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49) 진평왕의 수난

신라 26대 진평왕은 미실과 노리부의 연합으로 의도치 않게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할아버지 진흥왕이 정복군주로 나서 영토를 크게 확장한 영향으로 땅을 빼앗겼던 고구려와 백제 등으로부터 영토를 회복하려는 끊임없는 침략에 물고 물리는 전쟁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진평왕은 진흥왕의 정책에 이어 불교 진흥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백정이라는 왕의 이름과 백반, 국반 등의 형제들도 석가의 가족들과 같은 이름을 쓴 것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화전설: 진평왕 옥대와 신궁의 계단
삼국유사는 진평왕에 대해 옥대와 신궁의 계단 이야기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제26대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이며 성은 김씨이다. 태건 11년 기해(579) 8월에 왕위에 올랐다. 키가 11자였다(현재 추정하면 3.3m 정도).
내제석궁(다른 이름은 천주사. 진평왕이 창건한 것이다.)에 행차했을 때 섬돌을 밟으니 돌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주위의 신하들에게 "이 돌을 치우지 말고 뒤에 오는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고 말했다. 바로 이 돌이 성안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다섯 개의 돌 중 하나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첫해에 천사가 궁전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하기를 "상황께서 내게 명하여 옥대를 전해주라고 했습니다"라 하니 왕이 친히 무릎을 꿇고 그것을 받았다. 이러고 난 후에 그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왕은 그 후 교외에서나 종묘에서 큰 제사를 지낼 때는 이 옥대를 둘렀다.
고려 왕건이 신라를 치려고 모의하면서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라고 물었다. 신하들이 황룡사 장육존상이 첫째이고, 그 절에 있는 9층탑이 둘째며,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째라고 보고하자 왕은 곧 신라 침략계획을 중지했다.

◆흔적: 명활산성
명활산성은 경주 보문단지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다. 해발 252m의 북쪽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둘레 4.5㎞ 길이의 포곡식 석성과 남쪽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토성으로 조성돼 있다. 사적 제 47호이다.
최근 북문지와 1~3발굴지에 복원정비사업이 진행되어 일부 성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특히 북쪽과 동쪽 성벽이 있었던 곳에는 거칠게 다듬어 쌓았을 것으로 보이는 활석들이 많이 남아있어 복원하기에도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다.
성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어도 2시간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정도로 성의 규모는 제법 길고 짜임새가 있으며, 내부에 물을 저장했을 것으로 보이는 저수용 수조와 건물터가 발견됐다.

삼국유사에 신라 육부촌 가운에 금산 가리촌의 촌장 지타공이 하늘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신성시 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명활성은 동해에서 침략해 오는 왜병에 대비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월성의 최후 보루였다. 왜병과 자주 격전을 벌인 곳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실성왕 4년인 45년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해 왔다는 기록도 있다.
명활성은 자비왕과 소지왕 당시 13년간 월성을 수리하기 위해 왕궁으로 활용됐다. 551년 이전에 토성에다 석성을 쌓은 기록이 있고, 최근 명활성작성비가 발견되면서 성에 대한 내역과 당시 문화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신라가 태동하고 오래지 않아 초기부터 토성을 쌓고, 석성을 축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진흥왕과 진평왕 당시에 다시 증개축한 기록이 있다. 또 현재 경주보문단지 보문호 서북쪽으로 거대한 크기의 돌로 쌓은 성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어 명활성의 규모는 더욱 거대하게 쌓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에 맞서 싸워야 하는 입장에서 왜적들의 침투에 대비해야 하는 진평왕의 고민은 남산신성과 명활산성의 축성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스토리텔링: 끝없는 전쟁
진평왕은 할아버지 진흥왕이 정복군주로 나서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영토를 크게 확장한 영향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빼앗겼던 땅을 찾기 위해 도발해 오는 전쟁과 왜구들의 공격에 맞서 항상 긴장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진평왕은 방어정책으로 직속부대를 창설해 왕권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려고 했다. 583년에 서당을 설치했고, 625년에는 낭당을 설치해 주요한 업무를 분산해 처리했다. 서당과 낭당은 뒷날 9서당의 녹금서당과 자금서당으로 발전했다. 이 밖에 사천당, 군사당, 급당 등의 군사조직도 새로 만들며 군사력 보강에 힘을 쏟았다.
602년 백제의 무왕이 모산성이라 불리는 아막성을 공격해 오자 진평왕은 수천 명의 기병을 보내 이를 물리쳤다. 진평왕은 소타·외석·천산·옹잠에 4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변경을 공략했고, 이를 공격해 온 백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608년에는 고구려에게 우명산성을, 611년 백제에게 가잠성을 빼앗겼다. 백제는 616년 다시 아막성을 공격해오기도 했다. 618년 진평왕은 북한산주의 군주인 변품을 앞세워 가잠성을 공격해 이를 탈환했다.
진평왕이 고구려의 잦은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원광법사에게 수나라의 지원병을 청하는 글을 쓰라고 명했다. 이에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멸하게 하는 일은 승려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소인은 대왕의 땅에 살고 있으니 명령을 따르겠습니다"라며 걸사표를 지었다. 왕은 걸사표를 수나라에 보내 글을 읽은 수나라 양제가 허락하여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가잠성을 빼앗는 성과를 올렸다.
백제는 623년에 신라의 늑노현을 기습했고, 624년에도 신라의 속함·앵잠·기잠·봉잠·기현·혈책 등 6개의 성을 공격해 3개의 성을 점령했다. 626년에는 성주 동소를 죽이고 주재성을 장악했다. 627년에 또 사걸(沙乞)이 이끄는 백제군이 서쪽 변경의 두 성을 점령하고 3백여 명의 신라 백성을 붙잡아 가기도 했다.
당시 백제 무왕은 웅진으로 병력을 모아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으나, 진평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하자 공격을 중단했다.
628년 백제가 다시 가잠성을 포위하고 공격해 왔으나 진평왕은 군대를 보내 이를 물리쳤다. 629년에는 김용춘을 대장군으로 삼아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이처럼 백제, 고구려와의 분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진평왕은 591년 남산성을 쌓고, 593년에는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고쳐 쌓는 등 국방 체제를 정비했다. 그리고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해 고립을 피하고 고구려를 압박하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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