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피치] 삼성 암흑기의 에이스 김상엽과 파워커브

1990년대 김상엽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삼성 에이스로 활약했다. (사진=삼성 제공)

17차례. 삼성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횟수이고, 이것은 역대 최다 기록이다. 또한, 삼성은 정규시즌 최다 우승팀(9차례)이며, 포스트시즌도 최다인 29차례나 밟았다. 그렇기에 삼성은 ‘전통의 명가’이며 ‘영원한 우승후보’라고 해도 틀림없다.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에 그친 삼성은 1984년부터 1993년까지 8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 및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우승은 없지만 적어도 포스트시즌 진출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1994년부터 1996년까지 3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오르지 못했고, 이 기간을 삼성 팬들은 ‘1차 암흑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팀의 에이스로 고군분투한 이가 김상엽 경일대 감독이다. 그는 1989년 KBO리그에 데뷔해, LG로 이적한 2000년까지 11시즌을 뛰며 78승 56패 49세이브, 평균자책점 3.39를 기록했다. 특히, 1993년에는 탈삼진왕(170개)에 올랐고, 1990년에는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두자릿수 승리(12승)와 두자릿수 세이브(18세이브)를 올렸다. 또 1995년에는 17승을 거뒀다. 다만 부상으로 한 해 걸러 좋은 성적을 거둬 ‘격년제 에이스’라는 달갑지 않은 말도 들었다.

“크고 작은 부상이 끊이지 않았죠. 1991년에는 아킬레스건을 다쳤고 1994년엔 허리를 다쳤거든요. 허리가 괜찮을 때는 보폭이 일곱 발 반이었고 구속이 쉽게 143~7km/h 정도는 나왔는데 허리를 다친 다음엔 보폭이 다섯 발로 줄었고 최고 스피드도 137km/h에 머물렀어요. 팔로만 던지니까 팔꿈치 부상이 왔고. 팔꿈치를 수술하고 팔꿈치만 집중적으로 재활하다 보니까 딴 데 부상이 찾아왔다.”

현역 시절, 김상엽 감독은 150km/h를 넘나드는 묵직한 강속구로도 유명했지만, 그의 대명사는 파워커브였다. 130km/h 중반대의 빠른 파워커브는 속구처럼 날아오다가 ‘휙’하고 빠르게 휘어지며 떨어져 타자에게는 마구와 같은 구종이었다. 이에 마구라면 사족을 못 쓰는 ‘머니피치’는 김상엽 감독을 만나 파워커브에 대해 들어봤다.



저는 원래 슬라이더를 못 던졌는데 마티(드메리트) 코치님이 파워커브를 가르쳐줬어요. 처음에는 실밥 두 줄을 모두 잡고 던지는 마티 코치님의 그립을 보고 속으로 ‘이게 미쳤나’라고 욕했을 정도였죠. 근데 계속 던지다 보니까 확실히 달랐어요.

손가락을 실밥 한쪽에만 걸쳐 던지는 일반적인 커브보다 타자 앞에서 빠르게 떨어졌으니까요. 한창땐 파워커브가 웬만한 투수의 속구 스피드와 맞먹는 130km/h 중후반까지 나왔죠. 여기에 마티 코치님은 항상 칭찬하면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게 큰 힘이 됐어요.

그런데 재밌는 거는 쌍방울 시절, 김원형 SSG 감독님도 마티 코치에게 이 커브를 배웠어요. 똑같은 그립으로 던졌는데도, 김원형 감독님 커브의 스피드는 저보다 빠르지는 않았어요. 다만 드롭성으로 크게 떨어졌죠.

1990년 2월, 삼성은 KBO리그 첫 메이저리그 코치 출신인 마티 드메리트 전 샌프란시스코 코치와 계약을 맺었다. 그는 삼성과 쌍방울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며 김상엽과 김원형을 길러내는 능력을 발휘했다. (사진=삼성 제공)

저는 어릴 때부터 구속을 좀 중요하게 여겼어요. 구속을 올리기 위해 팔 스윙도 빠르게 하려고 노력했거든요. 지금도 팔 스윙 자체가 빠르면 공도 빨라진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커브도 손목만 조금 구부린 상태에서 팔 스윙을 빠르게 돌렸어요.

그렇게 던지니까 커브가 힘 있게 들어갔어요. 각도는 슬러브처럼 대각으로 빠르게 떨어졌죠. 그렇기에 타자들이 되게 힘들어했고, 그걸로 몇 년 야구 좀 잘했던 같아요. 손목만 쓰는 게 아니라 팔 스윙 스피드도 다르니까, 이게 제 부상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분도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파워커브로는 전혀 부상이 없었어요.

