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 장애견 ‘이슬이’ 덕에… ‘휠체어 아저씨’로 다시 태어났죠” [나의 삶 나의 길]

이강은 2023. 2. 22.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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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 워크앤런 대표
처음엔 일본서 장애견 휠체어 사 와 기부
갈수록 경제적 부담… “직접 만들자” 결심
후배 공장서 기술 배워 제작 봉사 시작
소문 퍼지자 의뢰 쇄도… 최소 비용 제작
돈벌이 아닌데… 일각 “세금 안 낸다” 비난
정식으로 사업자 등록 ‘워크앤런’ 세워
의족·보조기 기술까지 업체서 배우고
日 장인 직접 찾아가서 가르침 받기도
동물 입장서 생각하며 가급적 수작업
대구·광주 이어 2023년은 제주에 직영점
누군가 돕는 일 하면서 진짜 행복 알게 돼
앞으로 유기견 호스피스 시설 설립이 꿈
‘58년 개띠’ 이철(65) 워크앤런 대표에게 2002년은 잊을 수 없는 해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항로를 틀게 한 ‘이슬이’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그해 어느 날 새벽, 집에 오다 길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극도로 싫어하는 쥐인 줄 알고 서둘러 지나치려 했는데 강아지 소리가 났다. 뭔가 싶어 발로 툭툭 치니 새끼 시추 한 마리가 비닐봉지에 담겨 있었다. 바로 집에 데려와 돌봤다. 선천적 기형으로 뒷다리를 쓰지 못한 채 새벽이슬을 맞고 버려져 있던 녀석에게 ‘이슬이’란 이름도 지어줬다. 원래 키우던 개 두 마리와 달리 몸을 바닥에 끌고 다니는 이슬이 모습은 애처로웠다. 그렇게 4년쯤 지났을까. 일본 여행 중 지인을 따라간 반려동물 전람회에서 장애견을 위한 조립식 휠체어가 눈에 들어왔다. 50만원이 넘었지만 바로 사와 이슬이 몸에 달아줬다. 녀석은 처음엔 어색한지 멀뚱히 섰다가 다른 두 마리가 뛰어가니 신나게 쫓아다녔다. 스스로도 놀랐는지 뛰면서 한 번씩 뒤돌아보는데, 그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순하고 예뻤던 이슬이는 휠체어를 잘 타고 다니다 8살쯤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이철 워크앤런 대표가 척추 손상으로 뒷다리가 마비돼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개에게 새로 제작한 휠체어를 착용시켜보고 있다. 장애견과 함께 특히 유기견에 대해 안쓰러워하는 마음과 애정이 큰 이 대표는 “어떤 한 생명을 식구처럼 데리고 키운다는 건 그만큼 책임이 뒤따른다”며 “반려동물 입양 결정은 신중하게, 입양하면 끝까지 책임지고 보호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최상수 기자
주인 잃은 휠체어를 필요로 하는 강아지에게 주려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자 사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 ‘우리 아이에게 꼭 필요한데 살 여유가 없다. 도와줄 수 없겠느냐’는 쪽지를 보낸 경기지역 한 유기견 보호소에 기증했다. 가 보니 아픈 개가 한 마리 더 있어 일본에서 새 휠체어를 사와 건넸다.

그 일을 계기로 일본에 드나들 때마다 장애견 휠체어를 사 도움이 필요한 유기견 보호소에 기부했다. 장애로 못 걷던 개들이 맘껏 걷고 달릴 수 있게 되면서 짓는 표정이 너무 좋았고 기부하는 게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1년가량 그리하니 경제적 부담도 되고, 비슷한 장애로 고통을 겪는 개가 정말 많아 이렇게 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직접 개 휠체어를 만들어 도와주자.’

지난 20일 서울 송파구 워크앤런 사무실에서 만난 이 대표는 “이슬이 덕에 내 삶도 달라진 셈”이라며 이기적인 부동산 분야 사업가에서 이타적인 ‘휠체어 아저씨’가 된 과정과 이후 다시 태어난 것처럼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슬이 등 못 잊는 개들을 떠올릴 때면 울컥해져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휠체어를 실제 만드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2010년쯤인데, 마침 초등학교 후배가 노인들이 유모차처럼 끌고 다닐 수 있는 ‘실버 휠체어’ 제작 공장을 운영해 찾아갔다. 일본과 미국 등에서 구입한 장애견 휠체어를 보여주며 ‘만들 수 있을까’ 물었더니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주말마다 경기도 용인 공장에 가 6개월 정도 열심히 기술을 배웠다. 그 와중에 사업이 꼬여 건물도 날리는 등 큰 손해를 보곤 ‘강아지 휠체어나 만들어주고 봉사하며 살자’는 생각이 들더라.”

