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호 뒤에 숨지마라…빅볼, 스몰볼 모두 패했다
어제(9일) 도쿄돔이다. 호주와 첫 경기를 앞둔 이강철 감독은 총력전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전력이 우리가 우위라는 평가가 많지만 야구는 모른다. 절대 강자와 싸운다는 생각으로 임하겠다. 선수들 역시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있다.”
이 게임의 중요성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감독도 처음부터 여기에 올인했다. 대표팀 결성 직후 호주를 다녀오기도 했다. 1라운드 통과를 위해서는 반드시 잡아야 할 상대라서다. 일찌감치 내정한 선발 투수도 끝까지 함구했다. “이용찬을 쓰면 어떨까 구상 중”이라는 연막 작전까지 폈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참사'라는 거북한 표현이 하나 더 추가됐다. 1점차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16년만의 호주전 패배였다. 동시에 8강 진출에도 비상이 걸렸다.
전체적으로 문제가 노출됐다. 그렇게 조심해야 한다던 장타를 3개나 허용했다. 반면 우리의 장점이라고 내세우던 세밀한 야구에서도 밀렸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 빅볼 1
0-1로 뒤지전 5회 초다. 선발 고영표가 그럭저럭 버티는 중이다. 선두 울리히 보야르스키 때 한번 깜짝 놀랐다. 정면으로 날아온 라인드라이브 타구 탓이다. 일단 재빠른 글러브 덕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런데 이게 복선이었다. 다음 타자 팀 커넬리 타석이다. 카운트 0-1에서 2구째. 포수 양의지가 손가락 2개를 펴고 밖으로 빠져 앉는다. 커브를 바깥쪽으로 빼라는 신호다. 하지만 경로를 이탈했다. 45번째 공은 가운데로 휘어진다. 알맞은 벨트 높이다. 완벽한 타이밍에 걸린 타구는 좌중간 담장을 훌쩍 넘었다. 0-2를 만드는 첫 피홈런이었다.
# 빅볼 2
박병호의 2루타가 터졌다. 7회 초 스코어는 4-2가 됐다. 이강철 감독은 아껴둔 소형준을 투입한다. “제구가 되고 아웃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가장 안정적인 투수였다”고 교체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아니었다. 몸 맞는 볼, 중전 안타, 보내기번트로 1사 2, 3루의 위기를 맞는다.
결국 다시 마운드가 바뀐다. 김원중이다. 연습경기 내내 괜찮은 포크볼을 구사했다. 기대대로 첫 타자(A 홀)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로비 글렌디닝만 막으면 위기 탈출이다.
여기서 KBS 박찬호 해설위원이 경고음을 낸다. “1루 베이스에 주자가 없습니다. 어설프게 스트라이크 위주로 가운데로 집어넣어서는 안됩니다. 일단 빼고, 좋은 공을 던져서는 안됩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다. 문제의 포크볼이 어정쩡한 높이로 걸렸다. 타자의 배트는 용서가 없다. 중계석, 관중석에서 비명이 터진다. 역전 스리런. 4-2는 4-5로 뒤집혔다.
# 빅볼 3
8회도 비슷한 상황이다. 양현종이 1사 2, 3루를 맞았다. 타자는 로비 퍼킨스다. 이번에는 MBC 정민철 해설위원의 신신당부다. “저희들이 글렌디닝 선수(7회 3점 홈런) 때 얻은 교훈이 있어요. 지금 1루가 비어 있기 때문에 아주 짠물 투구를 해야되는데요….” 설마는 현실이 됐다. 초구가 왼쪽 담장 밖으로 사라졌다. 4-8, 돌이킬 수 없는 차이로 벌어졌다.
# 스몰볼 1
0-0으로 팽팽한 4회 초다. 고영표의 초구가 4번 대릴 조지의 다리를 때린다. 리플레이 화면인 줄 알았다. 부위도 첫 타석과 똑같다. 자석을 달았나? 던진 사람도 어이없는 표정이다. 쎄~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다음 타자는 번트 자세다. 카운트 1-0에서 2구째. 내야는 적극적인 시프트를 펼친다. 1루수(박병호)와 3루수(최정)가 앞으로 달려든다. 애런 화이트필드가 이 틈을 노린다. 유격수 앞쪽으로 약간 미는 번트다. 김하성이 잡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어진 만루 때 희생플라이로 선취점을 잃고 만다.
