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봉건, 냉전, 독재의 어두운 유산들
법원 침탈 민주주의 훼손, 계엄군 막은 시민에 희망
박재욱 신라대 행정학과 교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박물관에나 들어가 있을 계엄의 나발을 불다가, 백주 대낮에 난데없이 과거의 유령 ‘백골단’이 버젓이 국회 한복판에서 출몰한다. 어렵게 일군 진시황의 진나라를 불과 15년 만에 붕괴시킨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를 무색하게 만들 만큼 내란이라는 범죄가 ‘구국의 결단’이라는 영웅적 행각으로 둔갑했다. 버젓이 사슴을 말이라고 떠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정말 이상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윤 대통령은 계엄을 통해 국정 최고 지도자의 통치권이라는 이름하에 ‘제왕적’ 권력을 뛰어넘는 초헌법적 권능을 행사했다. 전시 사변,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라는 계엄령 발효의 조건이나 명분에 가당치 않은 비상대권의 행사는 이 나라를 민주공화국이 아닌 조선시대 군주제로 되돌려 놓았다. 근대 시민사회를 우리 스스로 쟁취하지 못했기에 근대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착종된 우리의 봉건적 현실인가. 아직도 우리는 머리 안에 봉건 조선의 상투를 틀고 있는지 모른다.
종북 반국가세력은 누구인가. 세상이 냉전이라는 얼음판으로 얼어붙어 있던 지난 시절, 빨갱이는 우리의 적이고 원수였다. 해방 이후 이념이란 게 무언지 잘 헤아리지도 못하는 사이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되던 체제 하에서 꽉 막힌 이데올로기의 질곡에 빠져 동족 간 벌어진 살육의 참극과 그 후유증으로 반세기 동안 우린 참으로 많은 비극과 고통을 겪었다. 종북 반국가세력이 누구인지 특정하지도 못하면서 대통령이 종북이라 하면 종북이고, 반국가세력이라 하면 반국가세력이 될 수밖에 없는 바바리즘적인 야만의 시대가 펼쳐질 뻔 했다. 양분된 국민을 통합하고 적대적 민심을 다독여야 하는 대통령의 입은 국민을 편 가르고 서로를 적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이미 세계는 냉전 시대를 넘어선 지 오래건만, 우리 내부는 냉전의 울타리 속에 여전히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못난 구렁이의 모습일지 모른다.
과거 군사 쿠데타와 독재의 망령도 이제는 사라진 옛날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독재에 항거하던 대학생과 민주 시민을 탄압하던 고문 기술자들과 무도한 국가폭력의 꼭두각시들도 민주화의 도도한 흐름 속에 묻혀 사라지고 잊힌 존재로 여겨졌다. 근데 큰 착각이었다. 그때의 망령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을 뿐 망령을 일깨우는 굿판이라도 벌일 참이면 언제든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이번 내란 음모의 와중에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강단에서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을 가르쳤을 정치학 교수 출신의 국회의원은 백골단이라 부르는 망나니들을 국회 한복판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등장시켰다. 우리 속의 파시즘은 반세기 세월이 흘러도 길들여지지 않은 채 참으로 끈질기고 두렵다.
중세적 봉건 왕조 의식, 20세기적 냉전적 사고, 그리고 민주화 이전에 횡행하던 독재의 악몽들이 완전히 걷히지 않았지만 세상의 빛이 있어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꿈꾸어 본다. 12·3 계엄의 밤에 계엄군에 맞서 계엄 해제라는 천우신조의 기회를 만든 민주 시민, 지휘관의 국회 장악과 정치권 인사들의 체포 명령에 맞서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불복했던 젊은 군인들이 있어 우리는 희망을 거둘 수 없다.
여기다가 행정부의 전횡을 견제하는 의회 권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권력을 권력으로 견제하는 삼권분립의 기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제처럼 입법부와 행정부의 갈등과 다툼에서 견제와 균형을 맞추기 위한 ‘사법권 우위의 원칙’은 부인되어서도 무시되어서도 안 된다. 독재로 흐를 수 있는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도, 해산당할 여지가 없는 의회의 전제화도 사법부의 위헌·위법 심사권으로 제지하는 게 대통령제 민주 정치의 신통한 제도적 장치이다.
민주 정치는 이러한 사법부의 최고 권위를 방파제로 하여 대통령의 독주도 의회의 전횡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지난 21대 총선 이후 부정선거 관련 소송 126건이 제기되었고, 대다수가 사전투표지 위조 및 개표 조작 등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대법원이 받아들인 사례는 단 한건도 없다. 보수적 속성을 지닌 사법부가 간첩이나 특정 정파의 대리인인가. 지난 19일 새벽 서울 서부지방법원을 침탈한 일단의 무뢰배들의 만행은 이런 점에서 개탄을 넘어 파국의 공포감을 자아낸다. 사법부를 불신하고 매도하는 한 이 나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끝장이다.

맹자는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자멸을 자초한 연후에야 타국에 의해 멸망한다(國必自伐然後人伐之)’고 했다. 지금 우리 형국이 맹자가 우려했던 바로 그런 상황이 아닐까. 대통령이나 일부 정치인들은 국가의 안위나 국민의 안녕을 도외시한 채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에만 집착한 나머지 국민을 선동하고 분열시키며, 국민은 확증편향이라는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서로를 적으로 돌려 다툼을 그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고사하고 생존의 기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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