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은 참 징그럽게 잘하는데, 절대로 무리는 하지 않는 이상한 경영자가 있습니다.
어렵게 연결해 준 대기업 고객사 미팅을 딱 한 번 하더니 "이거 수주하면 우리 팀원들 골병든다"며 단칼에 거절하는가 하면, 외부인만 오면 팀원 자랑에 입이 마르는 대표입니다. 중소기업에 대한 자조가 팽배한 요즘 같은 시대에, 이상하리만큼 진짜 '가족 같은' 온기로 돌아가는 회사, 바로 비트리코퍼레이션 김기동 대표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번 인터뷰는 사심 200%가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몇 년 전 아침 커피를 마시다 엉겁결에 들은 그의 창업 계기가 워낙 인상 깊었던 탓에, "언젠가 이 사람의 속사정을 탈탈 털어보리라"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죠. 마침내 인터뷰가 성사되어 찾아간 그의 삼성역 사무실은 기대 이상으로 근사했습니다. '마땅히 잘되어야 할 사람이 차곡차곡 결실을 일궈가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니, 뿌듯함과 대견함이 먼저 밀려왔습니다.

인터뷰라는 핑계로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은 물론, 민감하고 불편할 수 있는 질문까지 다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민망할 정도로 솔직하게 자신의 속사정과 사업 밑천을 전부 보여주었습니다.
20대 초반, 청천벽력 같았던 희귀난치병 판정과 집안의 부도. 그 절망 속에서 하루 2~3시간만 자며 과외와 인력시장을 전전해야 했던 청년 김기동이 어떻게 오늘날의 단단한 기업을 일구어냈는지, 그 치열하고도 정직한 기록을 공개합니다.
Q1. 20대 초에는 학교를 다니거나 취업을 준비하기 마련이잖아요. 스물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남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취업을 준비할 때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니 바로 빨간 딱지가 딱 붙더라고요. 혈압이나 혈액 검사는 더 볼 것도 없다며 그냥 거절당했죠. 희귀 난치성 질환자라는 이유로 회사 입장에서는 혹시 모를 산재 리스크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거예요. 결국 지원했던 몇 군데 회사에서 전부 낙방했죠.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아버지 사업마저 부도가 나면서 집에 억대의 빚까지 얹어졌어요.

취업문은 막히고 집안 형편은 바닥을 치는데, 선택할 수 있는 카드 자체가 없더라고요. 어디 들어가서 월급 받아 해결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니까 사업 말고는 돈 벌 방법이 없겠구나 싶었죠.
낮에는 초등학생부터 재수생까지 하루 12개씩 영어 과외를 뛰고, 밤에는 인력시장에 나가 일하면서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며 버텼어요. 나중에는 과외 학생이 40~50명까지 늘어나면서 학부모님들의 요청으로 작은 영어학원을 차렸고, 축구선수인 동생을 위해 주말 축구교실까지 함께 운영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건 제 체력을 갉아먹어야만 겨우 유지되는 구조였어요. 빚은 조금씩 갚아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과연 이렇게 나 자신을 갈아 넣어서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답답함이 머릿속을 계속 스쳤죠.
Q2. 취업 검진에서 곧바로 거절당하셨다고 했는데, 정확히 병원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길래 다른 길을 생각할 여지조차 없으셨던 건가요?
사실 열아홉 살 때 교통사고로 수술을 받다가 우심실이 조금씩 커지는 희귀 심장 질환을 알게 됐어요. 당시 의사 선생님이 커지는 속도를 계산하더니 "스물셋이나 넷쯤 되면 많이 힘들겠다"라며 사실상 시한부 판정을 내리시더라고요. 당장 눈앞에 통증이 없으니 잊고 살았는데, 막상 취업하려니까 희귀 난치병 딱지가 발목을 딱 잡은 거죠.
아침마다 눈을 뜨면 "오늘인가?" 싶기도 하고, 시한으로 이야기했던 스물넷이 지났는데도 안 죽고 멀쩡히 살아있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어요. 언제 심장이 멈출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목끝까지 차올라 있으니까, 20대 내내 3~4시간 이상 푹 자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악몽을 꾸다 깜짝 놀라 깨는 게 일상이었거든요.

