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조태채의 편지[석한남의 붓길따라 사연따라]

2026. 4. 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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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6년(숙종 12년) 양주 조씨 가문에 겹경사가 터졌다.

스물여섯 살 동갑내기 사촌 형제인 조태구(趙泰耉·1660∼1723)와 조태채(趙泰采·1660∼1722)가 별시 문과에 나란히 합격하며 동방입격(同榜入格)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그러나 병약한 경종의 후사를 둘러싼 노론 주도의 연잉군(훗날 영조)의 대리청정 시도가 소론의 반격으로 좌절되면서,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이었던 조태채는 사촌형 조태구가 이끄는 소론에 의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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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의 모든 사람에 대한 소식을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전할 수 있으니, 한 번쯤 웃을 거리는 될 것입니다/ 제가 정성껏 주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도 징갱(懲羹)의 마음으로 끝내 흔쾌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지금 돌아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대께서 만약 옥절구를 끝까지 두드리신다면 혹시라도 화합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습니까? 껄껄’(盡閣人消息 今始眞傳 以資一噱耳/弟之周旋 非不誠實 而尙不無懲羹底意 終靳快頷 奈何/然時無定歸之處云矣/兄若擣盡玉杵 則或可得諧/未知如何 呵呵)

1686년(숙종 12년) 양주 조씨 가문에 겹경사가 터졌다. 스물여섯 살 동갑내기 사촌 형제인 조태구(趙泰耉·1660∼1723)와 조태채(趙泰采·1660∼1722)가 별시 문과에 나란히 합격하며 동방입격(同榜入格)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이 일은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집안의 큰 자랑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영광은 훗날 노론과 소론의 영수로 갈라서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게 될, 비극적 운명의 서막이기도 했다.

조태구는 사헌부 지평과 이조판서 등 요직을 지내며 승승장구했으며, 조태채 역시 강원도·충청도 관찰사와 예조·형조·공조·이조 판서를 역임하며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그러나 병약한 경종의 후사를 둘러싼 노론 주도의 연잉군(훗날 영조)의 대리청정 시도가 소론의 반격으로 좌절되면서,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이었던 조태채는 사촌형 조태구가 이끄는 소론에 의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역사는 이 사건을 ‘신임사화’라 기록하고 있다. 그 직후 영의정에 오른 조태구 역시 불과 반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1706년(숙종 32년) 초봄, 조선 조정은 붕당 갈등으로 야기된 인사 정체를 겪고 있었다. 그해 2월 12일, 조태채는 지인의 인사 청탁 편지를 받고 이 편지를 썼다. ‘징갱(懲羹)’이라는 표현은 ‘징갱취해(懲羹吹薤)’의 준말로, 뜨거운 국에 입을 덴 뒤에는 냉채를 먹을 때도 불어 먹는다는 뜻이다. 예전에 화를 당한 후 당파적 보복이 두려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의정부의 상황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당시 호조판서로 판의금부사를 겸임하고 있던 조태채 역시 이 얽힌 실타래를 쉽게 풀 수는 없었다. ‘옥절구를 끝까지 두드리신다면’이라는 표현에는 조율과 설득을 거듭한다면 타협의 실마리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기대가 담겨 있다.이 짧은 편지는 붕당 정치가 만들어낸 당시 조선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고문헌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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