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메모리 공급 부족 사태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든 가운데 SK하이닉스가 생산기지 구축 시계를 대폭 앞당기며 ‘AI 메모리 리더십’ 수성에 나선다. 청주 M15X의 클린룸 개방과 장비 반입 일정을 앞당기는 한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속도까지 끌어올리며 폭발적인 AI 메모리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압도적인 생산능력을 앞세워 AI 메모리 주도권을 이어가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용인 구축 속도 5~10년 더 당긴다"
29일 재계에 따르면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전날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미중 AI 기술패권 경쟁 속 대한민국 성장전략’ 정책 세미나에서 “용인 구축 속도를 5년에서 10년씩 더 당기고 있다”고 밝혔다.
최 회장의 발언은 SK하이닉스가 용인 원삼면 일대에 조성 중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SK하이닉스는 이곳에 총 122조 원을 투자해 4기의 팹(반도체 생산시설)을 순차적으로 구축할 계획이다. 당초 전체 클러스터의 완공 목표는 2046년이었으나 최 회장의 구상이 현실화될 경우 이 시점은 2036년 전후로 약 10년가량 단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최 회장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기 완공을 위해 전력과 용수 등 기반 시설을 조기에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반도체 팹은 단순 건물 공사를 넘어 대규모 전력망, 초순수 공급, 폐수 처리 시설 등이 완비되어야 가동이 가능하다. 생산기지 구축 일정을 당기기 위해서는 인프라의 선행 조성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SK하이닉스의 생산기지 구축 속도가 빨라지는 분위기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청주 M15X 두 번째 클린룸 개방과 장비 반입 일정을 당초 5월보다 2개월가량 앞당겼다. M15X는 SK하이닉스가 약 20조원을 투자해 기존 M15 공장을 확장한 신규 D램 생산기지다. 아울러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 클린룸의 문 여는 시점도 2027년 5월에서 같은 해 2월로 3개월 앞당기기로 했다. 2027년 용인 첫 팹이 본격 가동되기 전까지 청주 M15X가 폭증하는 HBM 수요에 대응하고 이후에는 용인 클러스터가 중장기 생산 거점 역할을 맡아 투트랙으로 증설에 나서겠다는 전략이다.
제품 경쟁력에 대규모 양산으로 리더십 수성
SK하이닉스가 증설을 앞당기는 데는 메모리 공급 부족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근본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업계의 생산능력 확대에도 불구하고 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주문형 반도체(ASIC) 등 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당분간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실제 글로벌 투자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도 최근 보고서를 통해 메모리 산업의 슈퍼사이클이 2027~2028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HBM의 높은 생산 난도로 단기간 내 공급 확대가 어렵다는 분석이다.
HBM은 일반 D램보다 생산 부담이 큰 제품이다. 업계에서는 HBM을 생산하려면 기존 메모리보다 3~4배 수준의 생산능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HBM에 들어가는 초당 13기가비트 이상의 고성능 메모리 칩은 수율 확보가 쉽지 않고 여러 장의 D램을 쌓은 뒤 고급 패키징 공정도 거쳐야 한다. 몰디드 언더필 기반 대량 리플로우(MR-MUF), 비전도성 필름 기반 열압착 본딩(TC-NCF) 등 공정이 더해지면서 제조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증설 속도전은 AI 메모리 시장 리더십을 수성하기 위한 선제 대응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HBM3E까지는 SK하이닉스가 주요 고객사를 선점하며 앞서갔지만 6세대인 HBM4부터는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와 메모리를 결합한 턴키 전략으로 추격을 예고하고 있다. 공급 부족이 길어질수록 고객사가 원하는 시점에 충분한 물량을 공급하는 능력이 차세대 제품 수주를 가를 수 있다. 제품 경쟁력은 물론 대규모 양산 능력까지 더해 시장 주도권을 장기화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속도전을 뒷받침하기 위해 투입되는 자본도 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월 용인 1기 팹에 대한 신규 시설 투자액 21조6000억원을 추가로 확정했다. 앞서 2024년 7월 발표한 초기 투자분 9조4000억원을 포함하면 1기 팹 건설에만 총 31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셈이다. 청주 어드밴스드 패키징 전용 팹인 P&T7 건설에도 19조원을 투자한다. 회사는 1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올해 설비투자 규모는 전년 대비 크게 증가할 것”이라며 공격적인 증설 의지를 공식화했다.
재계 관계자는 “최 회장이 직접 조기 완공을 화두로 던진 것은 용인 클러스터 조성을 단순한 사업 확장을 넘어 그룹의 생존이 걸린 ‘0순위’ 현안으로 격상시키고 역량을 총동원하겠다는 의미”라면서 “결국 누가 먼저 수율 안정화와 양산 체제를 갖추느냐가 2027년 이후 메모리 패권의 향방을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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