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복과 손잡고, 세계의 미술관으로]
밀라노 산타마리아 성당
서양 미술사 최고의 걸작이라고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그 중에서도 『최후의 만찬』은 그려졌을 당대부터 심각하게 훼손되기 시작한 안타까운 작품입니다. 오늘은 밀라노로 함께 가서 『최후의 만찬』을 만나볼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 밀라노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있습니다. 이 성당은 도미니크 수도회에 의해 1463년 공사가 시작되어 1487년에 완공되었는데요. 건축가 귀니포르테 솔라니(Guiniforte Solari, 1429-1481)의 설계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첨두 아치를 비롯,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에 의해 완공되자마자 개축공사가 진행됩니다. 결과적으로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은 고딕적인 요소와 르네상스적인 특징들이 섞인 혼합 양식을 띠게 됩니다.
개축 공사의 백미는 둥근 돔인데요. 이 당시 밀라노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 1452-1508)가 1492년에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에게 의뢰했고, 1497년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은 정확히 말하면 이 성당의 수도사들이 식사하던 식당의 벽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을 보려면 성당 왼쪽에 있는 별도의 입구로 들어가야 하는데, 작품을 만나러 들어가는 관람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그림이 있는 곳까지 멀지는 않지만 걸어가는 동안 '최고의 뇌섹남' 레오나르도를 떠올려봅니다.
사생아로 태어난 인류의 스승
다빈치는 여러가지 점에서 경계인(境界人)이었습니다. 우선 그의 출생인데요. 유명한 공증인이었던 아버지와 가난한 농부였던 어머니와의 사이에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피에로는 아들을 평생 아끼고 도와주면서도 끝내 적자(嫡子)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빈치는 일생 내내 어쩔 수 없는 열등감과 신분적 제약을 온 몸으로 느끼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20대 초반 동성애와 관련된 추문에 휩싸인 후 이로 인한 트라우마와 소문으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살라이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가까이 두며 남녀양성성에 대한 취향을 나타내는 노트들도 많이 남겼습니다. 일례로 살라이는 『세례자 요한』의 모델이었을 뿐아니라 최근 연구에서는 『모나리자』도 그를 모델로 그린 것이라는 가설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술가라면 완성작을 주문자에게 넘겨주어야 하는데 다빈치는 작업을 끝내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완성한 작품이 15여점 밖에 되지 않아요.
그 어떤 종류의 살상도 견디지 못해 채식주의자가 되었던 다빈치가 대량살상무기를 많이 구상했다는 것도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무기를 구상한 것에 대한 괴로움 때문인지 “나는 아버지보다 먼저 태어났다. 지구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인간들을 죽인 다음 엄마 뱃속으로 돌아갔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노트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없었던 태생적 한계와 취향, 성격적 특성 덕분에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천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증인이 될 수 없었고 귀족이나 중산층 자제들이라면 누구나 다니는 라틴어 학교도 들어가지 못했죠. 그 덕분에 어린 나이에 고전을 읽으며 지식으로 머리를 채우지 않고 들판을 하루 종일 뛰어다니며 새, 곤충, 강물, 구름, 암석 등을 관찰하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다빈치는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마흔 무렵이라는 늦은 나이에 독학으로 라틴어를 공부하며 고전의 세계에 입문했죠. 정리해보면 관찰력, 상상력, 탐구심, 완벽주의가 그를 이해하는 키워드일 것입니다.
완벽주의자 다빈치, 미완성이 많은 이유
다빈치가 작업속도가 느리고 관심분야가 너무 많아 작품을 끝내지 못한 것을 두고 흔히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산만한 탓’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작품을 미완성으로 둘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떤 여인을 아름답게, 그럴 듯하게 그리는 화가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나리자』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눈동자, 뒷배경의 흐르는 강물, 태초의 풍경인 듯한 원경의 암석을 그리기 위해, 그림 그리는 데 소요되는 시간의 몇 십 배 이상을 광학, 수력학, 암석학의 연구에 바쳤던 화가는 없었습니다. 인간이 미소를 지을 때는 어떤 근육을 쓰는지, 그 근육을 쓰게 하는 신경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미묘한 심리상태에서 나오는 ‘미소’를 그릴 수 없기 때문에 다빈치는 시체를 해부하며 그 근원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완벽주의에서 몇 년을 두고 작품을 계속 손질했고 많은 경우에는 작품을 미완성으로 둘 수밖에 없었던 거죠.
최후의 만찬, 어떻게 그려졌을까
피렌체 출신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어떻게 『최후의 만찬』(1495-1498: 2년 9개월간)을 그리게 되었을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당대 피렌체의 실권자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추천으로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후원을 받게 되어 서른 살이던 1482년부터 1499년까지 17년을 밀라노에서 지냅니다. 브라만테가 한창 성당의 개축 작업에 매달리고 있을 무렵,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에게 『최후의 만찬』을 그려줄 것을 주문합니다. 당시 피렌체의 수도원 식당에는 『최후의 만찬』이 자주 그려졌는데, 일용할 양식을 먹는 수도사와 사제들에게 성찬예식의 뜻을 새기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 12명의 제자와 마지막으로 성찬을 드는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날은 마침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인데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끝내고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1절에 따르면 열두 제자와 함께 유월절 음식을 나눠먹는 중에 예수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놀라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당혹해하는 걸로 봐서 예수가 막 말을 하고 난 직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배신자는 어떻게 그려졌을까요?