죽음의 유예기간을 살아가는 느낌이었어요. 늘 공포를 안고 살다 보니, 남들처럼 직장에서 차근차근 미래를 기획한다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전혀 안 맞았던 거예요. 오늘 당장 살아남고 돈을 벌어야 했기에, 제게 창업은 도전이 아니라 살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였어요.
Q3. 학원이나 축구교실도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는데, 돌연 첫 사업들을 접고 '마케팅'을 택하셨습니다. 왜 하필 전혀 다른 분야였나요?
학원이랑 축구교실을 밤낮없이 운영하다 보니 문득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내 능력이나 정보력으로는 어디 가서 대단한 금광을 직접 찾아낼 수는 없겠다고요. 그런데 금을 파러 몰려드는 사람들 입구에 서서 곡괭이를 팔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그 곡괭이가 바로 마케팅이었습니다. 어떤 사업 카테고리든 마케팅은 무조건 해야 하니까, 그걸 잘 다듬어주면 고객도 살고 나도 살겠다는 계산이 섰어요.
가지고 있던 조그만 사업체들을 싹 매각해서 밑천을 마련한 뒤 대구에서 무작정 마케팅 회사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갓 스물다섯 된 애가 와서 마케팅을 해준다고 하니까 다들 안 믿어주는 거예요.

사기꾼 취급하기 일쑤였고, 첫 미팅마다 백그라운드가 뭐냐고 까다롭게 물어봤죠. 나이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싫으니까 머리를 삭발하고, 대구 성서공단 느낌의 헐렁한 아저씨 정장에 30만 원짜리 세이코 메탈 시계를 찼어요. 나이도 스물다섯이 아니라 서른둘이라고 일곱 살이나 높여 부르며 나이 들어 보이려고 애를 썼어요.
그때 첫해에 대구의 프랜차이즈 본사 대표님들을 찾아다니며 일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숫자로 성과를 보여주니까 그제야 마음을 열어주시더라고요. 어리다고 의심받고 겉모습으로 판단당하는 게 씁쓸하면서도, 그 당시에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니까 시키는 건 죄다 군소리 없이 다 해냈던 것 같아요.
Q4. 시한부 삶에 대한 불안감이 극에 달해 있던 시기에 뜻밖에 봉사활동을 하러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찾아간 현장은 어땠나요?
스물셋을 넘기고도 안 죽으니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혹시 오늘인가 싶어 늘 불안했어요. 보다 못한 친구가 "세상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직접 가서 한번 봐라"라면서 대구 치맥 페스티벌 1회 영어 통역 봉사를 대신 신청해 준 거예요.
얼떨결에 뽑혀서 갔는데, 2013년 첫해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죠. 찌는 듯한 더위 속에 축제 준비는 안 되어 있고, 사람들의 심한 욕설과 고성이 오갔어요. 외국인은 한 명도 안 보이는데 사방에서 욕밖에 안 들리니까 "내일 튈까"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날 저녁에 일본어 통역하던 친구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오빠, 나이 많아 보이는데 현장에 답이 없으니 우리 좀 도와주라"라고 하더라고요. 가만히 관찰해 보니 문제의 원인이 딱 보였어요. 술을 다루는 축제라 신분증 검사를 해야 하는데, 3만 명이 넘는 줄에 노트북 달랑 3대를 놓고 검사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 알바를 뛰며 쌓인 짬밥이 있으니까 관라자 웹 페이지의 IP 접속 제한을 스마트폰으로 풀고, 모바일 링크를 카톡으로 봉사자들한테 다 뿌렸어요. 20명 넘는 인원이 모바일로 처리하니까 병목이 순식간에 풀리면서 줄이 쫙 빠졌죠.
그걸 본 주최 측에서 난리가 난 거예요. 질서가 딱 잡히니까 이 일을 누가 했냐고 물었고, 그날 밤에 느닷없이 무전기를 쥐여주더니 내일부터 전체 총괄 팀장을 하라는 거 있죠. 다음 날 가보니 수백 명의 봉사자들 앞에서 저를 총괄로 소개해버려서 얼떨결에 현장을 지휘하게 됐어요. 뜨거운 볕 아래서 땀 뻘뻘 흘리며 사람들과 부딪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상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죠.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이어져서 결국 13년 동안이나 그 축제 현장을 지키게 됐습니다.
Q5.ROAS 지표를 아주 집요하게 파고드신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디지털 마케팅 시장에 가보면 분야별 고수들이 정말 많아요. 소재를 화려하게 잘 만드는 사람, 머신러닝이나 매체 테크닉을 기가 막히게 다루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고객사 미팅에 가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얘기는 항상 ROAS예요. 문제는 이 중요한 지표에 대해 다들 너무 두루뭉술하게만 다룬다는 점이었어요.