# 스몰볼 2
4-5로 뒤집힌 7회 말이다. 1사 후 대타 기용이다. 강백호가 좌중간을 넘기는 2루타로 아이언맨 감독의 체면을 살렸다. 단숨에 득점권 찬스다. 그런데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2루수(글렌디닝)가 펄쩍펄쩍 뛰며 손을 젓는다. 아웃이라는 말이다. 무슨 소리, 타이밍은 한참 늦었는데. 호주 벤치가 재심을 요청한다. 중계화면이 느리게 재생되며 진실이 드러난다. 세리머니 도중 잠깐 발이 떨어진 틈이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뒤에서 태그 플레이가 이뤄진 것이다.
슬로우 비디오가 나오자 SBS 정우영 캐스터는 거듭 “아~”라는 외마디 탄식만 내뱉는다. 이대호 해설위원은 차마 말을 못한다. 깊은 한숨만 흘러나온다. “너무 아쉽습니다.” “절대 나오면 안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모두의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플레이였다.
# 스몰볼 3
남은 아웃은 이제 1개 뿐이다. 9회 말 2사 1루. 투수 J 가이어는 날카로운 견제구를 거푸 1루에 꽂는다. 지난 시즌 ML 32도루(실패 3)의 현수 에드먼을 묶기 위해서다.
치열한 신경전의 결말은 비극이었다. 카운트 2-1에서 4구째. 1루 주자가 스타트했다. 타자 박해민은 번트 동작으로 포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러나 소용없다. 로비 퍼킨스의 저격은 강하고, 완벽했다. 2루 베이스 위에 정확한 배송이다. 태그 아웃. 마지막 희망 비디오 판독에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27번째 아웃 카운트에 불이 켜졌다. 도쿄돔의 시간이 멈췄다.
샐러리 캡이 KBO 리그의 130분의 1
10년 전이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화물열차가 출발했다. 컨테이너 하나에는 흙이 잔뜩 실렸다. 델라웨어 강에서 채취한 것이다. 행선지는 샌디에이고다. 동서 횡단에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비슷한 컨테이너가 100개는 더 있었다.
이것들을 선적한 화물선이 샌디에이고 항을 떠났다. 태평양을 건너 호주 시드니 항으로 향한다. 꼬박 열흘간의 항해였다. 짐을 푼 곳은 한 크리켓 경기장(SCG)이다. 컨테이너 100개에 실린 것들은 야구장 펜스와 지지대, 야구공 700개, 수건 710개, 각 얼음 90만개, 옷걸이 2000개 기타 등등이다.
특히 소중한 게 있었다. 컨테이너 10개에 실린 흙이다(250톤). 크리켓 구장도 땅 아닌가? 하지만 그런 그라운드는 곤란하다. 내야를 모두 새로 깐다. 바운드의 일관성, 슬라이딩 하는 선수의 안전을 위해서다. 델라웨어 강에서 가져온 것은 (투수) 마운드용이다. 적당히 단단해서 잘 파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블록버스터급 품질관리다.
수송은 끝났다. 이젠 재건축 작업이다. 16일간의 공사를 거쳐 완공됐다. 계획부터 시행까지 1년이 넘는 프로젝트였다. 단 2경기, 2014년MLB 개막전을 위한 준비였다. 당시 다저스-D백스의 시리즈는 커쇼, 류현진이 등판해 국내에도 소개됐다. (Ryu 5이닝 무실점 승리투수)
제대로 된 야구장 하나 없는 땅이었다. 올림픽(2000년)도 크리켓 구장에서 치러야 했다. 자국 리그는 늘 운영난을 겪었다. 메이저리그와 정부의 지원금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나마도 오래 가지 못했다.
현재의 리그 ABF(Australian Baseball Federation)도 생긴 지 10년 남짓이다. 세미프로 수준의 8개 팀으로 운영된다. 팀당 40게임씩을 치르는 일정이다. 샐러리캡이 10만 호주달러(약 8700만원ㆍ2019년 기준)로 알려졌다. 단순비교로 2023년 KBO리그(114억원)의 130분의 1 수준이다. 예전에 구대성이 “내 연.봉.은 300만원 정도”라고 밝힌 바 있다. 대부분 주력 선수들은 해외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면 안되는 경기를 그르쳤다. 너무나 처참하게 무너졌다.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실망과 한숨, 개탄과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분노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비판이 쏟아진다. 싸늘한 시선이 한 곳으로 몰린다. 어이없는 주루 플레이를 향해서다. 물론 비난과 지적은 당연하다. 말도 안되는 일이다. 안일하고, 조심성 없는 플레이였다. 태극마크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그곳에 멈춰서는 안된다. 그 뒤에 가려져서는 안된다. 24살짜리의 주루사 하나 때문에 진 것이 아니다. 빅볼과 스몰볼 모두에서 패했다. 비판과 반성, 처절한 성찰은 대표팀 모두, 나아가 KBO리그 전체가 대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