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핀 신입사원의 꿈..푸르밀은 이렇게 무너졌다

20대 A 씨는 올해 5월 중순 푸르밀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회사 사정 어려운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A 씨와 5명 남짓한 동기들은 희망을 잃진 않았다. LG생활건강과 SPC그룹의 인수설이 흘러나왔다. 건실한 회사가 운영을 맡는다면 '식품 영업맨'으로 사회에서 성장하리라 믿었다. 그 꿈은 지난 17일 받은 이메일 해고 통보로 무너졌다. A 씨는 퇴직금도, 실업급여도 받지 못한다. 법상 정해놓은 근무 일수(퇴직금 1년, 실업급여 180일)를 채우지 못해서다.

■ '고용 승계' 인수 결렬 배경이었나?
LG생활건강 측은 푸르밀의 콜드체인(신선식품 유통망)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푸르밀의 '가나 초코우유'와 '검은콩 우유', '비피더스'는 편의점과 대형마트 등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었던 제품이다. 콜라와 에너지 음료 사업에서 최근 좋은 실적을 낸 LG생활건강 입장에서는 제품 라인업을 다양화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하지만 양측 협상은 올해 9월경 결국 무산됐다. 그 배경엔 노후 설비, 부동산 대출, 과도한 매각대금 제시 등 여러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LG생활건강 측이 공장과 설비 인수엔 긍정적이었지만 고용 승계까지는 부담스러워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LG생활건강 측은 "정확한 이유는 밝힐 수 없다"고 답했다.
■ 매출 1,800억인데 제품 개발엔 4,000만 원
푸르밀은 2018년 15억 원의 영업손실을 시작으로, 2019년 88억 원, 2020년 113억 원, 지난해 123억 원으로 적자 폭을 날로 키웠다. 4년 전 전문경영인이 물러나고 신준호 회장의 차남인 신동환 대표 체제로 바뀐 시기와 공교롭게도 겹친다.
푸르밀 노조 측은 오너 경영이 시작되면서 신사업투자에 인색했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푸르밀의 연구비와 경상 개발비를 더한 R&D 지출액은 4,100만 원으로 매출액(1,799억 원) 대비 0.02%에 불과하다.

푸르밀은 그 흔한 자체 온라인몰 하나 없었다. 대신 유통업체 자체제조(PB)상품 제조에 주력했다. 현재 이마트에서 팔리는 푸르밀 15개 제품 중 9개, 홈플러스에 들어가는 15개 제품 중 5개가 PB상품이다. 푸르밀의 1ℓ짜리 흰우유 PB상품은 1,580원. 유업체가 낙농가로부터 우유 원료(原乳)를 1ℓ에 1,100원 수준에 산다는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손해를 보는 장사다.
■ '저마진 고비용' PB상품에 주력
젖소는 매일 젖을 짜야 한다. 시장 상황이 어떠하든, 우유는 무조건 일정량씩 생산된다는 얘기다. 유업체들은 계약된 분량을 의무적으로 사는 할당제로 우유 생산을 안정화하고 있다. 푸르밀도 1년에 원유 40,000톤 정도를 농가 25곳으로부터 샀다.

문제는 이렇게 산 원유가 남아돌았다는 거다. 저출산으로 분유와 흰 우유를 먹을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어른들은 가격 저렴한 수입 멸균유를 찾았다. 남는 원유를 버리는 것보다는 PB상품이라도 만드는 게 푸르밀 입장에선 낫다. 일부 원유는 탈지분유로 만든 뒤 물과 섞어 가공유(환원유) 형태로 팔았지만 수입 유제품과 경쟁에서 밀렸다.
■ "다음엔 우리?" 유업계 위기감
문제는 제2, 제3의 푸르밀이 나올 수 있다는 거다. 중소업체뿐 아니라 매일유업, 남양유업 등 대형업체도 '울며 겨자 먹기'로 PB상품을 만든다. 시장점유율이 50%에 육박하는 '업계 1위' 서울우유도 지난해부터 창고형 할인매장에 들어가는 2.4ℓ짜리 PB상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앞서 설명한 남아도는 원유 문제도 있지만 유통업체의 눈치를 보는 이유도 있다. 자사 제품을 마트와 편의점 매대 목 좋은 자리에 진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다.

원가 부담도 더 심해진다. 현재 낙농가와 유업체는 내년부터 적용할 원유 가격을 협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사룟값이 크게 뛰면서 50원 안팎 오를 가능성이 점쳐진다. 우유회사들은 마시는 우유 사업으로는 수익을 낼 수 없다고 판단한다. 단백질 제품 같은 건강기능식품, 밀키트와 디저트 등 완전히 다른 사업에 뛰어들어 적자를 메꾸는 구조다.
■ 흔들리는 '우유 주권'
우유시장은 외국제품에 점령당하고 있다. 원유로 환산한 유제품 수입량(246만 톤)은 국내 원유 생산량(203만 톤)을 진작에 넘어섰다. 미국과 EU 등에서 들여오는 유제품 관세는 2026년이면 0%가 된다. 안 그래도 부족한 가격 경쟁력이 지금보다도 더 밀리게 된다.

우유는 국민 건강을 책임져 온 필수 먹거리다. 치즈와 버터, 아이스크림 등 활용 범위도 넓다. 지금이야 외국산이 싸서 좋다지만 언제까지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최소한의 낙농 기반은 갖춰 '우유 주권'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다. 지금 같은 사업 방식 유지가 어렵다면, 국산 원유를 활용한 고품질 유제품도 대안이 될 수 있다.
■ 해고 통보 일주일 만에 노사 첫 대화
푸르밀은 오늘(24일) 오후 2시, 서울 본사에서 노사 간 첫 대화에 나선다. 신동환 대표 등 사측 3명, 김성곤 노조위원장 등 노조 관계자 3명과 고용노동부 소속 근로감독관이 참석할 예정이다. 푸르밀 노조는 "합법적인 정리해고 선례가 만들어진다면 향후에도 수많은 악용사례가 발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공개적인 매각을 통해서라도 살려달라고 빌고 싶다"며 "국민 여러분께서 도와달라"고 덧붙였다.

고용노동부는 푸르밀이 직원들에게 사업 종료 44일 전에 해고 통보를 한 것이 적절했는지 조사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노조 등 근로자 대표에게 해고 50일 전까지는 이를 통보하고 합의해야 한다. 내일(2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푸르밀 본사 앞에서는 25개 낙농가가 항의집회를 연다.
(인포그래픽 : 김서린)
(대문사진 : 배동희)
장혁진 기자 (analogu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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