ROAS라는 건 광고비를 많이 태운다고 잘 나오는 게 아니에요. 소재를 잘 만드는 것도 필요하지만, 정작 가장 핵심인 '수익 구조'를 아무도 안 보더라고요. 예를 들어 10만 원짜리 제품을 팔다가 수익 구조와 세일즈 플로우를 개선해서 15만 원짜리로 만들어주면, 광고 효율은 그대로여도 ROAS는 폭발적으로 뛰어오르거든요. 지표 하나를 밑바닥까지 쪼개서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진짜 수치가 움직여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신참떡볶이'였어요. 110개 지점에서 1년 동안 성장이 정체되어 있었는데, 저희가 가맹 문의 DB 하나를 만드는 비용부터 세일즈 플로우, 슈퍼바이저 교육까지 전면 재설계했어요. 본사와 저희의 합이 딱 맞아떨어지면서 단 3개월 만에 지점이 280개까지 폭발적으로 늘어났죠.
Q6. 수많은 중소기업 대표님들을 컨설팅해 오셨는데, 현장에서 직접 부딪혀보면서 어떤 걸 가장 크게 느끼셨나요?
너무 죄송한 말이지만,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자기 회사의 수익 모델 구조를 제대로 안 보세요. 영업이나 세일즈는 정말 열정적으로 잘하시는데, 정작 '고객 한 명을 데려오는 데 돈이 얼마가 들고, 여기서 진짜 남는 마진이 얼마인가'에 대한 계산의 시작점이 무너져 있어요. 실타래가 엉켜있는 상태에서 마케팅 비용만 부어대니, 돈이 벌리는지도 모르고 실제로도 안 벌리는 거죠.
게다가 창업자분들이 유독 고집이 세시잖아요. 아무리 설득해도 본인 고집을 안 꺾으시면 일단 원하는 대로 해드려요. 그리고 나중에 나온 객관적인 숫자를 딱 펼쳐놓고 여쭤보죠. 수치를 보고 반 정도는 "아, 대표님이 왜 그 말을 했는지 이제 알겠다"라며 받아들이시는데, 나머지 반은 "이 숫자가 잘못된 거 아니냐"라며 부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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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엔 제가 또 어렸으니까 "네가 사업을 해봤냐, 네가 뭘 안다고 그러냐"라는 비아냥도 많이 들었죠. 수치를 보여줘도 끝까지 안 믿으시는 분들과는 냉정하게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능력이 여기까지인 것 같다"라고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습니다. 숫자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준비가 된 분들과만 끝까지 함께 가는 거죠.
Q7. 잘나가던 대행사 사명(브렉퍼스트)과 사업 모델을 버리고, AI 기반의 '비트리'로 피벗을 감수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저희에게 피벗은 거창한 위험 감수가 아니라, 변화하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당연한 수순이었어요. 저희 회사는 시기에 따라 진화 과정을 거쳐왔는데요. 처음에는 TV나 신문 광고처럼 브랜드를 알리는 종합 대행사로 시작했다가, 인터넷 광고 중심의 퍼포먼스 대행사로 바꾸고, 고객의 클릭부터 결제까지 전체 과정을 개선해 주는 회사로 발전해 왔죠.

