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웅구 교수] 왜 죽은 권력자를 두려워할까?

[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죽은 제갈량의 힘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하는' 힘을 갖기도 한다. 삼국지연의에 “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의 일화가 있다. 공명이 죽은 뒤 시신을 가마에 태워서 진중을 순찰하니, 이를 정탐하던 사마중달이 공명이 살아 돌아왔다며 혼비백산 도망갔다는 이야기다. 이 일화는 지배하던 자는 이미 힘을 잃었는데, 지배받던 자는 여전히 그를 무서워해서 주눅 드는 형국을 빗댈 때 인용된다. 제갈량(공명)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보다는 사마의(중달)처럼 겁 많고 멍청한 사람을 조롱하는 경우에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도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힘에 압도당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자아가 취약한 사람들이 그렇게 된다.

죽은 권력자의 힘

우여곡절 끝에 윤석열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는 정치적으로 죽었다. 이제 그는 아무런 힘이 없는 일반 시민, 그보다 못해서 실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은 중범죄 피의자에 불과하다. 그는 제갈량이 아니었지만, 살아있을 때(집권 중)에는 적이 아닌 자기 수하들을 두려워 떨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쫓겨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그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소속 정당은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헌법 파괴자인 그를 내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가 그 정당에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정황 증거들이 곳곳에 보인다. 예컨대 그 정당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 그의 복제품을 자기네 대통령 후보로 삼으려 했다. 정황증거를 넘어서 대놓고 그의 범죄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당내에 있다.

그렇다고 그 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을 부정하면서 아직도 윤이 대통령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주장은 길거리에서 “윤 어게인” 하는 사람들이 하는데, 그냥 광대짓이라고 웃어 넘겨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세력이 아직도 죽은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것을 보면 도대체 왜? 라는 생각이 든다.

'윤 어게인'에 기대어 후보자격을 상납받으려돈 한덕수 전총리(왼쪽)와 '배신자'란 소리까지 들었던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 사진= 연합뉴스

왜 두려워할까?

단순한 계산으로는 그것이 표(票)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네 세력이 기댈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은 '윤어게인'을 외치는 아스팔트 위 군중들로 한정된다는 현실적인 자각이다. 그러나 양당제가 공고한 상황에서, 그 정당이 윤을 버린다고 해서 아스팔트 군중이 상대편 정당 쪽으로 돌아서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보수이면서 계엄은 반대했던 시민들은 윤석열 및 계엄 세력과 절연한다면 그 정당을 다시 지지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모르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도 윤석열을 끌어안고 그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것을 보면, 표 계산 이외의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터인데, 필자는 그 이유가 윤석열에 대한 “두려움”이라 생각한다.

이 두려움은 윤석열이 다시 살아 돌아와서 집권할 가능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헌재의 판결은 최종적이고, 우리 국민들에게 더 이상 쿠데타가 통하지 않음은 이미 증명되었다. 그러니 더 이상하다. 사마의가 제갈량을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살아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윤 수하들은 윤이 절명하였음을 알면서도 두려워한다.

최근 대법원의 판결이나 검찰의 미적거리는 태도 등을 보면 윤 추종세력 중 아직 힘을 가진 자들이 제법 남아있음도 사실이지만, 이들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거대 정당을 구성한 정치 세력이 이들 때문에 윤을 두려워하는 것이라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아직도 윤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절대자 양아버지

정신과의사인 필자는 가족 내에서 아동의 발달에 빗대어 봄으로써 이 문제를 이해하려 시도한다. 정치 조직 내에서의 행동 양식과 가족 내에서의 행동 양식은 비슷한 정신역동적 기반을 갖는다는 가설아래 논의한다.

이 가정(정당)은 고만고만한 아동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불우한 가정사를 겪어서인지 부모(지도자)가 없다. 부모가 없다 보니 제대로 보고 배운 것도 없고, 집안의 가풍도 없고, 가족의 정체성(identity) 또한 없다. “우리 가족은 무엇이다”라고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이 가정의 아동들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부모의 역할을 할 롤 모델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이 가정에 양부(養父)로 영입된 사람이 바로 윤석열이었다. 그는 가부장의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 정당에 심으려 하였다. 아무 것도 없는 백지(tabula rasa)상태였던 양자녀들에게 그의 황당한 이념들은 아무런 제지없이 먹혀들어갔다.

그렇게 극우의 정체성이 이 정당에 이식되었다. 양부의 상(像)이 자녀들에게 내재화된 것이다. 양자녀 중 정체성이 강력하게 심어진 자[= 양부에게 절대 순종하는 자]는 양부의 칭찬을 듣고 형제들 사이에서 “핵관”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반면 양자녀 중에는 양부와는 다른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낸 소수도 있었는데, 양부는 “격노”해서 그런 불효자들을 축출해 버렸다.