―사업도 접고 혼자 그 일을 하겠다니 추진력이 대단한 것 같다. 가족 반응도 궁금한데.

“친한 지인이 빌려준 사무실에 작업실을 차린 후, 장애견 보호자들에게 온라인 쪽지를 보낸 뒤 연락이 오면 휠체어를 만들어 보내줬다. 유기견 보호소에서도 부탁하면 들어주고. 정말 많이 만들어 기부했다. 재미 붙여 한 일인데 사람을 변화시키더라. ‘골프 칠 돈이면 아픈 강아지를 더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엄청 즐기던 골프도 끊다시피 했다. 아내는 무척 반겼다. ‘전에는 눈빛도 성격도 날카로웠던 사람이 항상 웃음기 띤 얼굴로 하루 있었던 일을 즐겁게 얘기해주는 모습이 보기 좋다’면서. 아이(개)들이 너무 고마운 이유다.”

―워크앤런(Walk and Run)은 어떻게 설립한 건가.

“닉네임이 ‘휠체어 아저씨’였는데 온라인 반려동물 카페를 중심으로 소문이 퍼져 ‘비용을 줄 테니 우리 아이 것도 만들어달라’는 의뢰가 쏟아졌다. 휠체어가 필요한 개는 많은데 국내에선 구하기 힘드니까. 유기견 보호소 기부용 휠체어 재료값에 보태려 7만원 정도 받고 만들어줬는데, 일각에서 ‘세금도 안 낸 채 판매하면 되냐’고 비난하는 얘길 들었다. 수익을 내려 한 건 아니지만 딱히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그동안 감당이 안 될 만큼 ‘도와달라(무료 기부해달라)’는 사람이 많아 비공개적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힘들게 작업했는데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정식으로 사업자등록하고 나눔 방식으로 운영하자고 결심한 뒤 워크앤런을 차렸다. 이름엔 반려동물이 마음껏 걷고 달리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의족과 보행보조기까지 만들게 된 계기는.

“휠체어 제작 원가와 직원 임금 등 운영비를 빼고 남는 수익은 유기견 보호소를 위한 무료 휠체어 나눔에 썼다. 어느 날 주인한테 뒷다리 무릎 아래를 잘려 구조된 진돗개를 만나 의족 제작업체에 의뢰하니 200만원이 훌쩍 넘어 엄두가 안 났다. 일단 휠체어를 만들어준 뒤, 임시방편으로 테니스공에 쿠션을 넣어 다리에 부착해줬다. 그조차도 기뻤는지 열심히 걷던 개는 곧 그 상태로 해외에 입양됐다. 그 아이만 생각하면 마음이 참 아프다. 지금은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는데 막상 한국에 없으니. 얼마 후 앞다리가 꺾인 개가 구조돼 다리를 잡아주는 보조기를 의뢰했더니 그것도 너무 비쌌다. 부자 아니면 아픈 개는 돌볼 수도 없는 현실에 너무 화가 나 직접 만들기로 한 것이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이 대표는 의족과 무릎 등 보조기 관련 공부를 하러 다시 대학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얘길 들은 정형외과 의사 친구가 현장에서 실무를 배우는 게 훨씬 낫다며 의족·보조기 업체 대표를 소개해줬고, 이 대표는 1년 가까이 매일 저녁 찾아가 개인 지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봉사·후원활동을 하다 가까워진 유기견 보호소들을 통해 다리가 부러지거나 틀어진 수백 마리 유기견을 소개받아 실습하면서 빠른 속도로 기술을 연마했다. 갖가지 실패를 거울 삼아 어떤 상태의 반려동물이든 적합한 의족과 보조기를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워크앤런은 현재 의족과 무릎·발목·경추·척추 보조기를 제작해 판매하거나 기부한다.

―일본에도 스승이 있다는데 뭘 배웠나.