그러다 한국에 AI 열풍이 불기 전, 해외 마케팅 솔루션 도입을 위한 글로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구글이나 해외 AI 기술을 조금 일찍 접했어요. 방대한 마케팅 데이터를 정제하고 로직을 짜서 매출과의 연관성을 찾을 때 AI를 활용해 봤는데,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정확하고 빠른 성과를 내더라고요. "기존 방식만 고집했다간 답이 없겠구나, AI 기술을 연동한 진정한 AX 회사로 가야겠다"고 바로 인정했죠.
AI 엔진 기술 자체는 천재 엔지니어분들이 만드시는 거라면, 저희 같은 회사의 역할은 그 기술을 현장에 잘 가공해서 '실제 기업들이 매출을 올리고 돈을 벌게 만들어주는 일'이에요.
과거 모바일 시대가 열릴 때 스마트폰 자체를 만든 기업보다 배달 앱이나 택시 앱처럼 현장의 문제를 해결해 준 서비스들이 승리했던 것처럼, 저희는 AI 기술을 실제 사업장에 적용해서 성과를 내는 '현장 해결력'에 전부를 걸었습니다.
Q8. 아무리 좋은 도구라도 기업 현장에 AI를 적용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실패나 한계에 부딪혔을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실패 사례가 있나요?
실패한 사례가 훨씬 많죠. 작년 중순 화재보험사 프로젝트를 할 때가 대표적인데요. 전사에 AI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리포트를 만드는 작업까지는 아주 훌륭하게 성공했어요. 자신감이 붙어서 "보험 고객에게 AI 인공지능 상담원이 직접 전화를 거는 방식으로 접근해 보자"는 무리한 제안을 냈고, 그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어요.
당시만 해도 일반 대중이 AI에 느끼는 거부감이나 경계심이 너무 높았던 거예요. 전화기 너머로 "이거 사람이 아니라 AI 목소리네?" 하고 눈치채는 순간 보이스피싱처럼 느끼거나 반감을 가지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시더라고요. 시대와 소비자의 마음보다 너무 앞서나갔던 시도였던 거죠.

사람이 하던 일을 프로그램으로 대체해 놓고 'AI'라는 이름표만 붙이는 건 진정한 AX가 아니더라고요. 기술 자랑만 해서는 기업의 생산성이나 매출을 진짜로 끌어올릴 수 없어요. 결국 "소비자가 이 AI를 얼마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하는 시장과의 접점을 읽어내는 게 진짜 핵심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Q9. 기업의 AI 전환을 돕는 '비트리' 내부에서는 정작 AI를 어떻게 활용하고 계신가요?
저희는 개발 및 실무용 AI 솔루션인 '클로드'의 파트너사로서, 직원들의 소통부터 작업 진행 상황 점검, 보안 가이드라인 체크까지 업무 전반에 AI가 기본으로 깔려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어요.
사실 이 환경을 만들기까지 1년 내내 큰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처음에는 직원들에게 "AI한테 질문할 때는 이렇게 써라", "파일 저장은 이 규칙을 꼭 지켜라" 하면서 마치 정답을 알려주듯 딱딱하게 가르치려고만 했거든요. 그런데 매뉴얼대로 쓰라는 압박을 가하니까, 정작 현장의 실무 마케터들이 머리가 아파서 AI를 안 쓰기 시작하고 회사 전체의 AI 전환이 딱 멈춰버리더라고요.

