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윤명철이 본 ‘강화도 조약 150주년’ 의미

2026. 4. 24.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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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게임 속의 조선과 병자수호조약

-19세기 후반 세계질서 속 조선의 실수와 극복 과정

윤명철 (동국대 명예 교수, 국립사마르칸드 대학교 교수)

윤명철 교수

1. 제1장 서언

1876년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사건이다. 이 조약은 조선이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 국제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조선의 정치·외교·사회 구조에 장기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동시에 이 조약은 일본의 영향력 확대와 조선의 주권 약화를 가져왔고, 결국 조선 왕조의 붕괴와 식민지화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은 단순히 한일 관계사나 개항사의 사건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이 사건은 19세기 후반 세계 질서의 구조적 전환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해양력을 기반으로 세계 질서를 주도하던 영국과 대륙 세력 러시아 사이의 전략 경쟁은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으로 전개되며 유라시아 전역을 흔들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경쟁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지역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동중국해와 북태평양까지 확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한 국력 강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며 조선을 중요한 전략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제 질서 변화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 1875년의 운요호 사건이었으며, 그 결과로 체결된 것이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근대 국제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조선의 외교적 자율성과 주권을 제약하는 여러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은 조선의 개항을 알리는 외교 문서이면서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약 150년 동안 한민족은 극단적으로 복합적인 역사 경험을 겪었다. 식민지 지배와 독립운동, 분단과 전쟁, 그리고 냉전 질서 속에서의 생존 경쟁은 한민족 현대사의 핵심적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시련 속에서도 한국 사회는 경제적 성장과 민주화, 정보화를 이루어냈으며 오늘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국가로 성장하였다. 동시에 남북 분단 구조 속에서 지속되는 긴장과 사회 내부의 갈등, 그리고 급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의 새로운 도전 역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다시 검토하는 작업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지적 작업이 된다. 특히 사건 발생 이후 약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감정적 해석이나 피해 의식을 넘어 보다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에서 사건을 분석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강화도 조약의 배경과 체결 과정, 그리고 역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재검토하는 연구는 여전히 중요한 학문적 과제라 할 수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강화도 조약과 운요호 사건을 기존의 단순한 한일 관계사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넘어 보다 넓은 역사 구조 속에서 재해석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몇 가지 연구 관점을 설정한다.

첫째, 거시적이고 범공간적인 관점이다. 조선의 외교적 선택과 대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내부의 정치 상황뿐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질서와 유라시아 세계 체계 속에서 조선의 위치를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공간이며,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은 조선의 역사적 선택과 국가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둘째, 장기적이고 통시적인 관점이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은 단일 사건으로 이해되기보다는 19세기 이후 동아시아 질서가 변화하는 장기적 과정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조선의 대응 역시 단기간의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근대 전환기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셋째, 민족 주체와 역사적 계승성의 관점이다. 조선의 대응을 단순한 실패의 역사로만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조선 후기에는 개화와 근대화를 시도하는 다양한 움직임이 존재하였으며, 이후 의병 투쟁과 독립전쟁 등 민족적 저항 또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노력은 이후 한국 사회가 새로운 발전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중요한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

넷째, 생성과 붕괴, 그리고 재생이라는 역사 운동의 관점이다. 역사 과정은 단순히 발전과 쇠퇴가 직선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과 붕괴, 재생이 반복되는 동적 구조 속에서 전개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강화도 조약 이후 전개된 조선의 역사 역시 하나의 장기적 역사 운동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구 관점에서 볼 때 강화도 조약은 단순한 외교 사건이 아니라 유라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 속에서 동아시아 지정학 구조가 재편되는 과정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을 재검토함으로써 조선이 근대 세계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과정과 그 역사적 의미를 보다 입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비록 조선은 그 과정에서 국가적 붕괴와 식민지화라는 역사적 실패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시대의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경험은 이후 독립운동과 근대화 과정속에서 계승되었고, 장기적인 역사 흐름 속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이해하는 작업은 단순히 과거의 실패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축적된 역사적 경험과 노력의 의미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를 성찰하게 하는 지적 자산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역사는 미래이며, 역사학은 미래학이다.”

2. 제2장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틀(frame) 속의 조선

1. 19세기 유라시아 세계와 조선의 인식

1) 유라시아 세계의 개념

강화도조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형성된 세계사적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이 사건을 단순한 한일 관계사의 사건이 아니라 보다 넓은 국제 질서의 변화 속에서 분석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유라시아 세계(Eurasian World)라는 공간 개념을 분석의 기본 틀로 설정한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라시아’라는 개념은 점차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명칭의 변화가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를 서로 분리된 문명권이 아니라 하나의 연동된 역사 공간으로 이해하려는 새로운 인식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후 지정학 이론은 이러한 공간 인식을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대표적으로 할퍼드 매킨더(H. J. Mackinder)의 ‘심장부 이론(Heartland Theory)’과 니콜라스 스파이크먼(N. J. Spykman)의 ‘림랜드 이론(Rimland Theory)’은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의 전략적 단위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론들은 유라시아 대륙이 세계 정치의 핵심 공간이라는 인식을 강화하였다.

이처럼 유라시아 세계라는 개념이 확장된 배경에는 여러 구조적 변화가 존재하였다.

첫째는 경제 구조의 변화였다. 산업혁명 이후 산업자본주의 체제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구조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면화, 고무, 광물, 곡물 등 대규모 원료 공급과 거대한 소비 시장을 필요로 하였다. 그 결과 유럽과 아시아는 자원 생산지, 제조 중심지, 금융 중심지, 소비 시장이 장거리로 연결되는 거대한 경제권으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역 확대뿐 아니라 식민지 행정, 금융 제도, 법률 체계 등이 결합된 이른바 경제–제도 패키지가 대륙 규모로 확장되었다.

둘째는 교통 기술의 혁신이었다. 증기기관의 도입과 함께 철도와 증기선이 등장하면서 거리와 시간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철도와 증기선은 이동 속도와 정시성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이는 이른바 시간–공간 압축(time-space compression)현상을 가져왔다. 특히 1869년 개통된 수에즈 운하는 유럽과 인도양,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항로 구조를 변화시키며 세계 공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만들었다.

셋째는 통신 기술의 발전이었다. 19세기 후반 전신망의 확장은 세계를 하나의 정보 네트워크로 연결하였다. 전신은 물리적 이동보다 정보 전달이 더 빠른 시대를 열었으며, 국제 정치와 경제 활동의 속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 결과 유라시아는 단순히 이동의 대륙이 아니라 동시에 상호 작용하는 ‘동시성의 대륙’, 일종의 ‘Eurasialization’ 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넷째는 에너지 체제의 변화였다. 석탄을 기반으로 한 에너지 경제와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이었다. 이러한 에너지 체계는 산업 생산과 교통 혁신을 동시에 촉발하였으며, 철도와 증기선의 확산은 대륙 규모의 물류 체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후 현재 아제르바이잔의 바쿠(Baku) 등지에서 이루어진 석유 개발은 에너지 경제의 확장을 더욱 가속시켰다.

다섯째는 지식 체계와 학문의 발전이었다. 19세기는 비교언어학, 인류학, 고고학, 통계학, 지리학, 지도 제작 등 근대 학문이 체계적으로 발전한 시대였다. 이러한 학문적 발전은 세계 공간을 측정하고 분류하며 도표화하는 방법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유럽과 아시아를 서로 분리된 문명권이 아니라 비교 가능한 하나의 거대한 역사 무대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유라시아’라는 용어는 단순한 지리적 명칭을 넘어 문명사적 개념으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여섯째는 문화적 감각의 변화였다. 철도역과 항구, 국제 박람회, 신문과 전신망 등은 새로운 속도의 시대를 만들어냈다. 이동과 정보 전달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사람들은 먼 지역의 사건과 이미지를 더욱 쉽게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문학과 예술의 표현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19세기의 유라시아는 단순한 국경의 집합이 아니라 다양한 감각과 이미지가 교환되는 거대한 문화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요인은 국제 정치 구조의 변화였다. 19세기 제국주의 경쟁은 유럽, 중동, 인도, 중앙아시아, 동아시아를 서로 분리된 지역이 아니라 하나의 연동된 전략 공간으로 묶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세계는 점차 지정학적 사고와 지정학적 행동의 틀을 짜고, ‘지도 위의 거대한 전략 판’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매킨더는 유라시아 내륙을 세계 정치의 중심 축으로 규정하며, 해양 세력뿐 아니라 육상 교통망과 산업력, 조직력을 갖춘 대륙 세력 역시 세계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유라시아적 공간 인식은 단순한 학문적 개념에 머물지 않고 실제 국제 정치 속에서도 현실성을 갖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전개된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은 이러한 유라시아 전략 공간 인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두 제국의 경쟁은 유럽과 아시아가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연동된 전략 무대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2) 조선은 유라시아 세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유라시아적 세계 인식은 조선에서도 존재했을까? 만약 존재했다면 언제, 어떤 정도로 수용되었으며 국제 질서의 작동 메커니즘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중요한 사실은 유라시아적 사고가 용어보다 개념이 먼저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19세기 말 개화기 조선에 유입된 신식 세계지리 교과서와 지도, 신문 지식은 러시아를 유럽과 아시아를 동시에 관통하는 대륙적 존재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서술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세계를 서로 단절된 문명권의 집합이 아니라 정치·군사·경제가 상호 연동하는 하나의 국제 공간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관념적 인식에 그치지 않았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 일본의 팽창, 청나라의 약화, 그리고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은 조선으로 하여금 자신을 단순한 변방이 아니라 유라시아 국제 정치의 긴장이 교차하는 접속 공간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특히 러일전쟁과 만주 문제는 이러한 공간 인식을 더욱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조선에서 이러한 인식이 처음 등장한 통로는 근대 세계지리 교육이었다. 1880년대 이후 조선 지식인들은 신식 교과서, 세계지도, 번역서, 신문 등을 통해 새로운 세계 인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과 아시아는 더 이상 도덕적 문명권의 구분이 아니라 실제 국가와 제국, 전쟁과 무역이 움직이는 현실의 공간으로 재배치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886년에 간행된 한글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 1890년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Hulbert, H. B)가 육영공원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세계지리 교과서.

이다. 이 책은 러시아를 ‘유럽의 러시아’와 ‘아시아의 러시아’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러시아가 두 대륙을 동시에 가로지르는 거대한 대륙 국가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단순한 지리 정보가 아니라 국제 정세 인식의 틀이었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면서 동시에 긴장을 만들어내는 현실 정치의 세력이었으며, 바로 그 지점에서 두 세계는 하나의 연속된 무대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즉 ‘유라시아’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정착하지 않았더라도 그 개념적 토대는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러시아는 단순한 북방 국가가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적으로 무너뜨리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곧바로 조선의 현실 문제와 결합하였다. 러시아의 남하, 일본의 팽창, 청의 약화, 그리고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은 조선으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더 이상 한반도 내부나 중화 질서의 변방으로만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조선에서 유라시아적 사고는 처음부터 철학적 개념이나 학문적 이론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국제 정세와 지정학적 위기의 체감 속에서 형성된 현실 인식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은 세계지리를 배우면서 동시에 자기 위치를 다시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2. 유라시아 세계의 그레이트 게임- 극동질서와 연관하여

1)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과 유라시아 전략

<러시아의 전략>

19세기 중엽 유라시아 국제질서는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속에서 재편되고 있었다. 러시아가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유라시아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해양으로 진출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며, 이를 위해 지정학적으로 반드시 확보해야 할 해역이 존재하였다. 그것은 발트해, 흑해, 그리고 더 멀리 인도양과 극동의 동해였다. 이러한 전략적 목표는 이미 피터 대제 시대부터 형성되었으며, 러시아는 스웨덴과의 전쟁을 통해 발트해로 진출하려 하였고, 동시에 흑해와 발칸을 장악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을 거쳐 지중해로 진출하는 길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충돌 지점이 바로 흑해와 발칸반도, 그리고 카프카스 지역이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이 지역은 영국과 러시아의 세력 경쟁이 집중된 공간이 되었으며, 그 결과 두 지역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국 질서 속에 편입되었다. 발칸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약화 속에서 여러 민족 국가들이 등장하여 독립국 혹은 보호국 형태로 재편되었고, 카프카스에서는 러시아 제국이 군사 정복을 통해 직접 통치 체제를 구축하였다.

