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도, 퐁퐁도 금지… 피곤한 금기 사회에서 생존하기
손가락도, 퐁퐁도 금지
금기가 많아 피곤하다
한 유통 업체의 빅데이터팀 직원 A씨의 업무에는 여초 커뮤니티 탐방이 포함돼 있다. 여성시대(여시), 소울드레서 같은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되는 사안이 없는지 모니터링하는 일이다. 여초 카페만이 아니다. 디시인사이드, 디젤매니아, 보배드림 같은 남성 회원 중심 커뮤니티 게시판 역시 그의 담당. 매일 수천 건씩 올라오는 글을 내부 인력으론 감당하지 못해 소셜미디어(SNS)에서 언급 횟수가 많은 단어나 트렌드를 정리해 보고하는 대행사까지 쓰고 있다.
이렇게 ‘주의 항목’ ‘혐오 사례’를 정리해 매주 전 사원과 공유한다. 괜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것이다. A씨는 “여혐·남혐 논란의 회사들이 매년 비슷한 사건 때마다 언급되는 걸 보면서 이건 한두 달 매출이나 마케팅 비용을 포기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서도 “감정을 배설하는 커뮤니티 게시판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괴감도 드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펴선 안 된다. 온라인 댓글에는 성관계나 신체 부위를 가리키는 단어나 욕설은 물론 특정 계층이나 민족, 종교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표현이 금지된다. ‘퐁퐁’과 ‘설거지’는 부엌을 벗어나 혐오를 유발한다.
기업들은 최신 혐오를 공부하는 데 돈과 시간을 쓴다. 몇 달 전만 해도 괜찮던 표현과 행동이 특정 세력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쏘시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방이 최선이다. 하지 말아야 할 목록이 많은 ‘금기 사회’를 사는 방식이다.
◇혐오를 배워야 하는 시대
손가락이 문제다. 엄지와 검지를 집게 모양으로 만든 손가락이 ‘남성 신체 부위가 작다는 조롱’으로 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약 3년 전. 수백 년 동안 ‘조금’ 혹은 ‘작다’는 표현으로 쓰이던 이 손가락은 자동차, 게임 업계는 물론 유통 업체에까지 지뢰로 작용했다. 포스터 그림에, 홍보 영상에, 게임 캐릭터에 들어간 손가락으로 ‘남혐 기업’이라 찍히는 순간 해당 회사에 대한 불매 운동과 공식 항의가 이어졌다. 담당 직원을 징계하겠다는 다짐과 사과문이 발표되고, 수백만~수억 원을 쓴 콘텐츠는 빛의 속도로 삭제된다. 기업 홍보물을 촬영하는 업체 담당자는 “모델들에게 신제품을 소개할 때나 포스터를 가리킬 때 손가락을 모두 펴거나 오므리도록 당부한다”고 했다.
공권력도 예외는 없다. 광주 남부경찰서가 배포한 포스터에 손가락이 포함돼 삭제·회수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군에서도 손가락이 잘못 그려진 포스터로 국민신문고에 민원까지 제기됐다. 퐁퐁을 주방 세제로, 설거지를 가사 노동으로만 읽어서도 안 된다. 남성이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여성은 이에 기생한다는 혐오 표현이기 때문이다. 네이버 웹툰은 아내에게 배신당해 전 재산을 잃은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세계 퐁퐁남’이라는 작품을 공모전 심사에 통과시켰다가 불매 대상이 됐다. 실제로 하루 이용자 10만~20만명이 줄었다.
인공지능(AI)에도 혐오 표현을 가르쳐야 한다. 카카오톡은 작년 말, 사용자가 작성한 메시지를 다양한 말투로 번역하는 AI 번역 서비스를 내놓았다가 남혐 논란에 급히 수정·삭제하기도 했다. 혐오 발언을 입력해 이모티콘으로 번역을 누르면 집게손가락이 나오거나, ‘한녀’는 혐오 표현으로 분류하면서 ‘한남’은 그대로 둬 조롱을 조장했다는 주장. 카카오톡은 남혐 논란에 결국 해당 번역을 삭제했다.
