있었다. 2006년 당시 출시 가격은 1,800~2,500달러였다. 역시나 직장인 한 달 월급을 훌쩍 넘기는 수준이었다.
UX 시리즈는 2009년 P 시리즈로 계승되었다. 무려 '청바지 뒷주머니에 들어가는 크기'를 매우 강조한 라인업이었다. 발열이 거의 없는 인텔 아톰 프로세서를 탑재해 쿨링팬 자체가 없는 특이한 콘셉트의 노트북이었다. 필자는 이 P 시리즈의 신제품 발표회에 직접 참여했었는데,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주머니에 P 시리즈 노트북을 넣어보느라 난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240x120x19.8mm라는 크기는 청바지 주머니에 넣기엔 무리여서 여러모로 애매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전 세계 소비자들이 이를 패러디한 사진을 줄줄이 올리는 등 웃지 못할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만약 P 시리즈가 상당한 히트를 쳤다면, 오늘날 노트북의 크기가 더 작아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좋은 건 다 넣었습니다. 근데 1,2kg??? VGN-TZ 시리즈
소니는 2007년 바이오 탄생 10주년을 맞이해 두 가지 라인업을 출시했다. 그중 하나가 TZ 시리즈다. 소니 바이오 VGN-TZ 시리즈는 11.1인치 LED 백라이트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울트라 포터블 노트북이다. 첫 바이오 노트북인 PCG-505의 디자인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프리미엄급 품질을 지향한다는 게 메인 콘셉트였다.
본체 무게가 1.2kg 대여서 소니 바이오 시리즈 기준으로는 무거운 편이었으나 디스플레이 부분이 4.7mm라는 말도 안 되는 얇은 두께로 화제가 되었었다. 이런 얇은 무게는 카본 섬유 소재를 채택해 가능한 일이었다. 더불어 LED 백라이트 디스플레이는 NTSC 기준 색재현력이 76%에 달했고 밝기도 기존 모델인 TX 시리즈에 비해 약 25% 향상되어 멀티미디어 구현 방면에서 탁월한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배터리 수명도 늘어나 일반적인 사용 환경에서 최대 7시간 정도의 긴 배터리 사용 시간을 제공했다. 참고로 경쟁사 제품들은 길어봐야 3-4시간 정도 수준이었다.
성능 면에서는 인텔 Core 2 Duo 프로세서와 최대 2GB RAM을 탑재해, 일상적인 작업부터 멀티태스킹까지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더불어 앞서 소개한 UX 시리즈에 최초로 장착해 효과를 톡톡히 본 SSD 옵션을 제공해 더 빠른 부팅과 데이터 처리 속도를 자랑했고 본체에 내장된 광학 드라이브, 블루투스, 그리고 3G 네트워크 옵션까지 모두 올인원으로 갖춰 명품 프리미엄급 노트북으로 확실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VGN-TZ17LN/B 모델의 경우 최초 출시가가 239만 원을 넘었다. 그나마 1kg가 넘어 200만 원대로 내려서 판매한 것 같다.
바이오의 최종 병기, VGN-Z 시리즈
노트북 유저들의 커뮤니티 활동이 한창 활발했을 그 당시, 앞서 살펴본 세 가지 소니 바이오 라인업의 장점을 한데 모아보면 어떤 노트북이 나올지도 상당한 논쟁이었다. 거의 노트북 시장의 마침표가 될 것 같은 상상 속 그 괴물이 현실로 나타났다. 바로 2008년 소니 바이오 VGN-Z 시리즈의 탄생이었다.
그동안 보급형 CR 시리즈에서나 볼 수 있었던 13.3인치의 "비교적" 넓은 디스플레이에 WXGA++, 즉 1600x900 해상도를 제공하며 Z 시리즈 일부 모델은 FHD까지 지원했다. 이런 기본적인 디스플레이 스펙이라면 종결자 칭호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X-Black LCD 기술을 적용해 당시 가장 화두였던 시야각이 상당히 넓었으며 햇빛이 쨍한 야외 환경에서도 선명한 화면을 제공했다.
더불어 무게는 1.5kg으로 늘어났으나 탄소 섬유와 알루미늄 합금을 적절히 조합해 13.3인치 면적에 다양한 주변기기를 장착하고도 들고 다닐만한 휴대성을 제공했다. 두께는 1.6~2.3cm로 역시나 소니 바이오만의 얇은 두께를 자랑했으며 치클릿 아이솔레이션 키보드도 역시 계승하여 장착했다.
그리고 실린더 스타일의 힌지를 그대로 채용해 소니 바이오의 상징이 되어버린 전원 버튼까지 힌지 측면에 배치했다. 거기에 배터리도 이 힌지 부분에 위치해 소니 바이오의 정통성(?)을 제대로 이어나갔다. 그야말로 그동안 찬사를 받아온 소니 바이오 노트북들의 장점을 한 데 묶은 프리미엄 노트북의 종결자의 탄생이었다.
엔비디아 지포스 9300M GS 전용 그래픽 코어와 인텔 GMA 4500MHD 통합 그래픽을 스위칭하는 듀얼 그래픽 시스템을 지원한다. 스테미나 모드와 스피드 모드를 통해 배터리를 절약하는 설정과 최고 성능을 짜내는 설정을 바꿀 수 있다. 또한, 기본적으로 5,400rpm HDD를 장착했지만, SSD 옵션을 선택한다면 RAID 0 구성으로 최대 256GB 스토리지 환경을 구축할 수 있었다.
거기에 현재 노트북 시스템의 전형을 2008년부터 모두 보여주기 시작하는데, 우선 HDMI와 D-Sub 포트 등 다중 모니터링을 위한 다양한 포트를 제공하고 ODD는 물론 당시엔 PCMCIA 방식으로 추가 삽입해 사용하던 무선 인터넷도 기본으로 내장하고 있었다. 참고로 Z 시리즈 초기 모델은 802.11n 무선 전송 규격을 지원하며 블루투스 2.1+EDR을 제공한다.
소니 바이오 VGN-Z 시리즈의 출시 가격은 가장 기본 옵션이 1,800 달러부터 시작 가장 높은 옵션은 3,999달러였다. 2024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거의 5,900달러, 약 790만 원 정도다. 요즘도 800만 원에 버금가는 노트북이 있을까? 소니 바이오 VGN-Z 시리즈는 그만큼의 가치를 충분히 소화해냈다. 꿈의 노트북이었다.
가질 수 없어서 더 소중하게 느껴졌던 소니 바이오
많은 사람들이 오리지널 소니 바이오의 몰락은 애플 아이폰이 몰고 온 스마트폰 열풍과 맥북 에어의 등장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으리라 여긴다. 또한, 중고 소형차 한대 값을 호가하는 고급화 전략의 한계에 봉착했으며 너무나 많은 제품 라인업이 오히려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소니 그룹 내부의 불안정한 재무 상태, 그리고 계열사 간 갈등이 소니 바이오 노트북 개발과 운영에 악영향을 끼쳤고 결국 2014년 노트북 사업부 전체를 매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밀레니엄 초반 Hermès, Gucci 같은 명품 브랜드와 거의 동급으로 취급되었으며 모든 노트북 유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소니. 상판을 열며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VAIO 로고가 그렇게 자랑스러웠던 그 시절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요즘엔 어느 브랜드나 자사의 제품이 명품이고 최고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소니 바이오 노트북의 전성기를 기억한다면 모두 코웃음칠 일. 언젠간 이런 소니 바이오 못지않은 명품 브랜드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기획, 편집, 글 / 다나와 정도일 doil@cowav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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