<발칸반도와 카프카스 지역>

발칸 반도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민족 국가의 형성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루마니아의 경우 19세기 초까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이 존재하였으나, 1829년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보호권을 확보하였다.이후 1859년 두 공국이 통합되어 루마니아 공국이 형성되었고, 1877~1878년 ‘러시아-오스만 전쟁’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달성하였다. 이어 1878년 ‘베를린 조약’을 통해 루마니아의 완전한 독립이 국제적으로 승인되었다.

불가리아 역시 ‘러시아-오스만 전쟁’ 이후 러시아의 영향 아래에서 국가 형성이 이루어졌다. 전쟁 직후 러시아의 지원을 바탕으로 대불가리아 공국이 성립되었지만, 러시아 세력의 확대를 우려한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반대로 베를린 조약에서 영토가 축소되었다. 그 결과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있는 자치 공국으로 남게 되었고, 1908년에야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였다. 세르비아 또한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에 대한 봉기를 통해 자치권을 확대하였다. 1830년 자치 공국 지위를 인정받았고, 1878년 베를린 조약에서 완전한 독립이 승인되었다. 세르비아는 정교회와 슬라브 문화의 연대를 바탕으로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러시아는 발칸에서 슬라브 민족의 보호자를 자처하였다. 반면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존속을 지지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그리스 역시 1821년 독립전쟁을 시작으로 유럽 열강의 개입 속에서 독립하였다. 1830년 영국·러시아·프랑스의 공동 개입을 통해 그리스의 독립이 승인되었는데, 이는 발칸 문제에 유럽 열강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카프카스 지역에서는 발칸과 달리 러시아의 직접적인 군사 정복이 진행되었다. 러시아는 19세기 초부터 남하 정책을 추진하며 카프카스를 점차 제국 영토에 편입하였다. 1801년 조지아의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이 러시아에 병합되면서 러시아는 흑해와 카프카스 진출의 기반을 확보하였다. 이후 조지아 전역이 러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도 러시아의 영토 확장이 이어졌다. 1813년 ‘굴리스탄Treaty of Gulistan)조약’과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페르시아는 북아제르바이잔과 동아르메니아 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하였고, 이로써 카프카스 남부의 상당 부분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카프카스 북부에서는 장기간의 군사 충돌이 이어졌다. 1817년부터 1864년까지 계속된 카프카스 전쟁에서 체첸과 다게스탄의 이슬람 세력은 러시아에 강하게 저항하였다. 저항의 중심 인물은 이맘 샤밀(Imam Shamil)이었으며, 그는 오랜 기간 러시아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1859년 샤밀이 패배하면서 카프카스 지역은 러시아의 완전한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이처럼 발칸과 카프카스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국 질서 속에 편입되었다. 발칸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약화 속에서 여러 독립국이 등장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러시아·영국·오스트리아 등 열강이 경쟁적으로 개입하였다. 반면 카프카스에서는 러시아가 군사 정복을 통해 직접 통치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지역들은 단순한 지역 문제가 아니라 유라시아 남북 전략축을 형성하는 핵심 공간이었다. 러시아는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하고, 카프카스를 통해 중동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 방향으로 접근하려는 전략을 추진하였다. 이에 맞서 영국은 인도를 방어하기 위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의 존속을 지지하였다.

<크림전쟁의 발발과 동아시아 질서의 인식>

이러한 전략 충돌은 결국 ‘크림 전쟁(Crimean War, 1853~1856)’으로 폭발하였다.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은 곧 영국·프랑스가 개입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1853년 러시아 흑해 함대는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며 우위를 점했지만, 러시아의 팽창을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연합하여 1854년 크림반도를 공격하였다. 러시아는 해양 전력을 포기하고 육상전으로 대응했으나 결국 패배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은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는 서쪽 전선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을 받는 동시에 극동에서도 해양 세력의 위협을 인식하게 되었다.당시 영국·프랑스·미국이 쿠릴 열도, 사할린, 흑룡강 하구등 극동 지역에 진출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러시아는 극동 방어선을 강화해야 한다는 전략적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단순한 주변 국가가 아니라 동해와 만주, 그리고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전략적 완충지대였으며, 극동에서 영국과 해양 세력의 접근을 차단하는 전략적 이익선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9세기 중엽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단순한 동아시아 지역 문제가 아니라, 유럽에서 시작된 그레이트 게임이 유라시아 전체로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국제 전략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발칸과 카프카스에서 시작된 제국 경쟁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결국 극동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조선 역시 유라시아 패권 경쟁의 한 축 속으로 점차 편입되기 시작하였다.

2)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과 유라시아 전략

<영국의 인도방어 전략>

영국은 인도를 1858년부터 직접 지배하였다. 1875년에는 수에즈운하의 주(株)를 매수하여 이집트의 지배권을 강화하고, 러시아가 흑해, 페르시아만, 인도양으로 진출하려는 남진정책을 차단해야 했다. 이 무렵 러시아는 1877년 1월에 오스트리아-항거리와 함께 오스만투르와 전쟁을 벌일 때 중립을 지킨다는 비밀 조약인 ‘부타페스트 협약(Budapist Vertrag)’을 맺었다. 그리고 4월 24일 투르크와 전쟁을 벌였다. 흑해 뿐 만 아니라, 동쪽인 카프카스 산맥 일대, 서쪽 해안에 연접한 발칸반도 일대가 전장이 되었다. 결국 승리는 러시아에게 돌아갔고, 발칸반도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면서 슬라브 민족주의가 일어났다. 많은 수의 나라들이 오스만 투르크에서 독립을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훗날 쏘련이 동유럽과 발칸반도를 위성국화 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9세기 유라시아 국제질서에서 영국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인도 제국을 방어하는 문제에서 출발하였다. 인도는 단순한 식민지가 아니라 영국 제국의 경제와 군사 체제를 지탱하는 핵심 거점이었기 때문에, 인도를 보호하는 일은 곧 영국 제국 전체의 전략적 과제였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영국은 러시아 제국의 남하 정책을 가장 중요한 위협으로 판단하였다. 1858년 영국은 인도를 직접 통치하는 체제를 확립하였고, 이후 제국 방어 전략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1875년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매수하여 이집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한 것은 인도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려는 전략적 조치였다. 영국에게 수에즈 운하는 단순한 경제적 시설이 아니라 인도 제국으로 이어지는 생명선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흑해와 지중해를 거쳐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는 일은 영국의 핵심 정책이 되었다.

이와 같은 전략 경쟁은 19세기 후반 발칸과 흑해 지역에서 직접적인 군사 충돌로 나타났다. 1877년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준비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부다페스트 협약을 체결하여 발칸 문제에서 상호 중립을 유지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24일 러시아-오스만 전쟁이 시작되었다.이 전쟁은 흑해뿐만 아니라 동쪽의 카프카스 산맥 지역, 서쪽의 발칸 반도까지 확대되었다. 전쟁의 결과는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으며, 러시아는 발칸 반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이 승리는 발칸 지역에서 슬라브 민족주의의 확산을 촉발하였고, 여러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변화는 훗날 소련이 동유럽과 발칸 지역을 영향권으로 편입하는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세력 확대는 영국에게 매우 심각한 전략적 위협이었다. 만약 러시아가 발칸과 흑해를 장악하고 지중해로 진출한다면, 이는 곧 영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제국 교통로를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중앙아시아 전략과 전쟁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인도를 방어하기 위해 직접적인 국경 방어보다 완충 지대를 형성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그 핵심이 바로 아프가니스탄을 ‘완충 국가(buffer state)’로 유지하는 정책이었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올 경우 인도와 직접 접촉하기 전에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완충 공간이 존재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여러 차례의 전쟁과 외교적 충돌 속에서 형성되었다. 제1차 영국-아프간 전쟁(1839~1842)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카불 정치에 확대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발생하였다. 영국은 친영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카불을 점령했지만, 철수 과정에서 아프간 부족 세력의 공격을 받아 영국군이 거의 전멸하는 치명적인 패배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이 확대되면서 영국은 다시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개입하였다. 제2차 영국-아프간 전쟁(1878~1880)의 결과 아프가니스탄은 형식적으로 독립을 유지했지만 외교권은 사실상 영국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직접 식민지로 만들기보다는 완충 국가로 유지하는 전략을 확립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1885년 아프카니스탄 북부의 ‘판즈데(Panjdeh) 위기’에서는 러시아 군대와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충돌하면서 양 제국 사이에 전면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영국과 러시아는 직접적인 전쟁을 피하기로 결정하고 협상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북부 국경을 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프가니스탄은 양 제국 사이의 완충 지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 다른 충돌은 1891년 파미르고원에서 발생하였다. 러시아 군대가 영국 탐험가 프랜시스 영허즈번드를 강제로 퇴거시킨 사건으로, 이 지역은 중앙아시아·남아시아·중국 국경이 만나는 고산 지대였다. 이 사건은 흔히 ‘세계의 지붕 위의 게임(The Game on the Roof of the World)’이라고 불리며, 탐험과 군사 정찰이 결합된 그레이트 게임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경쟁 속에서 형성된 대표적인 공간이 와칸 회랑(Wakhan Corridor)이다. 이 좁은 산악 지대는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국의 경계가 만나는 곳으로, 영국과 러시아 세력 사이의 완충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1893년 ‘듀런드 라인(Durand Line)’이 설정되면서 영국령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 경계선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시아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과 정복>

한편 러시아는 같은 시기에 중앙아시아로 남하하며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약 150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1731년 카자흐 지도자인 아불하이르 칸이 러시아에 복속을 선언한 이후 러시아는 오렌부르크와 시베리아 요새선을 구축하여 초원 지역을 군사적으로 통제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오아시스 국가들에 대한 정복이 본격화되었다. 1865년 타슈켄트 점령을 계기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진출의 거점을 확보하였고, 이어 코칸트 칸국을 병합하였다. 부하라 칸국과 히바 칸국 역시 러시아의 원정 이후에 보호국으로 편입되었다. 1867년 투르키스탄 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중앙아시아는 러시아 제국의 행정 체계 속에 통합되었다. 철도 건설과 면화농업의 확대, 러시아 농민의 이주 정책이 추진되면서 중앙아시아는 점차 제국 경제권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 카자흐 초원과 페르가나·타슈켄트 지역은 러시아 직할 통치지역이 되었고, 부하라와 히바는 형식적 독립을 유지한 보호국으로 남았다. 그러나 외교와 군사 권한은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전체는 사실상 러시아 제국의 남부 식민지 체계로 편입된 상태였다.

결국 19세기 유라시아에서 전개된 그레이트 게임은 단순한 국경 분쟁이 아니라 제국들이 전략적 공간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하는가를 보여주는 국제 정치의 거대한 실험장이었다.러시아는 남하 정책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를 장악하며 인도 방향으로 접근하려 했고, 영국은 인도를 방어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 일대를 완충 지대로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유라시아 규모의 제국 경쟁은 점차 동쪽으로 확장되었으며, 그 결과 극동과 동아시아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새로운 무대가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과 만주, 그리고 동해 연안 지역이 유라시아 전략 경쟁의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3. 동아시아 또는 태평양질서의 그레이트 게임

1) 러시아의 극동정책과 대조선 정책

<시베리아 횡단과 태평양 도달>

운요호 사건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또 사건의 발생과 연관성이 깊은 나라는 러시아이다. 러시아는 17세기 중반부터 극동에 진출하여, 17세기에 들어와 이반 4세와 로마노프가의 표트르 대제(1682~1725년)가 즉위한 이후 동쪽으로 진출하는 일을 국가적인 과제로 삼았다. 우랄 산맥을 넘어 오비강·예니세이강·레나강 유역을 개척하며 시베리아를 러시아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이어 흑룡강과 캄차카 반도를 탐사했다. 1698년에는 캄차카 원정대가 편성되었고, 쿠릴열도 탐험대는 오호츠크 해의 서쪽 해안에 항구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사할린과 쿠릴열도, 나아가 홋카이도에까지 출몰을 개시했다. 1738년에는 러시아의 제 2차 베링해협 탐험대 분견대가 치시마 열도를 따라 남하 일본의 혼슈 지역까지 측량을 감행했다. 예카테리나 2세(1729~1796)가 등장하면서 시베리아 동쪽으로 진출하는 일은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마침내 100년 만인 1741년에 베링 탐험대는 알래스카에 진출하였다. 이로서 러시아는 유럽에서 아시아· 북미를 연결하는 대륙국가로 변모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러시아가 캘리포니아 해안에 처음 도착한 것은 1769년이다. 러시아는 알래스카와 극동 지역에서 자원을 채취하며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고, 캘리포니아 해안도 그 연장선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캘리포니아로 진출하자 유럽 열강들은 지리적, 경제적으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스페인과 영국과는 갈등을 야기시킬수 있었고, 아직은 서부진출이 시작되기 이전이지만 미국도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훗날인 19세기 중반에 들어서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철수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다. 자원의 고갈로 경제적인 가치가 떨어졌다. 또 하나는 스페인, 다른 유럽 열강들의 압박으로 정치적인 갈등이 심해졌다. 그리고 러시아 정부는 아시아 및 극동 지역에서의 확장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1776년에 모피상인들로 이루어진 식민단이 현재 북방 4도의 바로 위에 위치한 우르프 섬(得撫島)까지 진출했다. 일본을 실질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의 일본 압박 전략> 이 부분에서 일본과 러시아 관련 부분은 윤명철 저, 『동아시아의 영토분쟁과 역사갈등의 연구』,, 수동예림, 2019.에서 김영림 연구 인용 부분을 참고.