그래서 방향을 180도 틀었어요. 데이터가 유출되지 않는 안전장치나 기본 인프라만 뒷단에서 기술팀이 딱 세팅해두고, 직원들은 그냥 AI를 '자유로운 놀이터'처럼 마음껏 쓰게 풀어준 거죠. 놀이터 미끄럼틀을 탈 때 안전요원이 옆에 서서 "그렇게 타면 안 된다"라고 계속 잔소리하면 아무도 안 놀잖아요. 다치지만 않게 안전선만 쳐두고 마음대로 놀게 해주니까 비로소 잠재력이 터지기 시작했어요.
실무자 한 명이 처리할 수 있는 업무의 깊이와 속도가 비약적으로 넓어졌고, "내가 AI로 이런 맞춤형 에이전트를 새로 만들었다"라고 서로 자랑하면서 스스로 공부하는 동기부여와 건강한 문화가 생겨났습니다.
Q10. 해외 시장 진출 프로젝트도 많이 다루셨는데, 가설과 실제 현장의 반응이 가장 크게 달랐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한국어 문구를 영어로 예쁘게 잘 바꾸면 해외에서도 통하겠지?" 하는 착각이었어요. 자극적인 문구나 눈길을 사로잡는 마케팅 기술보다 중요한 건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죠.
테이블 오더 서비스인 '티오더'의 미국 진출 프로젝트를 도울 때가 대표적이었어요. 처음에는 식당 회전율이 빨라지고 업무가 효율적이라는 점만 강조했다가 완전히 실패했거든요. 미국 식당 특유의 '스몰토크' 문화, 즉 손님이 오면 점원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고 수다를 떨며 유대감을 쌓는 현장 분위기를 저희가 놓쳤던 거예요.

그래서 현지 문화를 다시 분석해서 메시지를 싹 바꿨어요. 예를 들어 히스패닉계 식당 점주님들께는 효율성만 말하기보다, "점심 브레이크 타임 때 타코 먹고 칠링할 시간을 벌어라" 처럼 삶의 여유에 초점을 맞춰 친근하게 다가갔죠.
디자인도 그분들에게 익숙한 초록색과 빨간색 포인트 컬러를 활용했더니, 그제야 도입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글자 그대로 완벽하게 번역하는 것보다 그분들의 문화 속으로 얼마나 자연스럽게 스며드는지가 승부수라는 걸 확신하게 됐어요.
Q11. 업계 특성상 대행사를 전문가가 아닌 하청이나 수하처럼 다루는 문화가 여전히 존재하잖아요. 이런 관행 속에서 비트리만의 중심을 잡는 기준이 있나요?
해외에서는 마케팅이나 기술 대행사를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일을 맡기는 문화가 강해요. 반면에 국내에는 이상하게 '내가 돈을 줬으니 내 마음대로 시켜도 되는 하청' 정도로 여기는 시선이 여전히 남아있죠. 저는 이 본질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대행이라는 건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대등한 '파트너' 관계여야 하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계약을 맺을 때 아주 명확한 기준을 세워요. 우리 직원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 달라는 조건까지 계약서에 넣을 정도죠. 대행사라고 해서 왜 주말에 무작정 연락을 받고 야근을 당연하게 해야 하나요? 저희는 야근을 거의 안 해요. 업계에서는 "그렇게 일하니까 당신들이 큰돈을 못 버는 거다"라며 미쳤다는 소리도 진짜 많이 들었어요.

수천억 원씩 버는 대형 기획사에 비하면 저희 매출 규모가 작은 건 맞아요. 하지만 직원의 체력을 갈아 넣어가며 덩치만 키우는 경영은 지양해요. 알차고 단단하게 내실을 다져온 덕분에, 실질적인 수익성이나 재무 건전성만큼은 대형사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Q12. 그런 엄격한 파트너십 기준을 세우면 당장 고객사를 유치하는 데 불리하거나 컴플레인이 생기지는 않나요?
오히려 전혀 반대예요. 기준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세우니까 무리한 요구로 서로 피곤해지는 갈등이나, 준비가 안 된 프로젝트를 맡아서 망쳐버리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회사의 중심이 단단하다 보니 고객사분들도 저희의 진정성을 알아봐 주세요. 그래서 규모와 상관없이 한번 저희와 인연을 맺은 고객사들은 평균 5년 이상 꾸준히 재계약을 이어가고 계셔요.

