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국민이 평생 내 집 걱정 안하는 이유

- ‘누구나 내 집을 갖는 나라’
- 싱가포르의 주거안정 비결은

LH가 대수술을 앞두고 있습니다. 수술계획을 보면 딱 떠오르는 게 있죠. 바로 싱가포르 모델입니다. 항상 주거안정의 모범사례로 꼽히는데요. 싱가포르 주택정책은 뭐가 그렇게 대단한걸까요? 가상의 싱가포르 청년, 아서의 일생을 따라가봤습니다.

“내 집은 기본값” 싱가포르 청년의 부동산 인생 설계

싱가포르는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주택복지국가로 꼽힙니다. 2024년 기준으로 자가보유율이 90%를 찍었죠. 내 집 마련이 꿈이 아니라 그냥 현실인 곳입니다. 싱가포르 시민 아서는 30살을 맞아 결혼과 독립을 계획합니다. 이제 집이 필요해졌네요. 뭐부터 할까요?

제일 처음 할 일은 연간 4번 나오는 BTO 공고를 보고 아파트를 청약하는 겁니다. 일종의 아파트 공동구매 같은 겁니다. HDB는 주문을 쌓아서 아파트를 짓게 되죠. 신청서를 제출한 다음 기다리면 계약을 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습니다.

계약을 하러 가기 전에 할 일이 하나 있죠. 우리나라의 LH 격인, HDB에 신청해서 HDB 대출 적격성 서한을 받아가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구입자금보증같은거라 보면 됩니다.

드디어 계약서를 쓸 날입니다. 구입자금 문제를 정리해볼까요. 일단 90%는 HDB에서 주택대출을 받습니다. 계약금은 10%인데, 일단 5%만 내도 됩니다. 그런데 사실, 계약금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CPF라고 국민연금 비슷한게 있는데, 아서 계좌의 OA 저축액에서 그냥 충당이 됩니다.

계약으로부터 5년 후. 아파트가 완공됐습니다. 남은 계약금도 CPF로 납부하고 입주합니다. 원리금은 지금부터 갚아 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 원리금도 CPF 계좌에서 나갑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 집을 사고 입주를 했다고 당장 내 소비를 줄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아이도 낳고 신혼생활을 즐기다보니 입주로부터 5년이 지났습니다. 의무거주기간(MOP)을 다 채웠으니 슬슬 상향이동을 할 때입니다. 아서 부부는 집을 시장에 팝니다.

토지국유제라서 99년 임대? 그게 중요합니까? 애초에 HDB가 재건축을 하면 근거리의 다른 아파트나 새 아파트에 또 99년 임대기간이 나옵니다. 토지임대료는 이미 분양가에 녹여놨습니다. 사용권이 사실상 영구적입니다. 수익만 못한다 뿐 사실상 소유권이죠.

집을 팔고 나면 돈이 생깁니다. 근데 여기서, 처음에 집을 살 때 쓴 원금과 이자는 CPF OA계좌에 다시 넣습니다. 그래도 상당한 차액이 부부에게 남죠. 이 남은 돈에 보태서 좀 더 크고 좋은 HDB 재매각 주택을 살 수도 있고, 소득이 너무 많아져서 HDB를 못 산다면 EC(Executive Condominium)같은 중상류층을 위한 공공지원 민간주택이나 민간콘도 같은 고급주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살다보니 아서 부부도 노년이 됐습니다. 자녀는 모두 장성했고 부부만 남았죠. 아서에게는 몇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던 HDB 아파트에 살고싶다면 ‘리스바이백’을 하면 됩니다. 남은 리스기간 일부를 HDB에다 판매하고 현금흐름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다운사이징을 하면 더 좋죠. 작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면 HDB에서 최대 3만 달러 보너스가 나옵니다. 노년기 현금흐름이 크게 개선됩니다.

아서는 평생 여러가지 걱정을 하겠지만 적어도 집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고 살다가 이승을 떠납니다. 반면 한강의 기적, 대한민국의 청년 춘식의 일생은 훨씬 간단한 편입니다.

춘식은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내게 가능한 최상급지에 아파트를 삽니다. 조상님이 가호하면 분양을 받을 수도 있죠. 뭐가 됐든 이후로는 죽을만큼 허리띠를 졸라매서 수십년간 원리금을 갚아나가게 됩니다.

이 아파트라는 자산 하나에 평생을 녹입니다. 그래서 집값이 오르지 않으면 상향이동이 안되죠. 집값이 떨어지면 노후조차 위험해집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운도 좋았던 춘식은 결국 강남에 입성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근데 은퇴를 해서 소득이 없으니 현금흐름에 문제가 생깁니다. 다운사이징이나 이사는 꿈도 못 꿉니다. 다 늙어서 어딜갑니까 여기가 내 집인데. 그렇게 부족한 생활비로 살던 춘식은 자녀에게 아파트를 물려주고 저승으로 떠납니다.