에카테리나 2세는 서쪽에서 1783년에 크림반도를 장악했고, 흑해의 세력권을 놓고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웠다. 이어 강대국인 폴란드를 멸망시켜 오늘날의 발트해주변의 땅을 차지하여 해양진출의 발판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방향을 돌려 적극적으로 극동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어 1792년에는 그녀의 명을 받은 북부 연해주의 수비대장인 아담 락스만(Adam Laxman : Адам Кириллович Лаксман)가 홋카이도의 동쪽 끝인 네무로(根室)항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일본 표류민을 양도하면서 정식으로 통상할 것을 요구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쓰고 있었으므로 통상을 거절했지만, 일단 나가사키항에 출입하는 허가증을 교부해서 되돌려 보냈다.

막부는 러시아의 남진을 우려하면서 치시마 열도(쿠릴 열도)의 섬들을 ‘東에조치’에 배속시켰고, 1799년에는 막부의 직할령으로 지정하였다. 그런데 이미 1785년과 1786년에 걸쳐 홋카이도의 동부와 이미 러시아 사람들이 이주를 시작한 우르프섬까지 탐험을 실시했다. 1800년에는 홋카이도를 정밀하게 측량하고, 1808년에는 마미야 린조(間宮 林蔵)를 파견해서 가라후토(사할린)지역을 탐험하면서 측량을 하게 했다. 그는 사할린의 건너편인 아무르강(黑龍江) 하구까지 탐사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은 사할린과 아무르주 사이의 해협을 ‘마미야 해협’으로 부른다. 그 과정에서 일본과 러시아 간에는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1804년에는 러시아 황제의 사절인 니콜라이 레자노프(Nikolai Petrovich Rezanov :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Реза́нов)가 나가사키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했다. 막부는 이 요구를 거절했고, 레자노프는 보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은 무단공격이었으므로 1808년에는 철병하였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막부는 외세의 위협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당시 인정받던 국제법 규범에 따라 8세기에 쿠릴열도의 남쪽을 포함한 쿠릴열도 전체는 러시아에 귀속되었다. 결국 러시아는 17세기 중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오호츠크해 연안, 추코트카 반도, 캄차카 반도, 샨타르 열도, 코만도르 제도, 알류산 열도, 알래스카, 쿠릴 열도, 사할린이 러시아에 귀속되었다. 보리스 이바노비치 트카첸코, 김종헌 역, 『쿠릴 문제-역사, 법, 정책 그리고 경제』, 동북아역사재단, 2014. p.42

<청나라와 국경 갈등>

‘네르친스크 조약’과 ‘카흐타 조약’은 17~18세기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청나라가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맺은 대표적인 협정이다. 이 두 조약은 단순한 경계 설정을 넘어, 당시 동북아 국제질서의 안정과 변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17세기 후반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넘어 동쪽으로 진출하며 청나라와 충돌했는데, 알바진 전투(1685년, 1686년)를 거치면서 양국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를 정리하기 위해 1689년에 러시아 네르친스크에서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은 러시아가 동아시아에 진출한 뒤 체결한 최초의 국제조약이었으며, 청나라로서도 동북방 안정을 보장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라틴어·러시아어·만주어로 작성된 근대적 조약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그 뒤 1727년의 카흐타 조약은 계속된 국경 분쟁과 무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맺어졌다. 몽골과 시베리아 지역의 국경선을 새롭게 확정하고, 공식 무역로를 개설하여 합법적인 러청 교역을 보장했다. 나아가 상호 외교사절을 교환한 결과 러시아와 청나라는 장기간 안정적인 국경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동시에 유럽과 중국을 잇는 육상 무역로가 열리게 되었다. 이는 19세기 중반까지 동북아 국제질서의 중요한 기반으로 기능했다.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약 10만 3600평방km에 달하는 영토를 양보받는 효과를 얻었으며, 동북아의 정치적 지형은 새로운 균형 속에서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다. 조선은 러시아의 직접적 압력을 받지 않았으나 이후 두만강 이북이나 압록강 상류 지역으로 진출하는 일이 제약받았다.

러시아는 19세기 무렵 극동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이 쿠릴열도, 사할린, 흑룡강 하구를 점령할 가능성 때문에 안전을 위협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둘러 일본과 무역관계를 수립하고 러, 일 국경획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푸탸틴 원정대를 일본 연안으로 파견했다. 이 시기인 1853년~1855년은 영국, 프랑스, 터키, 사르데냐가 러시아를 상대로 유럽연합을 결성했던 크림전쟁 시기와 일치했다. 1854년에 영국과 프랑스는 캄차카 반도의 페트로파블롭스크에 육전대를 상륙시켰으며, 1855년에는 포격을 가하고 우루프 섬에 있는 러시아인들의 무역관을 파괴했다. 그리고 중립국인 일본의 해역에서 러시아 선박들을 공격했다. 김영수, 「근대 러시아의 해양탐사와 울릉도·독도 발견-곤차로프의 여행기와 팔라다호의 항해기록을 중심으로 Russia“s maritime exploration and the discovery of Dokdo and Ulleungdo in the Age of Modern」, 『독도연구』 제22호, 2017.6, pp 271~305.

이와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는 일본과 공식적인 국경을 획정하기 위한 조약을 신속히 체결할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남쿠릴 열도에 대한 권리를 일본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리스 이바노비치 트카첸코 지음, 김종헌 역, 『쿠릴 문제-역사, 법, 정책 그리고 경제』, 동북아역사재단, 2014. p 46.

<만주 침탈과 연해주 획득>

러시아는 청나라가 아편전쟁과 내란으로 몰락해 가던 틈을 타 북방에서 압박을 가했다. 1858년 에 ‘아이훈 조약’으로 러시아는 흑룡강(아무르강) 이북과 외흥안령 이남의 60만 평방km를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았다. 또한 흑룡강 이남과 우수리강 동쪽의 40만 평방km의 땅은 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또한 흑룡강과 송화강 · 우수리강의 항해권을 양국이 공유하는 불평등한 관계가 되었다. 1860년에는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국경선은 아무르강의 우안을 따라 이어지고 우수리강의 우안을 지나 두만강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흑룡강과 우수리강의 항로의 사용과 섬들에 대한 소유권은 러시아가 실질적으로 행사하고 있었다. 이 조약들로 인하여 러시아는 극동의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동방을 정복하다는 의미)를 획득하였고, 태평양함대 창설의 시발점이 되는 영구적인 해군기지를 갖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18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러시아는 청나라에 몇 번의 불평등조약을 강요해 150만의 토지를 강제로 점령했다.

<일본과 사할린·쿠릴열도의 교환> 이하 일본과 연관된 부분은 윤명철, 왕수엔, 김영림 지음. 현동아시아 해양국경분쟁의 역사적 근거와 대안탐구에서 김영림이 집필한 부분을 인용했다.

러시아는 일본의 막부와 대립하다가 1855년 2월 7일, 유리한 기회를 틈타 요구하면서 ‘일러 화친조약’ (日本國魯西亜國通好條約)이 맺어졌다. 일본은 러시아가 ‘시모다’ ‘나가사키’ 등의 항구를 이용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영사관을 설치하고, 최혜국 대우를 해주는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북방의 국경 문제는 어느 정도 매듭을 지었다. 즉 치시마(쿠릴)열도의 영유권을 놓고, 에토로후 섬과 우르프섬의 사이를 경계로 각각 일본령과 러시아령으로 삼았다. 다시 1862년 3월에 일본은 북위 50도선을 경계로 이남은 일본령으로 만들려 했으나 러시아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두 나라는 1875년 5월7일,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조인된 ‘가라후토 치시마 교환조약(樺太・千島交換條約)’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인하여 일본은 캄차카 반도까지 이어진 치시마(쿠릴)열도 전체를 손에 넣어 러시아의 해군력이 오오츠크해 너머 북태평양에 진출하는 것을 어느 정도 억제하는 지정학적 효과를 기대하였다. 반면에 향후에 조선과 만주를 둘러싼 충돌의 씨앗을 뿌렸다.

2). 영국의 극동정책과 대조선 정책

19세기 중반 영국의 동아시아 진출 정책은 단순한 통상 확대 정책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영국 제국의 세계 전략이 동아시아로 확장되는 과정이었다. 이 정책은 세 가지 구조적 요인이 결합하여 형성되었다. 첫째는 유라시아 전역에서 전개된 러시아와의 전략 경쟁, 즉 그레이트 게임이었고, 둘째는 청 제국의 약화 속에서 통상권과 전략 거점을 확보하려는 제국 정책이었으며, 셋째는 일본을 잠재적 해양 협력 세력으로 활용하려는 해양 전략이었다. 이 세 요소가 상호 결합하면서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근본적으로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세계 전략 속에서의 동아시아>

19세기 영국의 기본 전략은 전 세계의 해상 교통로와 항구를 연결하는 광대한 해양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 핵심 축은 인도, 인도양–동남아시아 해역, 그리고 중국 연안이었다. 인도는 영국 제국의 핵심 식민지이자 전략 중심지였고, 인도양과 동남아시아는 해상 교통로와 무역 네트워크의 중간 거점이었으며, 중국 연안은 거대한 시장과 상품 교환의 중심지로 인식되었다. 이 세 축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는 영국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미개척 지역이었다. 영국은 세계 최대의 잠재 시장인 청 제국을 개방시키려면 군사력과 외교압력이 필요했다. 드디어 1840년에 아편전쟁이 발생했다. 이 전쟁은 단순한 통상 분쟁이 아니라 동아시아 해양 질서를 강제로 개방한 사건이었다.

<러시아와의 경쟁: 그레이트 게임의 동아시아 확장>

19세기 영국외교의 핵심전략은 러시아 제국의 팽창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아시아로 팽창하는 전략은 해양가 연동됐다. 중앙아시아로의 남하, 시베리아를 통한 동진, 그리고 태평양으로의 진출이었다. 영국은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 만주 →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대륙 루트를 확보하는 것을 꺼렸다. 이 경우 러시아는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태평양 해군력을 확보하며 장기적으로는 인도 접근 가능성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이에 대응하여 중국 연안 통제와 일본 접근이라는 이중 전략을 추진하게 되었다. 청 제국에 대한 영국의 목표는 단순한 무역 확대가 아니라 중국 연안에 전략 거점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홍콩의 획득(1842)이다. 아편전쟁 이후에 체결된 난징조약을 통해 영국은 홍콩의 영구 할양, 다섯 개 항구 개항, 치외법권 인정 등의 권리를 확보하였다.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은 영국 상업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상하이는 이후 동아시아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여러 열강이 중국 내 세력권 확보를 시도하였다. 이 가운데 영국은 특히 양쯔강 유역, 티베트, 버마 접경 지역에 전략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영국은 19세기 중반부터 전략적인 가치를 점차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에도 막부 체제 아래 있었지만 해양 국가라는 점과 태평양 연안에 위치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할 수 있다는 지정학적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의 관점에서 일본은 태평양 해양 전략의 잠재적 파트너였다. 1854년 미국과 일본이 통상조약을 맺자 영국은 일본과 1858년 영일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때부터 영국은 일본을 잠재적 동맹이자 러시아 견제 세력, 그리고 동아시아 해군 협력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본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해군 기술, 조선 산업, 금융 제도 등에서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협력 관계는 훗날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는 1902년의 영일동맹으로 이어졌다. 이 동맹의 핵심 목적은 러시아 견제와 중국 세력 균형 유지, 그리고 동아시아 해양 질서 관리였다.