겉으로 화려하게 소문나지 않아도 저희는 이 방식이 맞다고 확신해요. 이런 확실한 철학이 있어야 "아, 저 회사는 진짜 전문가로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겠구나" 하고 좋은 인재들이 찾아오거든요. 동시에 저희 역시 대등한 파트너십을 이해해 주시는 좋은 고객사들을 계속 만날 수 있고요. 결국 우리 팀원들과 고객사가 함께 건강하게 성장하는 선순환을 만드는 게 저희의 진짜 목표라고 할 수 있죠.
저희 조직 문화의 뿌리는 결국 대구 치맥 페스티벌 현장이에요. 지금 팀원의 절반 정도가 무더운 여름날 빗속에서 땀 뻘뻘 흘리며 무거운 물건을 나르고, 술 취한 분들을 상대하며 다져진 특유의 '전투 멘탈리티'를 공유하고 있거든요. 비 오는 날 미팅에 갈 때도 "치맥 페스티벌 때도 비 쫄딱 맞았는데 비 좀 맞으면 어때" 하면서 서로를 먼저 챙기는 끈끈함이 기본으로 깔려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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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조직 문화의 뿌리는 결국 대구 치맥 페스티벌 현장이에요. 지금 팀원의 절반 정도가 무더운 여름날 빗속에서 땀 뻘뻘 흘리며 무거운 물건을 나르고, 술 취한 분들을 상대하며 다져진 특유의 '전투 멘탈리티'를 공유하고 있거든요. 비 오는 날 미팅에 갈 때도 "치맥 페스티벌 때도 비 쫄딱 맞았는데 비 좀 맞으면 어때" 하면서 서로를 먼저 챙기는 끈끈함이 기본으로 깔려 있죠.
저희의 핵심 가치가 '헌배전성'인데요. '헌신적으로 동료를 배려하고, 최고의 전문성을 위해 함께 성장하는 동료'라는 뜻이에요. 중요한 건 이 굳건한 내부 결속력이 결국 고객사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는 점이에요.

동료를 존중하고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려는 팀원들이 모여있으니, 고객사의 문제도 내 일처럼 헌신적이고 프로답게 해결해 드릴 수밖에 없는 거죠. 실질적인 성과가 나다 보니 저희랑 일하던 고객사 담당자분이 회사 문화가 너무 좋다며 비트리로 이직해 오시는 경우도 있었어요.
제가 개인적인 욕심으로 매출을 올리려고 수주를 남발하면 이 문화가 깨질 수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진짜 도움이 절실한 고객사, 그리고 우리 팀원들이 즐겁게 몰입해서 건강한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프로젝트 위주로 선별해서 일하고 있어요.
Q14. 가족 부양을 위해 시작했던 첫 사업부터 대구 대행사 시절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표님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저희의 최종 목적지는 아주 명확해요. '팀원들과 함께 돈 걱정 없이, 정말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재밌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명확해지더군요. 인생에서 결국 남는 건 '사람'과 '이름'뿐이라는 걸요. 대행사를 그저 하청으로 낮게 보는 시선도 있지만, 저희가 생각하는 본질은 타인의 절실함을 해결하고 성장을 돕는 정직한 파트너입니다.

이제 비트리는 AI라는 강력한 무기까지 얻었습니다. 순간의 매출을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정직한 기술과 파트너십으로 기업의 AI 전환을 이끄는 '오래도록 건강하게 생존하는 AX 전문 기업'. 그것이 제 인생의 마지막 목적지입니다.
※ 오늘의 큐터뷰는 조인후 작가님이 작성하고, 큐레터가 편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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