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상승하는 지구 곳곳의 온도, 눈에 띄게 잦아진 비행기 난기류와 사고 소식, 더욱 빈번하고 강해진 태풍과 산불로 인한 인명 사고와 지역사회 파괴.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 났던 적이 있었나 싶다. 가상·증강·혼합 현실 등 메타버스 환경은 이런 재난·재해 상황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산업현장 재해든 자연적으로 발생한 재난이든, 일어나는 빈도수는 낮아도 발생하는 순간 엄청난 손해와 손실이 따라오는 사건들을 저빈도 고위험 사건(low frequency high risk event)이라고 한다.
대형 화학 공장 사고, 팬데믹, 대규모 홍수 등을 포함하는 저빈도 고위험 사건들은 발생 가능성이 낮아 일생 동안 겪을 일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으로 대응 능력이 낮은 반면, 발생 시에 미치는 피해 규모가 어마어마해 특히 사회취약계층은 회복 불능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저빈도 고위험 사건들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자주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재해 상황이 닥쳤을 때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인지적·감정적 데이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냉철하게 판단하기보다 패닉 상태에 빠져 위험한 선택을 내리기 십상이다.
현재 재난이나 재해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교육과 훈련은 대부분 온라인 영상이나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평면 형태인 컴퓨터 모니터나 프레젠테이션 화면에서는 재난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이나 세세한 상황에 대한 정보를 거의 얻지 못하기 때문에 현장감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유저가 교육과정에서 생동감을 느끼지 못해 흥미나 몰입도가 낮다는 단점이 있다.
이보다 더 큰 단점은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인지적으로 배운 내용이 급박한 실제 상황에서 공간과 맥락에 대한 데이터 부족으로 정확한 대처 방안으로 연결되기 힘들다는 점이다. 가령, 대규모 지진이 났을 때 영상에서 봤던 대처 방안들이 실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을지 상상해보면 화면이나 서면으로 진행되는 재난 교육이 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최근 가상현실을 이용해 저빈도 고위험 사건에 대비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제작·연구가 북미와 유럽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홍수나 산불처럼 위험한 상황을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콘텐트에 노출되면 팸플릿이나 영상의 장황한 설명 없이도 인간의 뇌는 자연스럽게 위험을 감지하여 정보처리 속도와 민감도를 높인다.
심리학과 커뮤니케이션 문헌에 따르면, 재난 관련 정보를 볼 때 적절한 정도의 위협을 감지하지 않으면 일단 보는 사람의 관심을 끌기 어렵고, 처리된 정보도 오래 기억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극심한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나 패닉 상태에서는 정보를 정확하게 처리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적절한 정도의 위험을 감지하고, 위기를 넘길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재난 상황에 대한 교육이 효과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런 사항들을 고려할 때, 마치 본인이 비바람이 몰아치고 집이 부서지는 대홍수의 현장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시뮬레이션을 경험하고, 그 위기 상황에 적절한 대응책을 반복 연습해볼 수 있는 몰입형 미디어는 현존하는 재난·재해 교육 도구들 중 가장 적절한 듯하다.
메타버스형 재난 교육 사례 : ‘웨더더스톰’
미국 동남부 해안가를 끼고 있는 조지아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플로리다와 함께 최근 태풍 피해가 급격히 늘고 있다.
주로 6월부터 11월 정도까지였던 태풍 시즌은 이제 예고도 없이 불쑥 들이닥치기도 하고 태풍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홍수도 이례적으로 더 격해지고 잦아지면서 그만큼 인명 사고와 재산상 손실 규모도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조지아 해안가에 위치한 지자체들은 대피 명령이 떨어진 위험한 상황에도 집에서 태풍을 이겨내려는 주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주는 (그릇된) 심리적인 안정감과 익숙함 때문이다.
더욱 강력해진 태풍 위협에 노출된 주민들의 태풍·홍수 대응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조지아대의 첨단 컴퓨터-인간 생태계 센터(Center for Advanced ComputerHuman ecosystems)는 미국해양청(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국립태풍센터(National Hurricane Center)와 손잡고 재난 대비 프로그램 ‘웨더더스톰(Weather the Storm)’을 제작하고 정량적·정성적 연구를 통해 교육·훈련 효과를 검증한 바 있다(https://www.ugavr.com/WeatherTheStorm).
개발된 콘텐트는 크게 몰입형과 비몰입형 교육 자료로 나뉘는데, 몰입형 콘텐트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할 수는 있지만 방대한 자료 전달은 어렵다.
슬라이드와 비디오 등 기존 형태의 교육 자료로 태풍과 홍수에 대한 기초 지식을 습득한 후, 가상현실 콘텐트는 교육 내용의 일부를 생생한 현장 경험으로 전달하여 훈련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가상현실은 2부작으로 나뉘는데, 1부에서 유저는 해안가에 새로 구입한 멋진 집으로 이사하게 된다. 입주한 새 집의 멋진 거실과 부엌, 안방을 둘러보며 자축하는 기분이 드는 것도 잠시, 곧 창밖 풍경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며 태풍이 다가오고 있어 반드시 대피해야 한다는 뉴스 속보가 티비에서 흘러나온다. 근처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울리는 사이렌도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저는 일단 새로 이사한 집에서 태풍을 견디기로 결정한다. 곧 거센 바람에 의해 창문이 산산조각 나고, 전기도 끊어진다. 다행히 비상용 손전등이 있어 작은 불빛에 의존하여 거실로 나가보지만 이내 깨진 창문으로 해일 홍수가 일어 거실은 순식간에 물에 잠긴다. 수위가 점점 올라가 빠른 속도로 턱밑까지 차오르고, 결국 머리까지 물에 잠기며 유저는 생존하지 못한 채 1부가 끝난다.
2부는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떤 대응책을 통해 재난 위기를 극복했어야 했는지, 단계별로 연습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대피용 가방은 어떤 물품으로 채워야 하는지, 그 물품들이 왜 중요한지, 대피소로 가기 전 집은 어떤 식으로 준비해놓고 가야 하는지(예: 창문이 깨지지 않도록 견고한 가림막 설치), 대피용 차에 주유는 되어 있는지, 대피소는 어떻게 찾아야 하며, 언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안전한지 등 일련의 과정을 직접 몸을 움직여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가상현실 콘텐트를 이용한 실험 연구 결과, 가상현실 1부와 2부를 통해 태풍과 해일 홍수 상황에 대비하는 연습을 한 유저들은 앞으로 닥쳐올 수 있는 재난 상황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게 되고, 이에 대비해 중장기적 대비책(예: 홍수보험, 집 구조 공사)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됨을 볼 수 있었다.
웨더더스톰 프로그램은 메타 퀘스트 1, 2, 3세대를 보유하고 있다면 누구나 내려받아 교육·훈련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므로 학교나 공공기관, 재난 대비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도 사용해보기를 권장한다.
안선주
조지아대 첨단 컴퓨터-인간 생태계 센터(Center for Advanced Computer-Human ecosystems) 센터장이며 광고홍보학과 교수다. 가상현실, 증강현실 등 뉴미디어와 이용자 행동 변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특히 의료, 소비자심리학, 교육과 연계한 가상현실 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해 대화형 디지털 미디어에 의사소통 및 사회적 상호작용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 2022년 초 TED talks에서 ‘일상생활에 가상현실 통합’이란 주제로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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