<조선에 대한 영국의 인식>

영국의 조선 정책에서 특징적인 점은 조선을 직접 식민지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영국에게 조선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는 완충지대이자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공간이었다. 따라서 영국은 조선이 특정 강대국에 의해 독점적으로 지배되는 상황을 경계하였으며, 조선의 형식적 독립을 유지시키는 것이 동아시아 세력 균형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영국은 동아시아 해협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대한해협, 쓰시마 해협, 대만 해협 등을 해양 전략의 중요한 통로로 인식하였다. 특히 대한해협은 일본해와 동중국해, 그리고 태평양을 연결하는 핵심 항로로 평가되었다.

이 때문에 1885년에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가능성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 남해의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해군 기지로 활용하려 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해양이 19세기 후반 그레이트 게임의 한부분으로 편입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19세기 중반 영국은 러시아 견제해서 자국의 힘을 동아시아에 확장시키는 과정이었고, 일본 활용하여 해양 동맹을 모색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결국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중국의 강제 개항, 일본의 해양 국가화, 러시아 견제라는 구조 속에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독자적인 능력을 상실한채 강대국 경쟁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편입되었다.

3) 미국의 태평양 진출과 대조선 정책

<태평양 연안 점령과 洋洋국가(Dual Ocean Nation) 실현>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몬로주의(Monroe Doctrine)’를 선포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 세력의 간섭을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1830년대 이후에 미국은 산업화를 기반으로 철도와 항만을 확충하고,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해 경제적 자립을 강화했다. 1845년에 텍사스를 자국 영토로 병합하는 과정에서 1846~1848년에 멕시코와 전쟁이 벌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캘리포니아 등 태평양 연안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이로써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동시에 연결하는 완벽한 ‘양양국가(洋洋國家, Dual Ocean Nation)’로 성장했고, 태평양 항로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어 1848년부터는 포경선이 조선의 동해안에 출현했고, 1852년에는 부산 용당포에까지 입항했다. 이는 미국의 태평양 진출이 단순한 대륙 팽창을 넘어 동아시아와 직접 연결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일본 개항과 아시아 진출의 시작>

1840년대 중반, 미국은 북태평양 포경업과 중국 무역 확대를 위해 아시아 항로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무렵 캄차카와 연해주 연안에는 미국 포경선 수백 척이 드나들며 고래잡이로 막대한 이익을 올렸고, 이들의 수리와 보급을 위해 일본의 개항이 절실했다. 박종효, 『격변기의 한·러 관계사』, 선인, 2015.

1853년 매튜 C. 페리 제독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黑船) 함대가 에도만에 나타나 막부를 압박했고, 1854년에 유구국(오끼나와)과 유·미(琉·美) 수호조약을 맺고, 요꼬하마에서 ‘일·미 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서구 열강과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는 첫 걸음이었다. 이어 1858년에 맺어진 미·일 통상조약은 자유무역항 확보, 최혜국 대우, 치외법권 조항 등을 포함하여 일본을 불평등조약 체제 속으로 편입시켰다.

<남북전쟁 이후의 산업 발전과 태평양 전략>

미국은 1861~1865년의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 산업력이 급속히 성장했고, 1869년에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됐다. 물자와 인력의 이동을 촉진해 서부 개발은 가속화됐고, 대규모 이민정책, 금·은광 개발 등으로 태평양 연안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입했다. “수어드의 바보짓(Seward’s Folly)”이라 불렸으나, 금·석유·모피 자원이 풍부했을 뿐 아니라 북태평양과 베링해를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는 훗날 일본·러시아와의 태평양 경쟁에서 군사적 거점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조선과의 충돌: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19세기 중반, 미국 포경선들은 동해와 황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1866년 8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진입했으나 교섭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해 배가 불태워지고 선원 전원이 사망했다. 평양감사 박규수가 지휘한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 강한 보복 여론을 촉발했다. 그 결과 1871년, 미국은 아시아 함대를 동원해 5천여 병력을 강화도에 상륙시켜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조선군은 광성보 등지에서 완강히 항전했으나, 화력의 열세로 수백 명이 전사했다. 미국은 조선 개항에는 실패했으나, 조선을 태평양 전략 속에서 압박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동태평양 패권 전략: 하와이 합병과 대 스페인 전쟁>

1890년, 앨프리드 세이어 마한(Alfred Thayer Mahan)은 저서 《해양력이 역사에 끼치는 영향》을 통해 강력한 해군력과 태평양 중간 기지 확보가 세계 패권의 핵심임을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곧 미국 정책에 반영되었고, 1898년 미·스페인 전쟁에서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획득하는 제국적 팽창으로 이어졌다. 이어 1898년에는 하와이를 병합하였으며, 주변의 섬들은 1900년 7월 14일에 미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미국 해군은 태평양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는전진 거점을 확보했다. 극동 아시아에서 영국,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과 신흥 태평양 세력인 미국은 러시아의 위협을 인식했다. 그리고 동쪽에서 유럽지역에서 터키가 하는 역할을 동쪽에서 담당할 러시아의 대항마로서 일본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19세기에 들어와 미국은 대서양 연안의 신생 공화국에서 태평양으로 팽창한 해양 제국으로 변모했다. 멕시코 전쟁, 일본 개항, 남북전쟁과 철도 완공, 알래스카 매입, 신미양요는 모두 미국이 동아시아 질서 속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 사건들이었다. 따라서 운요호 사건(1875년)과 병자수호조약(1876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태평양과 동아시아를 자국 전략에 편입시키려 했던 흐름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조선은 러시아·일본·청나라, 심지어는 미국과 영국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지정학적 구조에 놓였다.

4) 일본의 근대적 팽창과 대조선정책

<서구 충격과 일본의 개항>

19세기 중엽 일본의 대외 정책과 국가 전략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계기는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이었다. 특히 1842년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난징조약을 체결한 사건은 일본 사회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아래에서 이른바 쇄국 체제를 유지하며 네덜란드와 중국에 한정된 제한적 무역만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제국이었던 청나라가 서구의 군사력 앞에서 무너진 사실은 일본에서도 동일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53년 7월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Matthew C. Perry)가 증기 군함 네 척을 이끌고 에도만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나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였다. 일본인들이 ‘구로후네(黑船, 흑선)’라 부른 이 사건은 일본이 장기간 유지해 온 쇄국체제를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1854년 일본은 미국과 화친조약, 이른바 가나가와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시모다와 하코다테가 개항되었으며 미국은 최혜국 대우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체결한 조약 체제는 곧 불평등조약 체제로 발전하였다. 1858년 체결된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일본이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관세 자주권을 상실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일본 사회에 강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며, 동시에 국가적 차원의 근대화 필요성을 자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개혁과 근대 해군력 형성>

불평등조약 체제 속에서 막부는 서양의 군사기술과 해군력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1854년 이후 네덜란드의 협조 아래 일본은 나가사키에 해군훈련소를 설치하고 서양식 항해술과 선박 건조 기술을 도입하였다. 네덜란드 교관단이 파견되어 일본 청년들에게 항해술과 조선 기술을 교육하였으며, 이후 군함과 장비가 도입되었다.또한 일본은 조선소와 제철 시설을 건설하고 유학생을 유럽에 파견하여 군사기술을 학습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일본이 단순히 서구의 압력에 굴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압력을 근대적 군사력과 국가 역량의 강화로 전환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개항 이후 일본은 서구 열강과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일본 사회가 서구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실감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사쓰마번과 영국 사이에 벌어진 사쓰에이 전쟁(1862)과 조슈번과 서구 연합 함대 사이에 벌어진 시모노세키 사건(1863~1864)이다. 조슈번은 간몬 해협을 봉쇄하며 외국 선박의 통행을 제한하려 했으나, 영국·프랑스·미국·네덜란드 연합 함대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다. 이러한 전투는 일본이 서구 열강과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통해 근대 해군력의 위력을 체험한 사건이었다. 동시에 일본 내부에서는 막부 체제의 무능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었고,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과 근대국가의 형성>

1868년 도쿠가와 막부가 붕괴하고 메이지 정부가 수립되면서 일본은 근대 중앙집권 국가로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불평등조약 개정과 국가 주권 회복을 핵심 목표로 삼고 정치·군사·경제·교육 전반에 걸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871년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미국과 유럽 각국에 파견되어 서구의 정치제도와 산업기술을 조사하고, 국제 질서 속에서 일본의 위치를 재정립하려 하였다. 동시에 일본은 대규모 국비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하여 서구의 학문과 기술을 체계적으로 도입하였다. 또한 1873년에는 징병령이 반포되어 신분을 초월한 국민군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군사개혁은 일본이 근대 국가로서 외부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이었다.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은 곧 대외 팽창 전략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주변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먼저 류큐 왕국과 대만 문제에서 나타났다. 1872년 일본은 류큐 왕국을 강제로 번으로 편입하였고, 1879년에는 이를 폐지하여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하였다. 또한 1874년에는 류큐 표류민 사건을 계기로 대만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일본이 스스로를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군사 행위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대 조선정책>

이 과정에서 조선은 일본의 전략적 관심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일본 내부에서는 이미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제기되었으며, 일부 지식인들은 만주와 타이완까지 포함하는 팽창 구상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담론은 일본이 청나라를 대신하여 동아시아 질서를 주도할 수 있다는 인식과 결합하였다. 결국 일본의 대조선 정책은 단순한 양국 관계의 산물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압력을 통해 형성된 근대 국가 전략의 연장선에서 등장하였다. 일본은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에서 사용하던 포함외교와 불평등조약 체제를 학습하고 이를 조선에 적용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1875년 운요호 사건과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은 일본의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근대 국가로 전환한 일본이 주변 지역에 대해 제국주의적 방식을 실험하고 적용한 초기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아편전쟁 이후 불과 30여 년 만에 서구 열강의 압박을 받던 국가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팽창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서구 제국주의 체제를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학습하고 변형하여 동아시아 내부에 재현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청나라의 쇠퇴, 러시아의 남하, 미국의 태평양 진출과 맞물리는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을 직접 압박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은 일본의 일방적 침략이라는 측면뿐 아니라, 일본이 세계 제국주의 구조 속에 편입되면서 그 질서를 동아시아 내부에 재현한 사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5) 청나라의 붕괴와 대조선정책

<북방 압력의 시작: 러시아의 남진과 만주 국경 문제>

청나라가 직면한 가장 이른 외부 압력은 러시아의 동진이었다. 17세기 중반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아무르강 유역까지 진출하였고, 이 과정에서 청나라와 국경 충돌을 일으켰다. 이러한 충돌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 이른바 나선정벌이다. ‘나선(羅禪)’은 러시아를 의미하며, 당시 러시아 세력은 이미 극동 지역 깊숙이 진입하여 흑룡강 일대에 거점을 형성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조총군을 파견하여 청군과 함께 러시아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1658년 신유가 지휘한 조선 조총군은 흑룡강과 송화강 합류 지점에서 러시아 선단을 공격하여 지휘관 스테파노프와 병력 상당수를 격파하였다.