부모로부터 독립적인 자아를 만드는 것이 청소년의 발달과제이고, 가족 체계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런 청소년들이 자라나서 다음 세대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이 발달과제를 제대로 수행하던 자녀들이 가정에서 쫓겨난 것이다. 남아있는 자녀들은 자아 없이 양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유아들로, 양부의 뜻을 거스르면 가정에서 쫓겨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 가정에는 학대와 학대에 대한 트라우마가 얽혀 있다.

구속 취소로 풀려난 직후의 윤석열 전대통령. '벌 주는 아버지상'의 역할로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병적인 초자아

정신역동적인 부모의 상(像)에는 자신이 따라 해야 할 롤 모델로서의 긍정적인 상뿐만 아니라 자신을 벌주는 폭력적 존재로서의 상도 있다. 남아있는 수하들이 죽은 윤에 대해 갖는 두려움은 여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내가 그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갑자기 튀어나와서 나를 혼낼 것만 같은 존재, “벌주는 아버지상”이 그들의 마음속에 내재화되어 있는 것이다. 아버지 상이 내재화되면 더 이상 아버지가 없어도 나는 그를 두려워하면서 그가 제시한 규칙을 따르게 된다. 정신분석 창시자 프로이트(S. Freud, 1856-1939)가 초자아(superego)라 부른 것이 바로 마음속에 내재화된 '벌주는 아버지상'이다.

초자아를 내재화하는 것은 정상 발달과정에서 누구나 통과해야 하는 과제다. 그럼으로써 그 사람은 사회 속에서 규칙을 지키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건강한 성인이 된다. 초자아가 내재화되지 않으면 사이코패스가 된다. 사이코패스는 규칙을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반면 자아를 압도하는 병적인 초자아는 신경증(neurosis)을 일으킨다. 신경증의 핵심은 불안인데, 그 불안의 정신역동적 근원은 아버지가 자신을 벌줄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 벌은 “거세(去勢)”로 상징된다(거세불안, castration anxiety). 신경증 환자는 내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 아버지가 나를 거세할 것이라는 병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물론 이런 정신과정은 본인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것이다]. 병적인 초자아가 만들어지는 중요한 원인은 어려서 '부모로부터 받은 학대'이다.

윤석열을 양아버지로 비유한다면, 국민의힘 권영세 전비대위원장과 권성동 원내대표는 양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자녀로 비유될 수 있다.사진= 연합뉴스

양아버지의 부활?

다시 이 가정을 돌이켜 보면, 자녀들이 정상적으로 발달하기 위해 가장을 영입해야 했던 사정을 수긍할 수는 있다. 자녀들은 건강한 자아가 형성될 것을 기대하면서 양부의 훈육아래 성장했는데, 불행하게도 양부는 크고 너그럽게 보듬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 벌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던 속 좁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가정 운영은 처벌과 학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아 형성을 하려던 자녀들은 쫓겨났고, 남아있는 미숙한 자녀들[실제로는 정치판에 상당 기간 서식하던 나이많은 성인들!]은 폭력적 아버지의 초자아를 내재화했다. 양부 생전에,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아 발달을 멈춘 채 순종해야 했다.

양부가 죽은 뒤에는 마음속 굳건히 자리잡은 징벌적 초자아가 이들이 두려움아래 행동하도록 만들고 있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조종을 받는 셈이다.

이 가정은 가장의 부재 속에서 가정의 운명과 관계된 중대한 문제를 겪게 되었다. 와중에 스스로 가장을 맡겠다고 나이든 자녀들 몇 명이 나섰지만, 이들이 가진 능력이란 죽은 양부의 유훈을 받드는 것일 뿐 문제를 해결할 리더십은 아니었다. 결국 이들이 찾은 해답은 외부에서 새 양아버지를 영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 양아버지로 데려오려던 사람 역시 자아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죽은 양아버지의 복제품이었다. 양아버지를 부활시키려는 시도인데, 취약한 자아가 폭력적 초자아의 협박을 받았으니 이들은 그렇게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도, 자녀들 중 “힘 없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그 시도를 좌절시켰다. 망자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희망적 움직임이 이 가정에서 싹트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몇 시간 뒤, 망자의 혼을 부르는 초혼제가 열렸는지 페이스북에 윤석열의 메시지가 등장했다. 그것을 보고 일반 시민들은 또 한판의 광대짓이 벌어졌다고 웃고 넘겼겠지만, 그 정당 지도부는 살아돌아온 양아버지가 미션에 실패한 자신들을 거세할까봐 벌벌 떨었을 것이다.


※ 강웅구는 1988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건강의학과 수련을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뇌의 유전자 발현 이상 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정신질환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대표저서로 <정신병리학 – 정신병리의 개념적 접근>(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