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끄러운 피서지가 부담스럽고, 사람 없는 곳에서 여유로운 여름을 보내고 싶을 때.그럴 때 필요한 건 ‘조금 느리고, 아주 조용한’ 공간이다.<br><br>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에 위치한 왕곡마을은 바로 그런 곳이다.<br><br>SNS 핫플도 아니고, 에어컨이 빵빵한 펜션도 아니지만, 14세기부터 600년 넘게 시간을 품어온 전통 가옥들이 줄지어 서 있는 이 마을은 도심에서 닳아버린 감각을 천천히 회복시켜 준다.
굴뚝 위 항아리에 담긴 마을

왕곡마을을 걷다 보면 특이한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대부분의 집 굴뚝 위에 항아리가 얹혀 있는 모습이다.<br><br>단순한 장식처럼 보이지만, 이 항아리에는 오래된 전설이 숨어 있다.<br><br>마을이 자리한 지형이 배 모양이라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난다는 뜻에서, 이 마을은 공동우물 없이도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했다.<br><br>그 대안으로 굴뚝 위에 항아리를 얹는 풍습이 생겼고, 이는 마을을 지키려는 공동체의 염원이 상징처럼 자리 잡은 것이다.<br><br>그렇게 오랜 시간 이어져온 전통이 지금도 일상처럼 살아 있다. 카페도 없고, 전시관도 없지만, 사람 사는 집이 전시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다.
600년 한옥 마을

왕곡마을은 단순한 전통마을이 아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br><br>14세기부터 강릉함씨, 강릉최씨, 용궁김씨 가문이 모여 살던 집성촌으로, 21채의 북방식 한옥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br><br>기와지붕에 긴 처마, 두터운 벽과 구들방 구조는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서늘한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br><br>심지어 6·25 전쟁 당시에도 폭격 한 번 없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을을 감싸는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자연의 방패가 되어준 셈이다. <br><br>그 덕분에 왕곡마을은 현존하는 유일한 북방식 한옥 밀집촌으로, 지금은 국가 전통건조물보존지구로도 지정돼 있다.

왕곡마을의 백미는 단연 숙박 체험이다. 에어컨도, 와이파이도 없을 수 있다.<br><br> 하지만 저녁 무렵 마루에 앉아 산자락을 바라보며 듣는 풀벌레 소리, 그리 높지 않은 처마 아래로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불 끄고 누운 방 안의 정적은 도시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경험이다.<br><br>입장료는 없고, 주차도 무료. 마을 입구 공터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보자. 산책하다 마주친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굴뚝 위 항아리에 대해 물어보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하루는 특별해진다.

왕곡마을은 소란스러운 여름 피서지와는 다르다. 아침이 되면 새소리에 눈을 뜨고, 낮에는 마당의 풀벌레를 바라보다, 해가 지면 산그림자가 천천히 마을을 덮는 풍경 속에서 하루가 흘러간다.<br><br>시간이 멈춘 듯한 이 마을에선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시 멈춰 서 있는 것 자체가 이곳에 가장 어울리는 여행법이다.

운영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연중무휴로 언제든지 방문 가능하다. 예약을 통해 전통 한옥 숙박도 가능하며, 자세한 내용은 고성군 관광 홈페이지 또는 마을 안내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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