이러한 충돌 이후에 청나라와 러시아는 국경 문제를 조약으로 조정하였다. 1689년 체결된 네르친스크 조약은 양국 간 최초의 국제조약으로, 스타노보이 산맥을 기준으로 국경을 설정하였다. 이어 1727년 카흐타 조약을 통해 몽골 지역의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약은 국경 안정화의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의 세력 균형이 조약 체제로 재조정되는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해양 충격과 제국 질서의 붕괴: 아편전쟁과 영토 상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청 제국은 전혀 다른 형태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서구 산업국가의 군사력과 해양력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기존의 중화 중심 질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1839년에 시작된 제1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는 영국에 패배하였고, 1842년 난징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고, 상하이·광저우 등 다섯 항구가 개항되었으며 치외법권과 관세권 제한이 뒤따랐다. 이는 청 제국이 근대 국제체제에 강제로 편입된 사건이었다. 이어 제2차 아편전쟁(1856~1860)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톈진을 점령하고 베이징까지 진군하였다. 결국 청나라는 톈진조약과 베이징조약을 체결하여 더 많은 개항과 외국 공사관 설치를 허용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이 시기에 러시아가 만주 지역에서 영토 확장을 진행했다는 점이었다. 청나라는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아무르강 북쪽과 우수리강 동쪽의 광대한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하였다. 이로써 연해주 지역이 러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동북아시아의 세력 균형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청나라의 위기는 외세의 침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같은 시기 제국 내부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연속적으로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태평천국운동(1851~1864)’이다. 홍수전이 이끄는 태평천국 세력은 난징을 점령하고 장기간 남중국을 지배하였다. 이 전쟁에서 수천만 명에 이르는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와 동시에 화북에서는 ‘니안군 봉기’ 니안 반란(니안 루안)은 1851년부터 1868년까지 중국북부에서 무장 봉기를 했다. 이 무렵의 몇몇 반란들은 경제적인 상실과 토지의 황폐화, 많은 인명 손실을 낳았다.

, 서북에서는 ‘회민(回民)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연속적인 내란은 청나라의 군사력과 재정 능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중앙정부의 통치력 역시 급격히 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청 제국은 외세의 침략과 내부 반란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이중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이는 국가 역량의 구조적 소진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청나라 내부에서는 국력을 회복하려는 개혁 시도가 나타났다. 1860년대 이후 추진된 ‘양무운동(자강운동)’이 그것이다.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은 서양 기술을 도입하여 군수공업을 발전시키고 조선소와 병기 공장을 설립하였다. 또한 서양식 군함을 도입하여 북양함대를 창설하고 해군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중체서용’이라는 원칙 아래 추진되었다. 즉 서양의 기술은 받아들이되 정치와 사상 체제는 유지하려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군사기술의 일부 발전은 이루어졌지만 국가 체제 전체를 재편하는 근본적 개혁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일본의 부상과 조선 문제의 국제화>

청나라보다 약 10여 년 늦게 개항한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국가 체제와 군사력을 급속히 근대화하였다. 청나라는 1871년 일본과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하여 전통적 상하관계를 청산하고 형식상 대등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한편, ‘연일제서(聯日制西)’라는 인식 아래 일본을 서구 세력에 대응할 협력 대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일본은 곧바로 팽창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1872년에 류큐(유구국)를 지배하에 두고, 1874년에는 표류한 류큐인의 피살 사건을 구실로 ‘대만출병’을 단행하였다. 이 사건은 군사적으로는 제한적 성과에 그쳤지만, 일본이 청나라 중심의 기존 질서를 넘어 독자적인 대외 팽창을 시도한 분기점이었다. 이와 같은 대외 확장은 메이지 유신 직후 분출된 무사 계층의 불만과 맞물려 나타난 것으로, ‘정한론(征韓論)’과 같은 대외 강경론이 논의되던 흐름 속에서 침략의 방향이 조선이 아닌 류큐·대만 등 해양 공간으로 우선 이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어 1879년에 일본은 류큐 왕국을 완전히 병합하여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함으로써, 청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조공질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이는 청나라로 하여금 새로운 경쟁 세력의 등장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기존의 중화 질서가 구조적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조선은 청과 일본이 경쟁하는 국제 정치의 핵심 공간으로 부상하였다. 청나라는 여전히 조선을 속방으로 유지하려 했지만, 일본은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하며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였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은 단순한 양국 간의 외교 문서를 넘어, 동아시아 전통 질서가 해체되고 근대적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전환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청나라의 쇠퇴는 단순한 왕조의 약화를 넘어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중심 구조가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청나라는 전통적인 대륙 중심 제국의 세계관을 유지한 채 제한적인 근대화를 시도하였다. 반면 일본은 해양을 국가 생존과 확장의 핵심 공간으로 인식하고 해군력과 산업 체계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전략적 인식의 차이는 결국 동아시아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 과정에서 조선은 전통적 책봉 질서의 일부에서 벗어나, 제국주의적 경쟁이 교차하는 전략 공간으로 변하게 되었다.

6) 조선의 대응과 지정학적 운명

<동아시아 해양질서 속의 조선>

1876년 강화도조약 이전까지 동아시아의 해양 질서는 기본적으로 명·청 중심의 조공체제속에서 운영되었다. 15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이 질서 아래에서 바다는 오늘날과 같은 자유로운 국제 교역의 공간이 아니라, 국가가 통제하는 정치적 완충지대에 가까웠다. 해금 정책으로 민간의 해상 활동은 강하게 제한되었고, 국가가 통제하는 조공 무역이 해상 교류의 중심을 이루었으며, 해군 체제 역시 대체로 연안 방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다시 말해 당시 동아시아의 바다는 개방과 경쟁의 장이라기보다 통제와 질서의 공간이었다. 조선의 해양 체제 역시 이러한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방어 중심 구조를 띠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발전하였고, 삼도수군통제사 체제를 중심으로 연안 방어와 해상 치안 유지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해양 정책은 바다를 통해 외부로 팽창하거나 원거리 교역망을 구축하는 방향이 아니라, 해안을 지키고 침입을 막는 방어 체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비교적 안정되면서 조선의 해양 역량은 점차 정체되었고, 그 결과 조선은 원양항해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국제 상업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못했고, 근대적 해군기술 역시 도입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구조적 한계는 19세기 후반 증기선과 근대 해군을 보유한 서구 열강 및 일본과 마주했을 때 결정적인 격차로 드러나게 되었다.

<러시아의 남진청책과 조선의 만남>

조선은 17세기 중반 이미 러시아 세력과 간접적으로 충돌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1654년과 1658년의 ‘나선 정벌’에서 조선군은 청의 요청에 따라 파병되었고, 특히 1658년에는 신유가 지휘한 조총군이 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러시아 선단을 공격해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병력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조선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대외정책의 결과라기보다는, 청 제국의 변경 방어 체제에 편입된 군사 행동이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19세기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상황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러시아는 태평양 진출을 목표로 연해주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1854년에는 러시아 군함이 두만강 하구에서 개항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조선 주민들과 러시아 수병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어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면서 두만강 하구 일대는 새로운 국제 경계선이 되었다. 그러나 이 중대한 영토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조선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조선은 여전히 유교적 왕권 질서와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국제 질서는 이미 대륙과 해양, 전통과 근대가 격돌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조선이 국제적인 위치와 지정학적 환경>

이러한 변화는 곧 서양 열강과의 직접 충돌로 이어졌다. 1866년 ‘병인양요’는 프랑스와 조선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군사 충돌이었다. 천주교 박해와 선교사 처형을 구실로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였고,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저항에 부딪혀 철수하였지만, 이 사건은 조선이 서양의 군사력과 직접 충돌한 첫 경험으로서 외세에 대한 경계심을 크게 강화시켰다. 이어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그 배경에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었다.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 교섭을 시도하다가 충돌 끝에 불태워지자, 미국은 책임을 추궁한다는 명분 아래 함대를 파견하였다. 1871년 미국 함대는 강화도로 진입하여 초지진·덕진진·광성보를 공격하였고,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저항하였다. 그러나 미국 역시 조선을 개항시키거나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철수하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이 외세를 군사적으로 격퇴한 사건으로 기억되었지만, 동시에 세계 질서의 변화가 이미 조선의 문턱까지 도달했음을 보여준 징후이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조선의 국제적 위치는 급속히 변화하였다. 조선은 더 이상 단순한 중화 질서의 변방이 아니었다. 러시아, 영국, 미국, 일본, 청나라의 이해관계가 이 공간에서 교차하였고, 더 넓게는 베트남, 대만, 류큐, 중앙아시아 문제와도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곧 조선은 동아시아 그레이트 게임의 교차 지대로 떠오르게 되었다. 유럽에서 시작된 제국 경쟁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조선은 대륙과 해양, 북방과 남방, 전통 질서와 근대 세계가 만나는 접속 공간이 되었다. 이 점에서 조선은 단순한 국경국가가 아니었다. 근대 이후 국제 정치의 위협은 단지 국경선에서만 발생하지 않았다. 철도, 해상 항로, 전신선과 같은 교통·통신망을 따라 전략적 회랑이 형성되었고, 바로 그 회랑이 강대국 경쟁의 핵심 무대가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조선은 국경국가인 동시에 ‘회랑(回廊,corridor) 국가’였다. 조선은 만주와 일본열도, 황해와 동해, 대륙과 해양을 잇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었고, 바로 그러한 위치 때문에 그 지정학적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변화한 국제 환경 속에서 조선은 근대화의 방향을 둘러싼 중대한 역사적 선택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능동적으로 설계한 국가 전략의 결과라기보다, 외부로부터 밀려드는 압력 속에서 시작된 비자발적 근대화의 성격이 강하였다. 조선은 강화도조약 이후 더 이상 폐쇄된 질서 속에 머물 수 없었고, 국제 무역과 해양 교통 체계 속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바다와 무역은 단순한 주변 요소가 아니라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새로운 역사 무대로 떠오르게 되었다.

<강화도조약 체결 직전의 구조적 위기>

19세기 후반 조선이 직면한 상황은 단순한 외교 문제나 일시적 군사 충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 질서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 구조적 위기였다. 조선이 오랫동안 속해 있던 동아시아 질서는 명·청 중심의 조공 체제를 기반으로 유지되어 왔지만, 19세기 중엽 이후 이 질서는 서구 제국주의의 해양 팽창과 유라시아 강대국 경쟁 속에서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산업혁명을 통해 막강한 군사력과 해양력을 확보한 서구 열강은 전 세계 해양 교통망을 장악하면서 기존 지역 질서를 강제로 개방하였다.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 중국 연안은 개항되고, 1850년대 이후에는 일본이 개항과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이전과 전혀 다른 구조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바다는 더 이상 국가가 통제하는 완충지대가 아니라 세계 시장과 제국 전략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유교적 왕권 질서와 사대외교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고, 군사적으로는 근대 해군과 해상교통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국제 상업 네트워크와 연결된 항구 체제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 조선은 전통 질서 속에 머물러 있는 국가였지만, 주변 세계는 이미 근대제국 경쟁 체제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격차는 특히 해양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19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바다는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여러 해양 세력이 활동하는 공간이 되었고, 증기선과 근대 해군을 갖춘 국가들이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였다. 반면 조선의 해양 체제는 여전히 연안방어 중심의 수군 체제에 머물러 있었으며, 원거리 항해 능력이나 근대 해군 기술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7) 그레이트 게임으로 편입되는 조선과 강화도 조약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조선은 점차 유라시아 제국 경쟁의 접점 공간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연해주를 확보하고 태평양으로 진출하였고, 남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해역에 진입하였다. 동쪽에서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빠른 속도로 근대 해군 국가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은 대륙과 해양, 북방과 남방 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공간 속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일본의 변화는 조선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의 군사 기술과 해군 체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근대 국가로 전환하였다. 일본 지도층은 해양을 국가 생존과 발전의 핵심 공간으로 인식하였고, 해군력과 상업 해운, 조선 산업을 결합한 새로운 국가 전략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일본은 조선을 대륙 진출을 위한 전략적 교두보이자 동아시아 해양 질서 속의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러한 구조적 긴장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일본 군함인 운요호는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해안 측량을 시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조선 수비군과 충돌이 발생하였다. 일본은 이 사건을 조선의 공격으로 규정하며 군사적 압박을 가하였고, 이를 통해 조선을 개항 협상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국지적 충돌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근대 해양 질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어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구식 국제 조약 체제 속으로 편입되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동시에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되는 전환점을 의미하였다.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점차 세계 해양 교통망과 국제 무역 체계 속으로 편입되었고, 그 과정에서 외교·군사·경제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강화도조약은 단순히 조선과 일본 사이의 조약이 아니라, 유라시아 제국 경쟁과 세계 해양 질서의 확장 속에서 등장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조선이 전통적 조공 질서의 세계에서 벗어나 근대 국제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이었으며, 동시에 조선의 지정학적 운명이 본격적으로 세계 정치의 흐름 속에 편입되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1876년 2월 27일 오전 9시 강화유수영 연무당에서 조선 수석대표 신헌과 일본 수석대표 구로다 기요타카가 조일수호조규에 서명하는 모습.