열두 제자의 한 가운데 앉은 예수는 오른손을 접시쪽으로 내밀고 있는데요. 예수의 오른편에 어둠 속에 잠긴 인물이 보이시죠? 모든 제자들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데 이 인물은 무심결에 왼손을 접시 쪽으로 뻗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제자들이 놀라며 대체 배신자가 누구냐고 여쭙자,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마태복음 26장 23절)라고 예수가 답한 것을 다빈치가 그대로 그린 것입니다. 왼손을 접시 쪽으로 뻗으면서 오른손에는 뭔가를 들고 있는데요. 바로 예수를 팔아 넘기기로 하고 받은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예수를 배반하는 유다입니다.
배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다음 예수는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며 자신의 몸이라 하고 잔을 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찬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사들과 사제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은 예수가 열두 제자와 나눈 ‘최후의 만찬’을 되새기면서 예수의 몸과 피를 받아들이는 성스럽고 상징적인 행위가 되는 겁니다.

다른 화가들은 어떻게 그렸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이드의 안내로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마당을 지나 작품이 있는 건물로 들어서면 방이나 그림의 크기에 우선 놀라게 됩니다. 건물은 길이가 16m, 폭이 9m로 꽤 큽니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북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가로 8.8m, 세로 4.6m의 작품이 워낙 커서 관람객을 압도합니다.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입구로 들어서면 실제 건물의 벽면과 그림 속 벽면이 일치하는 것처럼 보여 실내공간은 실제보다 훨씬 더 커보입니다.
다빈치 이전에 조토나 프라 안젤리코도 『최후의 만찬』을 그렸지만 가로 세로 2m에서 2m50cm 정도의 크기입니다. 이렇게 작게 그려지던 『최후의 만찬』이 15세기, 16세기에 수도원의 식당 벽에 즐겨 그려지면서 그림 크기가 커졌습니다. 다빈치보다 먼저 카스타뇨와 페루지노, 기를란다요가 비슷한 크기로 그리긴 했지만 그림은 상당히 다릅니다. 다빈치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인물의 배치와 표현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세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카스타뇨, 페루지노, 기를란다요는 유다를 제외한 모든 인물을 식탁에 정면으로 배치합니다. 세 화가가 모두 사도 요한을 충격과 슬픔으로 예수 쪽으로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그렸는데요. 요한을 제외한 모든 인물은 손짓과 시선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자기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방금 예수가 한 말을 듣고 놀랐다고 하기에는 근엄하고 침착해보이기까지 합니다. 혼자만 따로 유다가 앉아 있는 것은 그 이전의 다른 화가들도 자주 보여주던 배치인데요. 유다를 분명히 알아보게 하기 위한 의도이긴 하지만 자연스러워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빈치는 열세 명을 모두 일렬로 앉힙니다. 대담하게 유다를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린 거죠. 게다가 한 사람씩 따로 앉아 있게 하지 않고 예수를 가운데 두고 세 사람씩 네 그룹으로 배치했습니다. 각자의 성격에 따라 예수의 말을 듣고 보이는 반응도 제각각입니다. 열 세 명이 식사를 하면서 모두가 일렬로 앉아 있는 것도 자연스럽지는 않은데요. 예수와 제자들의 극적인 반응이 그림을 보는 관람자에게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누구인지를 정확히 표현하라
제자들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는 듯 과장되어 보이는 표정과 손짓을 하고 있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생생합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제자들은 깜짝 놀라며 예수에게 “저는 아니지요?”라고 묻고, 요한복음에 따르면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윈저궁에 소장된 『최후의 만찬』을 위한 준비 데생 중 유다를 나타내는 데생에 다빈치는 이렇게 메모를 해놓았습니다. “인물을 그릴 때 그 인물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는지를 생각하라.”라고.
도메니코 로렌차(『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심판』)에 따르면 다빈치는 언제나 인물의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인지, 그 순간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예수의 오른쪽에 있는 사도 요한과 베드로를 비교하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빈치는 흔히 성인을 그리는 방식대로 사도 요한은 부드럽고 고요히 성찰하는 인물로, 베드로는 화를 잘 내는 급한 성정의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급한 성격은 왼손으로는 요한을 흔들면서 ‘도대체 배반자가 누구인지 그리스도는 아시느냐’고 묻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칼을 감추고 있는 데서 드러납니다. ②편으로 이어짐
※ 정연복 미술평론가는 서울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현재 중앙대에서 예술사 강의를 한다. 사조의 이해나 단순지식보다는 직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이해에 관심이 많다. 삶에서 예술이 나오고 예술이 곧 삶이 된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만큼 느끼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림과 미술관에 관한 글을 쓰고 강연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