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데이터 공백 사태..."거기, 성별 통계 있나요?"

이슬기 전 서울신문 기자 2024. 9. 26.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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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미다시]

[미디어오늘 이슬기 전 서울신문 기자]

▲ 여성 실루엣. 사진=istock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라는 책이 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가 쓴 책은 남자가 표준인 세상에서, 여성에 관한 데이터는 수집되지 않아 여성이 지워졌다고 말한다. 70㎏인 40세 남성의 기초 대사량을 기준으로 한 표준 사무실 온도 때문에 여자들은 한여름에도 감기를 달고 산다. 자동차 충돌 시험에는 건장한 남성 인형(177㎝, 76㎏)이 사용되는데, 그 때문인지 실제 교통사고에서 여자가 중상을 입을 확률은 남자보다 47% 높다. 언론사에 있을 때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은 선후배 동료들과 함께 이 책을 읽었고, 큰 감화를 받았다.

▲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 표지

이후 출입처나 혹은 국회의원실을 통해 정부 부처에 자료를 요구할 때, 성별 분리 통계 존재 여부를 같이 묻는 게 습관이 됐다. 성별 통계가 있으면 있는 대로, 그것은 구조적 성차별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대부분은 존재하질 않아서, 이 성 불평등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의 기울기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페레스는 젠더 데이터 공백 사태를 두고 “악의적이지도, 심지어 고의적이지도 않다”고 했다. 의식조차 못하는 관습에 가깝게 “수천 년 동안 존재해온 사고방식의 산물”이기에 “일종의 무념”이라는 것이다. 남자는 언급할 필요가 없고, 여자는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이중 무념'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이래 '백래시'(페미니즘에 대한 반동)가 가속화된 한국의 상황을 톺아보면, '젠더 데이터 공백'은 '무념'을 가장한 '고의'에 가까워 보인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지 않는다”던 김현숙 전 여성가족부 장관, 딥페이크 성착취 사태의 원인을 “SNS와 AI 기술의 발달”이라고 진단하는 한덕수 국무총리까지… 손바닥으로 애써 하늘을 가리는 정부 인사들의 행태가 이에 대한 방증이다.

▲ 9월9일 YTN '딥페이크 여성 피해자 몇 명?...경찰, 통계도 없다' 보도 갈무리

최근 딥페이크 성폭력 보도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난 9일에 방송된 YTN의 <[단독] 딥페이크 여성 피해자 몇 명?… 경찰, 통계도 없다>였다.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딥페이크에 관한 성별 통계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에서는 피해자·가해자의 연령별 통계 정도만 갖고 있었다. 그 바람에 대부분의 딥페이크 관련 보도들에서 인용한 유의미한 성별 통계는 해외 보안업체가 발표한 자료들 뿐이었다. 미국의 사이버 보안업체 시큐리티 히어로의 '2023 딥페이크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딥페이크 성착취물에 등장한 인물 중 53%가 한국 국적일 정도로, 한국은 딥페이크 성착취물에 가장 취약한 국가다. 피해자의 99%는 여성이었다. YTN은 전문가 멘트를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눈으로 확인하고 대책 마련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성별 통계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짚었다.

딥페이크 성착취 사태에 부쳐 언론들은 성별 분리 통계의 부재를 지적하는 한편, 직접 집계를 시도했다. 한겨레21의 지난 9일자 기사 <딥페이크 성폭력, 가해자에게 한없이 너그러운>은 지난 4년 동안 '허위영상물 편집·반포 등'의 단일 죄명으로 기소된 사건의 1심 판결문을 모두 분석했다. 그 결과 22건의 사건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었다. 지난 21일 서울 혜화역에서 열린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집회의 주최 측 입장문에 '강간문화'라는 단어만 총 8번 언급됐다. 강간이 문화가 된 사회야말로, '22만명 딥페이크방'의 토양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말이었다. 이렇듯 우리가 경험칙으로는 알고 있으되 수치로는 입증하지 못했던, 딥페이크 성착취가 젠더 기반 폭력이라는 사실을 해당 기사는 적지만 또렷한 표본으로 여실히 보여줬다.

▲ 9월21일 오후 여성혐오폭력규탄공동행동은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앞 도로에서 '딥페이크 성착취물 엄벌 촉구' 시위 벌이고 있다. 이날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5천여 명이 참가했다. ⓒ연합뉴스

딥페이크 성착취 사건 외에도, 각 분야에서 젠더 데이터 공백을 짚는 보도는 계속 되고 있다. 2021년 한겨레신문은 <젠더 데이터, 빈칸을 채우자> 기획으로 출산 휴가 사용률, 112 신고 등에서의 성별 통계 부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지난달부터 <더 이상 한명도 잃을 수 없다>는 교제폭력 기획 보도를 이어가며, 지난해 경찰이 처음으로 발표한 '친밀한 관계'에 의한 살인 규모에 성별 통계가 빠진 것을 비판했다.(<교제살인 통계, 성별 구분 필수… '젠더화된 폭력' 확인해야>(2024년 9월13일))

2006년, 통계 작성 시 성별 분리 근거를 마련한 통계법 개정안이 의결됐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부문에서 여성은 데이터로 집계되지 않고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다. 딥페이크 사태의 원인을 '기술의 발달'에서부터 찾는 현 정부의 인식은, 엄존하는 여성혐오에 대한 부정과 함께 이를 부득불 통계로 가시화하지 않으려는 일련의 모습과 맥이 닿아 있다. 한국의 딥페이크 성착취 실태를 제대로 분석하고 진단하기 위해서는, 해외 민간업체의 보고서가 아닌 전수 조사를 기반으로 한 국가기관의 통계가 필요하다. 다른 많은 분야도 마찬가지다. 언론이 끊임없이 정부와 각 기관에 성별 분리 통계를 물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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