제가 일반적인 원심으로 커브를 익혔을 때는 손에서 빠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걸 투심으로 잡으니까 빠지는 느낌이 없고, 손가락 어딘가에 실밥이 걸리니까 던지기 편했죠. 다만 두 손가락 모두 힘이 들어가면 진짜 완벽한 파워커브가 됐어요. 이건 김원형 감독님도 마찬가지더라고요.

프로에서 코치를 할 때도, 고교나 대학 등에서 감독을 하며 여러 선수들에게 제 파워커브를 알려줬어요. 근데 선수들이 못 받아들이는 것 같더라고요. 생소한 투심으로 던진다는 걸요. 물론, 금방 따라 하는 선수도 있지만요. 어쨌든 파워커브 등 변화구를 익힐 때 저는 캐치볼을 많이 시켜요. 캐치볼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던지다가 보면 자기만의 감각을 알게 되거든요.

프로에서 기억에 남는 경기는 여러 게임이 있죠. 그중에 한 경기가 프로 데뷔전입니다. 1989년 4월 8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전인데, 그 당시 정동진 감독님이 저를 선발로 내세우려고 했어요. 근데 주위에서 “쟤가 몇 살인데 개막전 선발 투수입니까?”라고 말해서 진동한 선배님이 선발로 나갔어요.

진동한 선배가 초반에 무너지고, 이문한 선배님에 이어 4회부터 마운드에 올랐어요. 그때 삼성이 4-1로 앞서고 있어 구원승을 올릴 수 있었는데 9회 말에 장효조 선배님한테 끝내기 안타를 맞고 졌어요. 개막전 승리투수가 될 기회를 놓친 게 지금도 아쉬워요.

김상엽 감독은 현역 은퇴 후, 아마와 프로에서 지도자 경험을 쌓아오고 있다. (사진=NC 제공)

프로 첫 승을 올린 거는 5월 19일이었어요. 프로 첫 패배를 안긴 롯데를 상대로 9회 초 2아웃까지 무실점으로 틀어막았죠. 최연소 완투 완봉이 눈앞에 있었는데 그게 부담이 돼 연속 볼넷을 내주고 마운드를 내려왔어요. 권영호 선배님이 남은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아내며 가까스로 승리 투수가 됐어요. 그땐 첫 승의 기쁨보다 프로에선 승리를 거두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또 LG랑 붙은 1990년 한국시리즈 등 포스트시즌 경기도 여러 게임이 생각나죠.

어쨌든 저에게 파워커브는 지금도 제 이름을 아는 이가 있게 한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워커브를 던졌으니까, 현역 시절 김상엽을 기억해 주는 거잖아요. 저에게 파워커브는 그런 공입니다.


그의 야구 인생에 있어 현역 시절 마티 코치와의 만남처럼 지도자 생활에서도 터닝포인트가 있었다. 바로 박찬호 해설위원과의 만남이다. 2001년 9월 LG에서 은퇴한 김 감독은 2003년부터 영남대에서 투수 코치를 맡아 손승락, 이재영 등을 배출하며 아마추어 지도자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8년간 같은 팀에 있으며 정체된 느낌도 없지 않았고 더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 국외연수를 받고 싶다는 열망이 적지 않았다.

그럴 때 2011년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1년간 지도자 연수를 받을 기회가 생겼다. 박찬호가 오릭스에 입단하며 계약조건으로 한국 지도자의 일본 연수 기회 제공을 내걸었고, 그 첫 번째 수혜자로 김 감독이 선정된 것이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매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전부터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었거든요. 근데 생계 문제가 있잖아요. 현지에서 생활할 약간의 돈이 나왔지만 가족이 먹고살 수준은 아니었죠. 그게 걸려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는데 아내가 무조건 가라고 하더라고요. 자기랑 두 아이는 어떻게든 버틸 테니까 하고 싶은 공부 마음껏 하라면서요.”

그렇게 대한해협을 건너간 오릭스에서 박찬호를 처음으로 만났다. 사실 박찬호는 내심 자기보다 나이가 한두 살 어린 아마추어 지도자가 오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런데 김상엽 감독은 박찬호의 3년 선배다. 껄끄러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박찬호 선수로부터 먼저 전화가 왔어요. 이에 저는 ‘박찬호 선수, 안녕하십니까?’라고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어요. 초면이고 워낙 대단한 선수라서 말을 놓기가 어려웠죠. 야구선배라고 해도요. 처음엔 다소 데면데면했지만 서로 존중하다 보니까 서서히 마음이 통하기 시작했어요. 박찬호 선수로부터 미국에서 경험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저에게 큰 도움이 됐어요. 결국,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 야구만이 아니라 미국 야구도, 간접적이지만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박찬호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선후배를 떠나 존경스럽더라고요. 제가 선수 시절 저렇게 했으면 ‘야구를 더 오래 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했으니까요. 또 생각도 아주 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