3. 제3장: 강화도조약과 동아시아 해양 질서의 전환 — 운요호 사건에서 제국주의 국제질서로 편입

1. 병인양요 이후 10년, 조선 사회의 변화와 내부 논쟁

1866년 병인양요 이후 약 10년 동안 조선 사회는 겉으로는 전통 질서를 유지하는 듯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국제 환경에 대한 인식과 대응을 둘러싼 다양한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조정 내부에서는 여전히 전통적 외교 질서와 정치 체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조선은 오랫동안 청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조공 질서 속에서 외교 관계를 운영해 왔으며, 이러한 질서는 국가 운영의 기본 틀이었다. 따라서 많은 정치 세력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국가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세계 질서의 변화를 인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박규수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은 서양 문물과 국제 정세를 이해하려는 개화적 시각을 보이며 새로운 대응 방안을 모색하였다. 반면 유림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수호하려 하였으며, 외세와 서양 문명의 유입을 강하게 비판하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서양 문명의 유입이 조선 사회의 도덕 질서를 파괴할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 시기 서학(천주교)의 확산은 단순한 종교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상과 세계관의 유입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사회 내부의 긴장을 확대시켰다.

이처럼 병인양요 이후 약 10년 동안 조선 사회는 전통 질서를 유지하려는 흐름과 새로운 세계 질서를 인식하려는 흐름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 논쟁과는 별개로, 동아시아 해역에서는 이미 근대 해군력과 제국주의 세력이 등장하면서 해양 질서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지역적 현상이 아니라, 유라시아 전역에서 진행되던 권력 재편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었다.

2. 운요호 사건과 병자수호조약

1) 운요호 사건의 해양사적 의미 -근대 해양 권력의 등장 —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연안에 출현하였다. 일본은 해안 측량을 시도하며 조선 수비군과 충돌하였고, 이를 계기로 군사적 압박을 가하였다. 일본은 이 사건을 조선의 공격으로 규정하며 외교적 책임을 추궁하였다. 그러나 운요호 사건은 단순한 해상 충돌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근대 해군력을 이용한 군함 외교가 조선 연안에서 실행된 사건이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세계 해양 질서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증기선과 근대 해군은 바다를 단순한 교역 공간이 아니라 군사력과 정치력이 투사되는 전략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서구 열강은 이러한 해군력을 이용하여 아시아 국가들을 근대 국제 질서에 편입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아편전쟁, 페리 함대의 일본 개항,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은 모두 해군력을 통한 외교 압박, 즉 군함 외교의 사례였다.

운요호 사건은 이러한 세계적 흐름 속에서 등장하였다.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가 사용하던 해군 중심 외교 전략을 받아들여 이를 조선에 적용하였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강화도 연안은 한강 하구와 서해가 만나는 강해 공간이었다. 이 지역은 단순한 연안이 아니라 내륙 권력과 해양 교통이 결절되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한양으로 들어가는 해상 관문이었다. 다시 말해 이곳은 조선의 정치 중심부와 직접 연결된 강해도시권의 핵심 공간이었다.

따라서 운요호 사건은 조선의 변방이 아니라 국가 중심 공간이 외부 해양 세력에 의해 직접 관통된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한 국지적 충돌이 아니라, 해양 권력이 강해 공간을 통해 내륙 권력 구조에 침투한 최초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동아시아 내부의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이후 유라시아에서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충돌하는 국제 정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으로 표현되는 권력 경쟁의 한 양상이었다. 운요호 사건은 바로 이 구조가 동아시아 해양 공간에 투사된 초기 단계의 사건이었다.

2) 강화도조약의 체결과 내용 — 조공 질서 해체와 근대 국제질서의 제도적 진입 —

운요호 사건 이후 일본은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압력 속에서 조선은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그러나 체결 과정과 내용은 강압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강화도조약의 주요 조항은 다음과 같다.첫째,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언하였다.둘째, 부산 외에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도록 규정하였다.셋째,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넷째, 일본의 조선 연안 측량권을 허용하였다.다섯째, 관세 규정을 명확히 하지 않아 사실상 무관세 구조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조항들은 형식적으로는 근대적 조약 체계를 따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이 조선에 대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구조를 포함하고 있었다. 자주국 조항은 조선을 청 중심의 조공 질서에서 분리시키는 외교 전략이었다. 항구 개방은 조선 연안을 국제 교역망에 편입시키는 조치였다. 치외법권은 개항장을 부분적인 국제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연안 측량권은 일본이 조선 연안을 군사·항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해양 정보를 확보하는 기반이었다.

결국 이 조약은 단순한 외교 협정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권 질서의 전환을 제도적으로 확정하는 장치였다. 조선은 이 조약을 통해 조공 질서라는 전통적 질서에서 분리되어,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도하는 근대 국제 질서 속으로 편입되기 시작하였다.

3) 강화도조약의 구조적 의미 — 해륙 질서 전환과 조선의 인식 오류 —

강화도조약의 의미는 단순히 조약 내용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세계 질서 구조의 변화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세기 이전 동아시아 질서는 대륙 중심의 조공 체제를 기반으로 유지되었다. 이 질서 속에서 바다는 정치 경쟁의 중심 공간이 아니라 제한적 교역과 외교가 이루어지는 주변 공간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해양 세력이 등장하면서 세계 질서는 해양 중심 구조로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해륙 질서의 전환을 조선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조선은 여전히 대륙 질서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해양을 국가 생존과 직결된 전략 공간으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의 본질을 단순한 외교 문제나 일시적 충돌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의 구조적 오판이 발생하였다. 조선은 해양 권력이 질서를 재편하는 시대에 들어섰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대륙 중심 질서의 연장선에서 문제를 이해하려 하였다. 이는 이후의 대응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근본적 한계로 작용하였다.

4) 조약 이후 조선의 대응과 국제질서로로 편입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수신사 파견, 통리기무아문 설치, 신사유람단 파견, 별기군 창설 등 다양한 개혁 시도가 이루어졌다. 또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비롯한 여러 조약 체결을 통해 국제 외교 체제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적응 과정이 아니었다. 조선 내부의 개혁과 갈등은 외부 세력의 개입을 불러왔고, 외부의 압력은 다시 내부 변화를 가속시키는 구조를 형성하였다. 즉 이 시기의 변화는 일방적 침투가 아니라 내부와 외부가 상호작용하는 환류 구조 속에서 전개되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은 이러한 환류 구조가 정치적 사건으로 표출된 사례였다. 조선은 단순히 외세의 대상이 아니라, 국제 질서 변화 속에서 반응하고 영향을 주는 존재로 작동하고 있었다.

3. 강화도조약과 그레이트 게임의 동아시아적 시작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은 단순한 외교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이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에서 벗어나 제국주의 국제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이 사건은 동시에 더 큰 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세기 후반 유라시아에서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충돌하는 권력 경쟁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그레이트 게임’으로 표현된다. 강화도조약은 바로 이 유라시아적 권력 경쟁이 동아시아 해양 공간에 본격적으로 투사되는 출발점이었다. 조선의 강해 공간은 이 경쟁의 접점이 되었고, 이후 한반도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국제 정치의 중심 무대로 부상하게 된다.

따라서 강화도조약은 단순한 개항이 아니라, 조선이 유라시아 규모의 국제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과정의 시작이었으며, 동시에 그레이트 게임이 동아시아에서 구체적 형태를 띠기 시작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이러한 흐름 속에서 조선은 더 이상 주변부 국가가 아니라, 유라시아 권력 경쟁이 집중되는 핵심 공간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동아시아 해역, 즉 ‘동아 지중해(East Asian Mediterrinean Sea)’라고 할수 있는 이 공간은 청과 일본, 나아가 러시아와 서구 열강이 충돌하는 전략적 무대로 부상하게 된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구조가 실제 전쟁과 국제 질서 재편으로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4. 제4장: 동아시아 그레이트 게임 속의 조선 - 지정학, 해양 전략, 국제 경쟁, 그리고 구조적 한계

1. 유라시아 제국 경쟁 속의 지정학적 결절점

19세기 후반 조선이 국제 정치의 중심 문제로 떠오르게 된 것은 단순히 한 지역 국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라시아 전체에서 진행된 제국 경쟁이 동아시아에서 서로 충돌하고 중첩되는 지점에 조선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은 우연히 강대국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지리적 구조와 해양 환경, 그리고 국제 교통망의 교차 속에서 필연적으로 전략 공간으로 형성된 지역이었다.

조선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반도형 구조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통해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일본열도와 태평양 세계로 이어져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조선을 단순한 변방이 아니라,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서로를 견제하고 침투하는 접점으로 만들었다.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가 연해주로 진출하면서 이 구조는 더욱 명확해졌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며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거점을 확보하였고, 그 결과 조선 북부 국경은 곧 유라시아 대륙 전략의 최전선으로 전환되었다. 동시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해양 국가로 급속히 성장하면서 조선을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북쪽에서는 대륙 세력, 동쪽에서는 해양 세력이 서로를 향해 맞서는 공간이 되었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국제 정치의 긴장이 집중되는 지정학적 결절점으로 부상하였다.

2. 동아시아 해협 체계와 조선의 전략성

조선의 또 하나의 지정학적 특징은 동아시아 해협 체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동아시아 해역, 즉 동아지중해라 할 수 있는 이 공간에는 대한해협, 쓰시마 해협, 대만 해협과 같은 핵심 통로들이 존재한다. 이들 해협은 단순한 항로가 아니라, 해양 세력이 이동하고 충돌하는 전략적 관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대한해협은 동중국해와 일본해를 연결하는 핵심 통로였으며,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따라서 이 해협을 통제하는 문제는 단순한 지역 문제가 아니라, 동아지중해 전체의 질서를 좌우하는 문제였다. 19세기 후반 영국 해군 전략가들이 이 해역에 주목하고, 1885년 거문도 점령 사건을 일으킨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인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또한 조선은 대륙 교통망과 해양 교통망이 만나는 결절점이었다. 만주와 중앙아시아에서 이어지는 육상 교통로는 요동과 압록강, 두만강을 거쳐 해양으로 연결되었고, 해양 교통로는 중국 연안과 일본열도, 동남아시아를 잇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두 체계가 교차하는 공간이 바로 한반도였다. 특히 한강 하구와 강화도 연안은 내륙 권력과 해양 교통이 결합되는 전형적인 강해 공간이었다. 이 지역은 단순한 연안이 아니라 정치 중심지와 직접 연결된 전략적 관문이었으며, 해양 세력이 내륙으로 침투할 수 있는 통로였다. 따라서 동아지중해의 해협 체계와 강해 공간은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복합적 전략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고, 조선은 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3. 동아시아 그레이트 게임의 전개와 조선 문제의 국제화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질서는 근본적인 전환기에 들어가 있었다. 청 제국 중심의 조공 질서는 약화되고 있었으며, 서구 열강이 해군력과 산업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해역에 진입하고 있었다. 동시에 일본은 근대 국가로 전환하며 새로운 해양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조선은 세 가지 힘이 동시에 작용하는 공간이 되었다. 북쪽에서는 러시아의 대륙 팽창이 압박하고 있었고, 동쪽에서는 일본의 해양 국가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서쪽 해역에서는 영국과 미국 등 서구 해양 세력이 활동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은 대륙 제국, 해양 제국, 그리고 신흥 근대 국가가 동시에 만나는 동아지중해 전략 경쟁의 중심 무대로 전환되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유라시아 전역에서 전개되던 그레이트 게임의 동아시아적 전개로 이해할 수 있다.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진출하며 해양 접근권을 확보하려 하였고, 일본은 이를 저지하며 동시에 대륙 진출을 시도하였다. 청나라는 전통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점차 약화되었고, 서구 열강은 해양 네트워크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조선을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니라 동아지중해 전체 질서를 좌우할 전략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조선을 얻는 자가 동아시아를 얻는다”는 인식은 이러한 구조적 판단을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은 일본에게는 방어선이자 전진 기지였으며, 동시에 대륙 세력에게는 일본을 견제하는 발판이 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4. 핵심 공간으로의 전환과 질서의 재편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전개된 사건이 바로 운요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해상 충돌이 아니라, 동아지중해 공간에서 해양 세력이 강해 공간을 통해 내륙 질서에 침투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해군력을 이용하여 조선 연안에서 군사 행동을 전개함으로써 조선을 근대 국제 질서 속으로 끌어들이는 계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강화도조약은 단순한 외교 협정이 아니라, 동아지중해 질서가 전통적인 조공 체제에서 제국주의 해양 질서로 전환되는 출발점이었다. 이 조약 이후 동아시아 해양 질서는 해군력과 제국 경쟁이 중심이 되는 구조로 재편되었다. 결국 조선이 그레이트 게임의 핵심 공간이 된 이유는 정치적 사건 뿐만 아니라, 지리적 구조와 교통망, 그리고 해양전략이 결합된 지정학적 필연성 때문이었다. 조선은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반도였고, 동아지중해 해협 체계의 중심에 위치한 강해 공간이었으며, 그 결과 유라시아 권력 경쟁이 집중되는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5. 제국주의 국제 질서 속 개화의 구조와 한계

