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인의 템포·카리의 높이·양효진의 디테일, 1위로 올라선 현대건설

수원체육관의 공기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던 밤이었다. 시즌 전 ‘우승 후보 2강’ 중 하나로 꼽힌 IBK기업은행은 현대건설을 상대로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스코어는 0대3. 세트마다 20점 고개를 간신히 넘기거나 목전에 두고 멈춰 섰고, 흐름을 잡아도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패배보다 더 아팠던 건 내용이었다. 현대건설이 경기 전 세운 가설과 준비가 어떻게 실전에서 작동하는지, 반대로 기업은행이 왜 그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코트는 가차없이 보여줬다. 현대건설은 초반부터 서브 타깃을 육서영과 킨켈라 쪽으로 집중시켰다. 임명옥을 철저히 피하면서 리시브 라인의 균형을 깨뜨리자 세터가 잡을 수 있는 선택지는 눈에 띄게 줄었다. 1세트 중반까진 팽팽했다. 그러나 서브 한두 개가 리시브 라인에 파문을 만들자 토스 높이와 위치가 흔들렸고, 그 순간 블로킹 라인이 제자리를 찾아 올라오며 길을 막았다. 공격력에 자신 있던 기업은행이지만, 흔들린 첫 단추를 끝내 바로잡지 못했다.

현대건설은 영리했다. 김다인은 템포를 빠르게 끌고 가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춰 기업은행 블로커의 발을 묶었다. 카리 가이스버거에게 볼을 몰아주다 싶으면, 양효진의 속공 한 방이 측면 수비의 시선을 안쪽으로 접어 넣었고, 그 다음엔 다시 카리의 백어택이나 정지윤의 퀵오픈이 뒤를 받쳤다. 김희진은 친정팀을 상대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중앙에서 이동 공격과 서브 에이스로 리듬을 바꾸는 ‘포인트 가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패턴이 1세트 막판, 2세트 중반, 3세트 재역전 구간에서 모두 같은 결말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현대건설은 ‘어디를 두드리면 무너지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같은 매듭을 경기 내내 반복해서 묶었다.

기업은행의 패인은 분명했다. 첫째, 리시브가 흔들리니 세터의 선택지가 가난해졌다. 박은서로 시작해 김하경, 최연진까지 돌려 쓴 ‘임기응변’은 당장의 불이 번지는 건 막았지만, 코트 위 여섯 명이 공유해야 할 리듬을 빼앗았다. 둘째, 사이드 라인의 수비 부담이 커진 만큼, 강점으로 삼아야 할 좌우 날개의 공격 효율이 떨어졌다. 빅토리아가 25점을 냈지만, 막판까지 부담을 떠안게 된 스트레이트 볼 분배는 팀 전술의 다양성을 갉아먹었다. 셋째, ‘에이스’ 이소영의 공백이 눈에 띄게 컸다. 이소영은 한 명 이상의 역할을 묵묵히 분담해온 선수였다. 리시브의 첫 단추, 랠리의 길이 조절, 위기에서의 라인 브레이킹—all-around의 공백은 단순히 한 포지션의 결원이 아니다. 수술과 재활을 저울질하는 그의 어깨는, 현실적으로 ‘시즌 아웃’ 변수까지 상정해야 하는 무게다. 킨켈라의 발목 컨디션까지 완전치 않으니, 김호철 감독의 구상은 시즌 초반부터 전면 수정을 요구받는다.

그러면 무엇을 바꿔야 하나. 정답은 간단하지만 어렵다. 리시브 안정과 볼의 질 회복이다. 임명옥의 레인지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사이드 한 자리에 ‘받는’ 비중을 최대한 높여야 한다. 공격력 지수만 보고 ‘육켈라 조합’을 밀어붙이면, 상대는 계속 같은 서브 공략으로 꿰뚫을 것이다. 황민경 같은 베테랑의 수비 농도를 더하는 선택, 혹은 경기 초중반 특정 로테이션에서만 수비형 조합으로 ‘불 끄기’를 하는 운영이 필요하다. 또한 세터 운용은 결단이 필요하다. 여러 명을 돌려 쓰는 실험은 이미 충분히 했다. 블로커와의 호흡, 사이드와의 타점, 속공 타이밍을 감안해 ‘주전-백업’ 축을 명확히 잡고, 1~2경기 결과로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을 보여줄 때 공격수들의 감각도 올라온다. 무엇보다 ‘볼의 질’—네트를 넘는 공의 높이, 속도, 스핀을 통일해야 블로커의 타이밍을 상대로 던질 수 있다.

현대건설은 반대로 시즌 초반 계획을 치밀하게 이행 중이다. 페퍼저축은행에 셧아웃 패로 한 번 크게 흔들렸지만, 그 패배에서 건진 체크리스트를 바로 다음 경기에서 적용했다. 서브 라인에서의 타깃팅, 김다인의 템포 조절, 카리-양효진의 역할 분담이 매끄러웠고, 정지윤과 나현수, 자스티스까지 교체 자원의 ‘짧고 굵은’ 득점이 팀의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강성형 감독이 “1라운드 3승이 목표였다”고 말한 건 의미심장하다. 성급한 1위 유지보다, 무릎 관리를 요하는 주축들의 출전 시간과 강도를 조절하며 페이스를 잡겠다는 메시지다. 이 팀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평균’이다. 하루 잘하는 팀이 아니라, 매일 ‘적당히’ 이상으로 하는 팀. 그래서 정규리그를 통과하며 강해지는 팀이다.

다시 기업은행으로 돌아가 보자. ‘우승 후보’라는 타이틀은 부담이자 방패다. 초반 3연패에도 팀이 무너지지 않게 해 줄 최소한의 믿음은 이 스쿼드가 가진 잠재력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실전에서 작동하려면 기준선이 필요하다. 리시브 라인의 책임 구역을 재설계하고, 블로킹 라인의 우선순위를 손봐야 한다. 빅토리아-킨켈라 투빅 라인이 동시에 코트에선다면, 반대급부로 코트의 다른 두 포지션에서 ‘수비형 결정’이 따라와야 한다. 이 기본 방정식 없이는, 세터가 아무리 잘해도, 한 명의 공격수가 아무리 불태워도, 결국 같은 장면으로 돌아온다. 김호철 감독의 “계속 끌려간다”는 말은 그래서 무섭다. 끌려가는 팀은 매 포인트 선택지가 줄어드는 팀이다. 반대로 끌고 가는 팀은 같은 패턴을 세 번, 네 번 반복해도 마지막에 다른 카드를 꺼낼 수 있는 팀이다.

이날 스코어는 25-20, 25-20, 25-23. 단단했고, 효율적이었고, 예고된 결말이었다. 현대건설은 빈틈을 알고 있었고, 기업은행은 그 빈틈을 메우는 과정을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 시즌은 길다. 그러나 초반 5경기에서 드러난 문제는 대체로 시즌 내내 형태만 달리해 재발한다. 기업은행이 ‘우승 후보’로 남을지, ‘이름값뿐인 후보’로 기록될지는 앞으로 2주, 정확히 서너 경기 안에 결정될 것이다. 리시브를 세우고, 세터를 고르고, 조합을 정리해라. 그 다음에야 비로소 빅토리아의 25점은 팀을 이기는 25점이 된다. 그리고 현대건설은 1라운드 목표를 이뤘다. 이제 목표는 더 크지만, 오늘의 방식—상대를 분석하고, 공략하고, 흔들리면 다시 묶는 그 방식—을 잊지 않으면 된다. 이 리그의 상위권은 계산이 빠른 팀에게 웃는다. 오늘 밤, 계산은 수원 벤치에서 더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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