99년 임대, 사실상 영구 소유… 토지국유제 위에 놓인 안정

한국과 싱가포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은 민간에서 공급을 주도합니다. LH는 땅을 수용해서 택지로 만들고, 이걸 민간에 팔아서 수익을 냅니다. 이 수익으로 임대주택을 운영하는겁니다. 분양주택의 공급시점을 결정하는 건 땅을 쥔 민간 시행사입니다. 분양가도 시장가로 결정됩니다.

반면 싱가포르는 국토 90%가 국유지입니다. 계획·건설·공급·관리부터 재건축까지 공공주택생애주기 전부를 HDB가 맡습니다. 시장가가 아니라 정책가로 분양가를 정하고, 정부에서 아예 보조금까지 지급합니다. 엄격하게 1주택 정책을 유지하면서 아파트가 필요한 사람들을 모은 다음에(BTO) 공급을 결정하니 공급 미스매치도 없습니다.

싱가포르 당국이 주택시장에 이렇게까지 개입하는 배경에는 권위주의 집권자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총리는 모든 국민이 집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했죠. 낭만적이고 인간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독립 당시 싱가포르는 잡탕 그 자체였죠. 중국, 말레이, 인도계가 모여있는데, 섞이지는 않는 골치아픈 상황이었습니다.

리콴유는 국민을 하나로 묶어내려면 실질적인 지분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땅 위에 자기 집과 재산이 있어야만 국가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도 생긴다는거죠. 이걸 강제적으로 끌고간 다른 축이 싱가포르의 강력한 CPF시스템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강제로 자산을 축적하게 만들어서 탄탄한 중산층을 만들어 낸 겁니다.

한국엔 없는 세 가지 전제조건 ‘CPF·국유지·HDB’

그럼 싱가포르 공공주택 시스템을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싱가포르 공공주택 시스템은 ① CPF연계 금융으로 재원을 마련해서 ② 국유화 된 저렴한 토지 위에 ③ 강력한 단일 주체(HDB)가 공급을 책임지고 ④ 빈틈은 사회적 합의로 메운 시스템입니다.

근데 당장 LH를 HDB처럼 강력한 공급자로 만든다 하더라도 나머지 조건을 달성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① 일단 CPF 금융부터 강한 저항이 예상됩니다. 싱가포르 국민은 월급의 37%를 적립합니다. 그 중에 17%는 고용주가 내 준다지만, 가처분소득의 20%를 묶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얘기를 꺼내면 바로 반발이 터지겠죠. 13%씩 그냥 나라에 바치는 국민연금이랑 달리 사실상 강제저축이라 다 내돈이긴 한데, 37%라는 숫자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라서 애초에 설명부터 쉽지가 않을 겁니다.

② 저렴한 토지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싱가포르는 국토의 90%가 국유지고, 집을 사고 팔때도 리스가 기본입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파트를 분양할 때 땅이 빠지면 얘기가 안됩니다. 토지임대부 주택은 여전히 실험적입니다.

기껏 공공이 땅을 수용해서 개발해도 아파트를 분양하면 그 땅이 민간으로 또 떠납니다 .땅값은 계속 오르기만 하고, 공공은 이것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③ 사회적 합의도 쉽지 않겠죠. 공공주택의 대전환을 국가에서 밀어붙인다고 치겠습니다.토지임대부에 제일 저항이 큰 토지임대료도 싱가포르처럼 분양가에 녹여서 반값아파트를 정착시켰다고 해보겠습니다. 근데 그러고 나면, LH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HDB는 어마어마한 적자를 내고 있습니다. HDB의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에만 67억 7,500만 싱가포르달러가 순손실 났죠. 대충 환율이 1090원이라고치면 서울만한 범위에서 연간 7조 4천억 원씩 손실이 나는 셈입니다.

싱가포르는 그래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주거는 나라가 책임진다는 합의가 돼 있기 때문에 정부지출로 손실을 때워도 별 불만이 없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독재국가이기도 하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런 손실을 내는 기관을 정부 세금으로 유지하는 게 가능할까요? 정치공세, 민영화 압박을 피할 수 있을까요?

‘한국판 HDB’ 실험, 정부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정부는 대놓고 말은 안해도 싱가포르 모델에 관심이 있어보입니다. 7월에는 LH가 관련 리포트를 내고 선관위도 뜬금없이 관련 영상을 올렸죠. 당장 우리나라에 적용하긴 힘들지만, 적어도 공공이 보유한 땅만큼은 저렴하게 공공주택을 공급해보자는 취지겠죠.

HDB 공공주택도 완벽하지는 않고, 주거품질에 대한 지적도 항상 나온다고 합니다만 당연히 무주택자보다는 1주택자가 나으니 응원을 받아 마땅한 도전이긴 합니다. 정부의 도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