19세기 후반 조선의 개화는 흔히 내부 개혁의 문제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이 시기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바라볼 때, 개화는 조선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선택된 변화라기보다 동아지중해 질서의 급격한 재편 속에서 필연적으로 강요된 구조적 대응이었다.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더 이상 자족적인 세계에 머물 수 없었고, 해양을 통해 밀려드는 새로운 국제 질서와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본질은 개화와 수구의 대립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이 어떤 방식으로 이 새로운 질서 속에 편입될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가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조선은 점차 바다가 단순한 연안 방어의 공간이 아니라 국가 존립과 직결된 전략 공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해방에 대한 논의가 증가하고, 외양선 도입과 해군 개혁에 대한 논의가 등장한 것은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였다. 그러나 이 인식은 체계로 전환되지 못하였다. 해양을 국가 전략으로 조직화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기반과 산업 구조, 그리고 교육 체계가 부재하였기 때문이다. 해군력은 지속적으로 구축되지 못하였고, 조선 산업 역시 근대적 조선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해양 전략은 개별적 논의 수준에 머물렀으며, 국가 전체를 관통하는 통합적 시스템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반면 일본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메이지 정부는 해군성을 설치하고, 요코스카 조선소를 중심으로 근대 조선 산업을 육성하였으며, 해군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였다. 상선, 해군, 조선 산업을 하나의 국가 전략 속에서 결합시키는 이러한 시도는 일본을 단기간에 해양 국가로 전환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정책의 차이가 아니라, 국가 구조 자체의 차이였으며 결국 양국의 운명을 갈라놓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6.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 속 위기와 붕괴

조선의 개혁 과정은 또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그것은 내부 개혁과 외세 개입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환류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임오군란은 청과 일본의 군사 개입을 불러왔고, 갑신정변은 국제적 충돌로 이어졌다. 동학농민운동 역시 내부의 사회적 위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청일전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우연한 연속이 아니었다. 조선은 이미 동아지중해 국제 질서 속에서 개방된 공간으로 편입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내부 변화는 곧바로 외부 세력의 개입을 불러오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조선은 더 이상 독립된 단위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유라시아 제국 경쟁이 교차하는 장 속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이 구조적 긴장은 청일전쟁을 통해 결정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두 국가 간의 충돌이 아니라, 동아시아 질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청 제국이 대표하던 전통적인 대륙 질서는 이 전쟁을 통해 붕괴되었고, 일본은 해양 국가로서 새로운 질서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 전환의 중심에는 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어진 러일전쟁은 이 구조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러시아는 대륙 세력으로서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고, 일본은 해양 세력으로서 이를 저지하며 동시에 대륙 진출을 확대하려 하였다. 이 충돌은 단순한 지역 전쟁이 아니라, 유라시아 전역에서 전개되던 그레이트 게임이 동아지중해에서 집중적으로 폭발한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더 이상 주체적 행위자로 기능할 수 없었다. 전쟁은 조선의 영토와 해역을 무대로 전개되었고, 국가의 운명은 외부 세력의 결정에 의해 좌우되었다. 결국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의 병합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독립적 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5. 제5장. 그레이트 게임 속 주변부 국가들의 상황 — 베트남·유구·중앙아시아의 경험과 결과.

19세기 제국주의의 확장은 특정 지역에서만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양과 대륙을 따라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된 구조적 변화였다. 이 변화 속에서 각 지역은 서로 다른 역사적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외부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질서, 내부에서 흔들리는 기존 체제,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국가와 사회. 이러한 조건은 조선만이 아니라 베트남, 유구, 중앙아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조선의 경험이 결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유라시아 전체에 걸친 구조적 현상이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1. 주변국가들의 저항과 실패.

1) 베트남 — 조공 질서의 해체와 해양 제국의 침투

19세기 중반 이후 베트남이 청나라와 프랑스 등 외세에 의해 점차 복속되어 가는 과정은 동아시아 전통 국제질서의 붕괴와 서구 제국주의의 확장이 동시에 작용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식민지화라기보다, 청 중심의 조공질서가 해체되고 그 자리를 유럽 제국주의 질서가 대체하는 국제질서의 전환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중반 이전의 베트남은 독립 왕조 국가였지만, 국제질서 속에서는 청나라 중심의 조공 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다.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던 응우옌 왕조는 후에를 수도로 삼았고, 형식적으로는 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어디까지나 외교적 의례의 성격이 강했으며, 실제 국내 통치는 독자적으로 이루어졌다. 정치 체제는 유교 관료제와 과거제, 한문 행정 체계를 기반으로 한 전형적인 동아시아 문명권 국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대륙 중심 질서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였고, 서구 해양 세력에 대한 대응 능력은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상황은 급격히 바뀌었다. 프랑스는 제국주의 팽창 정책 속에서 동남아시아 진출을 강화하였고, 가톨릭 선교사 보호와 무역 거점 확보를 명분으로 베트남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1858년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이 다낭을 공격한 사건은 그 출발점이었다. 이 사건은 베트남 역사에서 서구 세력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프랑스는 먼저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식민지화를 추진하였다. 1862년 사이공 조약을 통해 응우옌 왕조는 사이공을 포함한 남부 세 개 성을 프랑스에 할양하고, 프랑스 상인의 자유 무역과 가톨릭 선교 활동을 인정하였다. 이어 1867년에는 남부 베트남 전체가 프랑스에 병합되어 코친차이나라는 직접 식민지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로써 베트남 남부는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북부 지역에서는 사태가 더욱 복잡하였다. 베트남이 전통적으로 청나라의 책봉국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북부 진출은 곧 청과의 충돌을 의미하였다. 그 결과 1884년부터 1885년까지 청불전쟁이 벌어졌고,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85년 톈진 조약을 통해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중화 중심 질서가 실질적으로 해체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을 남부 코친차이나, 중부 안남, 북부 통킹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남부는 직접 식민지, 중부와 북부는 보호국이라는 형태를 취했지만, 실제 권력은 프랑스 식민 행정부가 장악하였다. 1887년 프랑스는 베트남을 중심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포함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구성하고, 하노이를 식민 통치의 핵심 거점으로 삼았다. 이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따라서 베트남의 복속 과정은 단순히 한 국가가 식민지가 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레이트 게임의 한 지역에서 청나라 중심의 전통적인 조공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를 해군력·무역·선교 활동을 결합한 유럽 해양 제국의 질서가 대신한 구조적 변화의 한 사례였다. 아편전쟁, 강화도조약, 청일전쟁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식민지화 역시 대륙 중심 질서가 해양 제국 중심 질서로 전환되는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 유구국 — 해상 중계국가에서 일본 제국의 영토로

유구(류큐)왕국은 동아시아 해양 교역망 속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4세기 후반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으며 일본 사이에서 중계 역할을 수행하며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해왔다. 이 관계는 단순한 정치적 예속이라기보다 외교와 무역을 제도화하는 통로로 기능하였다. 유구는 중국, 조선, 일본 사이를 연결하는 해상 중계무역국으로서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였고, 동아시아 해양 질서 속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 유럽 세력이 동아시아 해역에 진출하면서 기존의 중계 무역 구조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유구는 조선과 일본 등 주변 국가들과의 교역 관계를 확대하며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지만, 국제 질서의 흐름은 점차 해양 세력 간 직접 경쟁의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1609년 일본 사쓰마번이 유구를 침공한 이후, 유구는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중국과 조공 관계를 유지하는 이중적 외교 구조 속의 국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 국가 건설을 추진하며 군사력과 행정 체제를 정비하였고,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재편 속에서 해양을 기반으로 한 전략적 확장을 국가 정책의 핵심으로 삼았다. 유구는 그러한 정책의 중요한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1872년 일본은 유구 왕국을 류큐번으로 개편하여 정치적 지위를 격하시켰다. 이어 청과의 책봉 관계를 단절시키고 일본의 행정 체제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청 중심 질서를 부정하는 전략적 조치였다. 결국 1879년 일본은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여 유구 왕국을 완전히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동중국해 해역의 전략적 거점들에도 주목하였고, 그 가운데 하나가 센카쿠 제도였다. 일본은 측량과 행정 조치를 통해 이 지역을 점차 자국 영토 체계 속으로 편입시켜 나갔다. 유구의 병합은 해양 무역 질서의 중심에 있던 전통적인 중계국가가 세계질서의 영향 속에서 근대 국민국가로 변신해가는 일본의 확장 논리에 의해 흡수된 사건이었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의 역사와도 중요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조선은 강화도조약 이후에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에서 벗어나 제국주의 국제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고, 청과 일본의 세력 경쟁 속에서 정치적인 압력을 받았다. 따라서 유구의 병합 과정과 조선의 개항 과정은 모두 조공·책봉 체제가 붕괴하고 제국주의 국제 질서가 형성되는 가운데 약소국이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는 구조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중앙아시아 —칸국들의 붕괴와 러시아의 남진

중앙아시아는 해양이 아닌 대륙 내부에서 유사한 구조가 전개된 지역이다. 이 지역의 칸국들은 오랫동안 유목 세계와 오아시스 문명의 균형 속에서 존재해왔으며, 독자적인 정치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18세기 중엽 이후 중앙아시아의 주요 집단과 국가들은 점차 세계 질서와 국제 관계 속에서 위치와 역할이 규정되기 시작하였다. 중앙아시아는 더 이상 유목 세계의 완충 지대에 머물지 않고,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근대 제국주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과정에 들어갔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러시아 제국의 팽창 정책이 있었다.