“일본 제품이 우리 것보다 더 섬세했다. 몇 명 안 되는 일본 장인을 수소문 한 뒤 찾아가 가르쳐 달라고 간곡히 사정했다. 몇 차례 금요일 저녁에 날아가 주말 동안 배운 뒤 월요일 아침에 돌아왔다. 일본 장인들은 보조기 하나를 만들 때도 엄청 정성을 들였다. 내가 보기엔 완성도가 높은 제품인데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만들더라. 현지 스승이 ‘자네가 필요한 물건을 살 때 하자가 있어도 사는가. 강아지라고 다르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충고할 때 느낀 바가 컸다. 뭐든지 손으로 제작하는 것도 인상적이었고. 이후 어떤 자재든 품질과 안전성이 우수한 것을 쓰고 가급적 손으로 작업한다.”
―그만큼 제작비용이 오르고 제품 가격 인상 압박을 받지 않나.

“그래도 초창기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최대한 저렴하게 판매하려고 노력한다. 장애 동물을 돌보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인데 보호자들이 휠체어나 보조기 구입에 부담을 느끼게 해선 안 된다. 제품 성능과 품질을 향상하는 데 많은 아이디어를 주는 보호자들이 고마워서라도 비싸게 받을 수 없다. 17살 이상 노령 개에게는 ‘경로 우대’로 5만원 할인해준다.(웃음) 가족 같은 아이를 데리고 온 보호자에게 ‘얘가 얼마 못 사니 깎아줄게요’ 하는 거랑 ‘경로 우대 해드릴게요’ 하는 거랑은 완전히 다르잖나.”

―지난해 대구와 광주에 이어 올해 제주에도 직영점을 낸다고. 수요가 많아 ‘함께하자’거나 ‘투자하겠다’는 제의도 들어올 것 같은데.

“지방에서 오는 고객도 많은데 사람은 괜찮을지 몰라도 동물들은 힘들다. 대부분 긴 시간 차를 타면 울렁증과 스트레스 등으로 죽을 맛이 된다. 시간과 거리 단축을 통한 동물 보호와 주인의 수고 및 교통비 경감 등을 고려해 직영점을 낸 거다. ‘투자할 테니 사업을 키워보자’거나 ‘비싸게 인수하겠다’는 식의 제안도 많이 오는데 그럴 때마다 ‘돈 벌려고 해서도 안 되고, 아무나 해도 되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한다. 문재인정부 당시 청와대에 초청받았을 때 정부가 도와주겠다는 것도 거부했다. 대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정부는 반려동물을 학대하거나 유기하는 사람, 돈벌이에 혈안인 강아지 공장 엄단 등 우리가 못하는 일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철 워크앤런 대표가 작업실에서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최상수 기자
―동물 고객들은 어떤 문제로 오고, 다룰 때 특히 신경쓰는 점은 뭔가.

“(주로 개들인데) 실내 마루·대리석 바닥 등 인간이 만든 현대적 환경에서 지내다 슬개골이나 십자인대 파열로 탈구된 경우가 많다. 또 목 경추 디스크 쪽 신경계 손상으로 다리가 마비되거나 사고와 못된 주인으로 인해 다리가 절단된 아이 등 다양하다. 고양이, 다람쥐 등이 올 때도 있고. 동물은 말을 할 줄 모르는 데다 경계심이 많고 예민해 교감부터 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먼저 품에 안아보고 놀아주면서 아이들이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마음 놓고 평소처럼 서거나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야 몸에 잘 맞는 제품을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하기 전과 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고, 바람은 뭔가. 1000만명이 넘는다는 국내 반려인에게 당부할 게 있다면.
“그 전까진 돈을 좇느라 행복한 게 뭔지도 모른 채 살다 이 일을 하면서 진짜 행복을 알게 됐다.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이기적으로 나만을 위해 살아온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도움되는 일을 하면서 좀 덜어지는 것 같아 기쁘고 즐겁다. 앞으로 계획은 아픈 유기견을 위한 호스피스 시설을 세우는 거다. 인간에게 버려진 애들이 죽는 순간까지 비참해지지 않도록 하고 싶다. 어떤 한 생명을 식구처럼 데리고 키운다는 건 그만큼 책임이 뒤따른다. 애완용으로나 기분에 따라 입양할 경우 키우다 여의치 않으면 쉽게 버리게 된다. 제발 그러지 말고 입양 결정은 신중하게, 입양하면 끝까지 책임지고 보호했으면 한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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