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후 K방산의 황금기가 열렸습니다.
특히 유럽 시장은 폴란드를 필두로 한국산 무기의 성능과 가격 경쟁력을 인정하며 대규모 계약을 체결했죠.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8조 원 규모의 폴란드 잠수함 사업에서 한화오션이 스웨덴에 밀린 데 이어, 5조 원대 루마니아 장갑차 사업에서도 독일에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8조 원 폴란드 잠수함, 스웨덴이 가져가다
지난달 말 발표된 폴란드 오르카 프로젝트 결과는 방산업계에 충격이었습니다.
8조 원 규모의 신형 잠수함 도입 사업에서 한화오션이 스웨덴 사브에 패배한 것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한화오션의 승리를 예상했던 터라 이번 결과는 더욱 의외였죠.

현지 분석에 따르면 폴란드는 단순히 성능과 가격만 본 게 아니라 '정치·군사적으로 안정적인 파트너'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폴란드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려면 발트해에서 작전을 수행할 잠수함이 필요한데, 동일한 발트해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있는 스웨덴과 협력하는 게 전략적으로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죠.
여기에 스웨덴은 영국의 지지를 받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 카드까지 꺼내들었습니다.
EU 자금의 함정, 65% 역내 조달 규정
폴란드의 선택을 이해하려면 돈의 출처를 봐야 합니다.
이번 잠수함 구입 자금은 유럽연합(EU) 19개국이 공동으로 마련한 257조 원 규모의 유럽안보조치(SAFE) 기금에서 나옵니다.
폴란드는 이 기금에서 19개국 중 가장 많은 75조 원을 배정받았습니다.

문제는 이 기금을 사용하는 조건입니다. 부품의 65% 이상을 반드시 유럽 내에서 조달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죠.
한국 업체가 이 조건을 충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EU 자금으로 유럽 밖 국가의 무기를 사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부담입니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유사시 NATO의 도움이 절실한 폴란드로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산업연구원 심순형 연구원은 "한국의 높은 가격 경쟁력과 빠른 납기 조건에도 불구하고 수주에 실패한 것은 유럽의 역내 결속이 주 원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루마니아 장갑차 사업도 빨간불
폴란드 사례가 단순한 예외로 끝날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5조 원 규모의 루마니아 장갑차 사업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레드백과 독일 라인메탈의 KF41 링스가 경쟁하고 있는 이 사업에서 말이죠.

자주국방네트워크 이일우 사무국장은 "지난달 블룸버그에서 루마니아가 레드백이 아닌 독일 라인메탈의 KF41 링스와 계약을 체결했다는 보도가 나왔다"며,
"일주일 뒤 루마니아 정부가 부인하긴 했어도 재무장을 계획하고 있는 동유럽 국가들이 EU 내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독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실제로 2023년 노르웨이는 독일과의 관계 강화를 명분으로 K2 전차 대신 독일 레오파르트 전차를 선택한 전례도 있습니다.
60조 원 캐나다 잠수함도 위태로워
상황은 유럽을 넘어 북미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60조 원 규모의 캐나다 잠수함 사업에서도 경고등이 켜졌습니다.
한화오션은 이 사업에서 독일의 티센크루프 마린시스템즈(TKMS)와 경쟁하고 있는데, 최근 캐나다가 비유럽 국가 최초로 SAFE 기금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면서 분위기가 묘해졌습니다.

캐나다의 SAFE 기금 참여는 독일 TKMS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캐나다와 독일이 북극해를 동일한 작전 지역으로 삼고 있다는 점도 폴란드-스웨덴 사례와 유사합니다.
지리적·전략적 공통분모가 무기 구매 결정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죠.
작전 환경에 맞는 맞춤형 전략 부족
전문가들은 K방산의 패배 원인이 단순히 정치적 요소만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국방안보포럼 엄효식 사무총장은 "폴란드 잠수함 사업 실패는 정치적 요소 외에도 발트해의 낮은 수심, 복잡한 해저 지형, 스텔스 기능이 필수적인 감시·정찰 임무 등 폴란드의 작전 환경과 요구 조건에 사브의 잠수함이 더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난해 호주 호위함 사업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국 업체가 호주의 요구도를 충족하지 못했던 게 탈락 원인으로 지목됐죠.
엄 사무총장은 "더 이상은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며 도입국의 구체적 요구 조건에 더욱 충실한 맞춤형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K방산의 한계...
유럽 시장은 단순히 무기의 성능과 가격만으로 승부가 나지 않습니다. 정치적 고려, 동맹 관계, 작전 환경의 적합성, EU 내부 결속 등 복잡한 변수들이 얽혀 있죠. 이런 상황에서 개별 기업이 독자적으로 대응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엄 사무총장은 "정부는 유럽의 결속을 뚫어내는 동시에 수출시장을 다변화하기 위한 정책적·외교적 전략을 촘촘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특수로 급성장한 K방산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유럽 시장에서의 연이은 고배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의 신호일 수 있습니다.
이제 K방산은 가격과 납기라는 강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더욱 정교한 전략으로 글로벌 시장에 접근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