◇조심하자고? 경고!
혐오를 피하기 위한 주의도 혐오한다. 버추얼 아이돌 그룹을 만드는 한 기획사는 “불필요한 오해를 발생시킬 수 있는 표현은 지양하라”고 공지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일부 커뮤니티에서 해당 문장이 불편하다며 집게손을 함께 올렸기 때문. 그 기획사는 “본래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고 있어 일부 문구를 삭제했다”고 다시 알렸다. 서울우유도 요거트 제품을 홍보할 인플루언서를 모집하면서 “요거트 뚜껑을 열거나 패키지를 잡을 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손동작 사용을 주의해 달라”고 했다가 여혐 논란에 휩싸였다.
기업 마케팅 담당자들은 “대체 어쩌란 말이냐”며 답답해한다. “일반인이나 인플루언서를 대상으로 하는 행사에서는 어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참여할지, 혐오 표현을 몰라 실수하는 사람이 생길지 알 수 없다”며 “이벤트 준비에 몇 달을 쏟아붓는 담당자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한데 그런 당부조차 하지 말라니...”라고 했다. 다른 업체 관계자는 “남혐·여혐 논란은 단순히 홍보 콘텐츠를 내리고 삭제하는 수준이 아니라 담당 직원이 인사 조치 될 수 있는 악재”라며 “실수했다가는 밥벌이를 잃는다는 공포가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혐오 공부’에 매달리고 책임 소재를 가린다. 혐오 논란에 휩싸였던 한 회사는 “국내외에서 논란이 된 사건까지 사례 모음집을 만들어 공유하고, 해당 사건 이후 모든 콘텐츠의 검수 단계를 3단계 이상 늘렸다”고 했다. 여성·남성 혐오 표현은 물론 “아동 모델이 바나나 먹는 장면은 아동 성애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금지한다” “동물 모델이 과하게 활동적일 경우 광고 제작 과정에서 동물 학대 논란이 있을 수 있어 주의한다”는 가이드 라인이 만들어졌다. 한 광고 제작사는 “의도가 없더라도 문제가 될 경우 콘텐츠를 활용할 수 없게 되고, 광고를 의뢰한 고객사와 책임 소재를 따지거나 비용 정산 중 분쟁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검열을 강화하고 있다”고 했다.
이슈가 되는 개별 사안을 피해 가는 것만으로는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보스턴컨설팅그룹의 김윤주 파트너는 “사회 변화에 따라 성별 갈등이 인종·세대 갈등으로 확산할 수 있는데 표현이나 단어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단순한 ‘실수’를 막는단 생각보다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을 공유하고, 계속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단에 따라 달라지는 금기어
지극히 일반적인 단어도 집단의 성격에 따라 금기어가 된다. 부동산 정보를 나누는 곳에서는 ‘폭락’ ‘무주택’ ‘가격 뻥튀기’ 같은 단어가 부정된다. 강남권 재건축·재개발 정보를 얻기 위해 오픈채팅방에 들어간 이용자는 “집값이 너무 올라 이걸 평생 갚으면서 사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남겼다가 강퇴(강제 퇴장)당했다. 해당 단지가 과도하게 비싸다는 속내를 들킨 탓이었다.
배달 앱에서는 ‘솔직 리뷰’가 금기다. ‘고기 누린내가 나요’ ‘다시 안 시킬 듯’ 같은 리뷰나 낮은 별점은 삭제 대상. ‘게시 중단 요청이 접수됐습니다’라는 표현과 함께 없던 일이 된다. SNS에 박제돼 힘든 자영업자를 박해하는 악마 취급을 받기도 한다.
취재를 위해 접촉한 업체들은 “저희 회사가 여혐·남혐 논란에 휘말렸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말아달라” “위기 관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조차 두렵다”고 말했다. 금기어를 매단 금줄에 둘둘 매여 있는 사회. 대나무숲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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