러시아가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지정학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흑해를 둘러싼 지역은 핵심 공간이었고, 이 때문에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장기간 충돌하였다. 만약 러시아가 오스만을 압도하여 흑해를 넘어 지중해와 인도양 방향으로 진출하게 된다면, 영국이 지배하던 인도와 그 교통로가 위협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전략적 긴장은 훗날 ‘그레이트 게임’이라 불리는 국제 정치 구조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 질서 속에서 러시아는 19세기에 들어서 중앙아시아로 본격적인 팽창정책을 추진하였다. 1801년에 러시아 황제 파벨 1세는 코사크 군대를 동원하여 히바와 부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으나, 그의 사후 이 계획은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1812년 나폴레옹의 침공을 격퇴한 이후 러시아는 다시 중앙아시아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러시아는 카자흐 초원 지역을 장악하고 남하의 발판을 마련한 뒤, 코칸드·부하라·히바 등 중앙아시아 칸국들을 차례로 압박해 들어갔다.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이들 칸국은 러시아의 조직적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였다.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 같은 전략 거점들이 차례로 점령되었고, 보호 조약과 군사 개입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도 급속히 확대되었다. 결국 1873년 히바 한국이 러시아 영향권 아래 들어가고, 이어 서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 일대까지 세력이 확장되면서 중앙아시아는 실질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지배 구조 속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군사 활동은 단순한 지역 정복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장악함으로써 남쪽으로 진출하여 인도를 압박하고, 궁극적으로는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확보하려 하였다. 이에 맞서 영국은 인도를 직접 통치하는 식민 체제를 구축한 뒤,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를 완충 지대로 활용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차단하려 하였다. 그레이트 게임이 본격화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중앙아시아의 여러 칸국들은 지역 내부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전략 경쟁 속에서 점차 독립을 잃고 보호국이나 식민지적 지위로 전락한 것이다. 이 점에서 중앙아시아의 사례는 조선과도 유사하다. 조선이 동아시아의 전략 공간 속에서 강대국의 압력에 노출되었듯이, 중앙아시아 또한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국제 정치 구조 속에서 주변부 국가들이 어떻게 흡수되고 재편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2. 주변부 국가들의 구조와 의미

19세기 후반 유라시아 국제 질서는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제국주의 세력과 기존의 지역 질서가 충돌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청나라, 중앙아시아 지역, 베트남, 유구국 등 여러 지역은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구조적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지역 질서 속에서 비교적 안정된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구 열강과 러시아, 일본 등 새로운 제국 세력의 팽창 속에서 강제적으로 국제 정치의 무대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대응 방식과 결과는 각 국가가 처한 지리적 위치와 정치 구조, 국제 전략 환경의 차이 때문에 대응 방식과 역사적 결과는 서로 다르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비교는 19세기 국제 질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곧 특정 국가의 실패나 성공을 내부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세계 체제의 구조와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각 지역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었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 제국으로서 일정 기간 외세와 군사적으로 경쟁할 수 있었고, 일부 근대화 개혁도 시도하였다. 반면 중앙아시아의 여러 칸국들은 분산된 정치 구조와 군사력의 한계로 인해 러시아 제국의 팽창 속에 비교적 빠르게 편입되었다. 베트남은 독자적 왕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프랑스의 군사 개입 속에서 식민지 체제로 전환되었고, 유구국은 해상 교역망 속에서 독특한 외교적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일본의 국가 통합 정책 속에서 병합되었다. 조선은 청과의 전통적 관계 속에서 국제 질서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서구 열강이 교차하는 동아시아 해양 전략 공간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조선의 문제는 다소 복잡했고, 단순한 식민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지정학적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들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은 국제 질서 변화에 대한 초기 대응이 대체로 소극적이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했고, 외세의 통상 요구나 외교 압력에 대해 쇄국 또는 제한적 개방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군사 충돌이 발생해도 이를 세계적 규모의 구조 변화로 보기보다 지역적 사건이나 일시적 위기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 결과 외세와의 충돌은 종종 국지적 전투나 외교 분쟁으로 시작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불평등 조약, 통상 개방, 외교권 제한, 보호국화, 식민지화로 이어졌다. 유사한 시기 유사한 국제질서의 구도 속에서 주변부 나라들이 처한 상황과 극복하는 과정은 조선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며, 동시에 우리의 역사 이해를 보다 넓은 공간 속으로 확장시킨다.

6. 제5장. 맺음말 - 강화도조약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

강화도조약은 조선 역사에서 한 차례의 외교 사건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와 해양 질서가 오랜 균형을 잃고 새로운 체제로 이동하던 거대한 전환의 한복판에서 체결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수세기 동안 동아시아 세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책봉 체제를 기본 질서로 삼아 왔고, 그 안에서 각 지역의 국가들은 때로 긴장하고 때로 타협하면서도 일정한 안정과 균형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동아시아 바다로 밀려들고, 일본이 근대 국가로 급속히 변모하면서, 그 오래된 질서는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निर्ण적이었던 것은 해양 공간의 변화였다. 바다는 더 이상 교류와 방어의 경계선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근대적 군함과 무역망, 식민 전략이 교차하는 국제 권력의 전면이 되었다. 서구 열강과 일본은 해군력과 해양 전략을 앞세워 동아시아 연해의 질서를 새롭게 짜기 시작했고, 한반도 해역 또한 그 거대한 재편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운요호 사건은 바로 그러한 충돌이 조선의 바다에서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일본은 근대 해군력을 바탕으로 조선 연안에 군사적 압박을 가하였고, 그 결과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동아시아 해양 질서가 전통적 체제에서 제국주의 질서로 이동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은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의 울타리에서 이탈하여 제국주의 국제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외부의 강압에 의해 근대화의 길목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준비하고 선택한 변화의 길이라기보다, 군사력과 외교 압박이 떠민 비자발적 근대화의 출발이었다. 더욱이 조선 사회는 그 구조적 변동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였고, 결국 국가 체제의 약화와 국권 상실이라는 깊은 비극을 겪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강화도조약은 분명 조선의 몰락을 재촉한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를 오직 패배와 붕괴의 서사로만 읽는다면, 우리는 그 시대가 남긴 더 깊은 움직임을 놓치게 된다. 외부의 충격은 조선 사회 내부에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태동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족 공동체의 자각이었고, 민중이 역사적 주체로 등장하는 과정이었다.

19세기 말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연이어 분출하였다. 그 대표적 사례가 동학농민운동이다. 동학은 단순한 농민 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 내부의 계급적 모순과 외세 침략이라는 민족적 모순이 맞물리며 폭발한 역사적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낡은 사회 구조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였을 뿐만 아니라, 외세에 맞선 민족적 저항의 성격을 함께 품고 있었다. 그 속에서 민중은 더 이상 지배받는 존재로만 남지 않고, 역사를 움직이는 행위자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 흐름은 이후 의병전쟁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며 장기적인 저항의 역사로 발전하였다. 이 과정 속에서 조선 사회 내부에는 민족 공동체에 대한 인식과 자각이 점차 깊어졌고, 그 토대 위에서 자생적 민족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보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일련의 투쟁은 서로 흩어진 개별 사건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세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맞서 민족 공동체가 자신의 생존을 지켜내기 위해 벌인 장기적 역사 과정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되어 의병전쟁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흐름은 민족 생존을 위한 장구한 투쟁, 곧 하나의 “40년 전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역사적 경험은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식민지의 체험과 독립운동의 기억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적·사회적 구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이어 분단과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냉전 체제의 격렬한 충돌 지점으로 만들었고, 한국 사회는 다시 한 번 거대한 세계사적 격랑 속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지키고 확장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전쟁 이후 한국 사회는 폐허 위에서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동시에 민주화를 향한 고통스러운 투쟁을 통해 시민 사회를 성숙시켜 갔다. 이 과정은 단순한 산업화의 성공을 넘어, 자유와 민주주의를 제도와 생활 속에 뿌리내리게 한 역사적 성취였다. 그러므로 강화도조약 이후의 역사는 패배와 상실만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외부 충격에 의해 시작된 비자발적 근대화의 경험이, 민족 생존의 투쟁과 사회적 재구성을 거치며 마침내 극복과 재생의 역사로 전화된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기적 시야에서 본다면, 강화도조약은 조선을 제국주의 국제 질서 속으로 끌어들인 사건인 동시에, 민족 공동체가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떠오르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곧 그것은 몰락의 문을 연 사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찾게 한 출발점이었다. 강화도조약 이후 약 한 세기 반에 걸친 한국의 근현대사는 외부의 압력 속에서 시작된 비자발적 근대화, 그 속에서 전개된 민족 생존의 장기 투쟁, 그리고 그 투쟁을 통해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형성해 온 극복과 재생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강화도조약은 동아시아 해양 질서가 전통적 체제에서 제국주의 질서로 넘어가는 역사적 분기점이었으며, 그 이후의 한국 근현대사는 비자발적 근대화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며, 싸우고, 다시 일어선 민족 공동체의 긴 여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강화도조약은 조선의 몰락을 알린 사건인 동시에, 한국 근현대사의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난 역설적 출발점이었다.

<참고 문헌>

이 글은 기조발표문임을 고려하여 논문의 형식을 지키지는 않았다. 필자가 발표한 이론들과 연구성과들을 토대로 몇몇 연구자들의 연구성과, 그리고 이미 일반적인 내용이 된 글들, 특히 외국 상황의 서술은 기본 상식선에서 인용하였다. 그 밖에 이 글을 작성하는데 활용한 연구물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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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윤명철의 논문 등

강화도 조약 150주년 국제학술회의 팜플릿.

- 강화도(병자수호)조약 150주년 국제학술회의 “그레이트 게임과 한국” 주요 내용

[행사 진행 순서]

1부 개회식 9:00~10:00

사회 임인위(유라시아실크로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가. 등 록 (9:00~9:20) 사회자

가. 내빈소개 (9:20~9:30) 사회자

나. 개 회 사 (9:30~9:35) 윤명철(동국대학교 명예교수)

다. 축 사 (9:35~9:45) 윤재웅(동국대학교 총장)

가. 인 사 말 (9:45~9:55)

나. 기조발표 (9:45~10:00) 윤명철(동국대학교 명예교수)

2부 학술회의 및 토론 10:00~12:00

가. 조선의 개국과 근대 국제 정치 체제 편입 이재석(인천대 명예교수)

가. 조선의 개국과 자본주의 세계 체제 편입 이헌창(고려대 명예교수)

나. 강화도조약 체결 전후 조선의 정치적 변화 정경민(독립기념관 연구원)

토론

가. 이재석교수 발표 토론 노영돈(국립 인천대학교 교수)

가. 이헌창교수 발표 토론 조영준(서울대학교 교수)

나. 정경민박사 발표 토론 김주용(원광대학교 교수)

점심 식사 12:00~13:00

3부 학술회의 및 토론 13:00~15:45

가. 강화도조약과 일본 배후 영·미의 영향력 사토 모토에이(일본 중앙대학 객원연구원)

나. 청국(중국)의 대조선 정책 루정호(중국 절강해양대 부교수)

다. 러시아의 대조선 정책 박종효(모스크바대 명예교수)

라. 미국의 대조선 정책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토론

가. 사토 모토에이 발표 토론 김영림(일본 중앙대학, 박사)

가. 루정호교수 발표 토론 김승일(동아시아미래연구원 원장)

나. 박종효교수 발표 토론 심헌용(조선대학교 교수)

다. 이완범교수 발표 토론 박제광(前 건국대학교 박물관)

4부 학술회의 및 토론 15:55~17:20

가. 우즈베키스탄의 대외 정책 Ungalov Azibek(사마르칸트대학교 교수)

나. 베트남의 대외 정책 신승복(베트남 페니카대학교 교수)

토론

가. Ungalov Azibek교수 발표 토론 알리셰르 쿠이치에비치(영남대학교 박사과정)

가. 신승복교수 발표 토론 조성훈(단국대학교 초빙교수)

5부 총평 및 폐회(17:20~17:45) 윤명철

<발표 논문 제목 차례>

기조 발표

그레이트 게임 속의 조선과 병자수호조약(윤명철) 5

학술 회의 (발표문)

조선의 개국과 근대국제정치체제 편입(이재석) 36

자본주의경제 근대국가의 태동기로서 개항기(이헌창) 71

강화도조약 체결 전후 조선의 정치적 변화(정경민) 111

강화도 조약 체결 경위와 열강의 배후적 영향력(사토 모토에이) 137

강화도 조약체결 전후 청국(淸國)의 대조선 정책의 진화(루정호) 147

조선 개항(開港) 시기 러시아의 대조선 정책(1854-1898)(박종효) 156

조선 개국기 미국의 대조선 정책 (1866-1905)(이완범) 189

XIX세기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로의 팽창(Azibek) 235

해양 세력의 베트남 진출과 동아시아 조공 질서의 붕괴(신승복) 246

학술 회의 (토론문)

“조선의 개국과 국제정치체제로의 편입”에 대한 토론문(노영돈) 279

“한국 근대의 기점으로서 개항과 자본주의경제 근대국가의 태동기로서 개항기”에 대한 토론문(조영준) 281

“강화도조약 체결 전후 조선의 정치적 변화 조선정부의 정책추진과정과 정책환경 변화를 중심으로”에 대한 토론문(김주용) 282

“강화도조약 체결 전후 청국의 대조선 정책의 진화”에 대한 토론문(김영림) 285

“조선 개항 시기 러시아의 대조선 정책(1854~1898)”에 대한 토론문(김승일) 287

“조선 개국기 미국의 대조선 정책(1866-1905)”에 대한 토론문(박제광) 289

“해양 세력의 베트남 진출과 동아시아 조공 질서의 붕괴”에 대한 토론문(조성훈)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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