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여신상을 거꾸로, 아메리칸드림 이면을 파헤친 3시간 35분

▲ 영화 <브루탈리스트> ⓒ 유니버셜 픽쳐스

<브루탈리스트>는 지난해 열린 81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82회 골든글로브에서 3관왕을, 그리고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화제작인데요.

215분이라는 압도적인 러닝타임 동안 펼쳐지는 <브루탈리스트>는 한 건축가의 삶을 통해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실존 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를 통해 오히려 더 자유롭게 미국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 이 작품은, 서곡-1막-2막-에필로그라는 웅장한 구조로 30년에 걸친 한 예술가의 여정을 그려내죠.

2차 세계대전 직후,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헝가리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는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 조카 '조피아'(래피 캐시디)와 강제로 헤어진 채 미국으로 건너옵니다.

자유의 여신상이 그의 눈에는 거꾸로 보이는 것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이후 그가 마주하게 될 '자유의 나라' 미국의 이면을 보여주죠.

희망을 품고 도착한 새로운 땅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차별과 편견이었는데요.

필라델피아에 정착한 '라즐로'는 사촌 '아틸라'(알렉산드로 니볼라)의 가구점에서 일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갑니다.

유대인 정체성을 버리고 미국 사회에 동화된 '아틸라'와 달리, '라즐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 하죠.

'라즐로'는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의 서재 리모델링 작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하지만, 뒤늦게 그의 재능을 알아본 '해리슨'이 어머니를 기리는 문화센터 설계를 의뢰합니다.

덕분에 '에르제벳'과 '조피아'도 미국으로 올 수 있게 되었지만, 이들의 재회는 새로운 시련의 시작이 되죠.

전쟁의 후유증으로 휠체어에 의지하게 된 '에르제벳'과 말을 잃은 '조피아', 그리고 마약에 의존하게 된 '라즐로'는 각자의 방식으로 트라우마와 싸워나갑니다.

'라즐로'의 혁신적인 브루탈리즘 설계는 끊임없는 반대에 부딪히고, '해리슨'의 감시와 압박은 점점 더 심해지죠.

작품의 제목 소재이기도 한 '브루탈리즘'(Brutalism)은 1950년대 영국에서 전후 복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등장한 건축 양식인데요.

노출 콘크리트나 벽돌과 같은 건축 재료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장식을 최소화하면서 기능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죠.

주로 이민자 출신 건축가들이 이 양식을 사용했다는 점은 영화의 중요한 맥락이 됩니다.

영화에서 '라즐로'가 설계한 문화센터는 강제수용소를 연상시키는 하부 구조물 위로 우뚝 솟은 십자가 형태를 띠며, 그의 트라우마와 예술적 승화를 동시에 상징하죠.

해가 이동하면서 중앙 회당에 시간별로 드리우는 빛의 십자가는 영화의 가장 아름답고도 의미심장한 장면 중 하나가 됩니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21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과 15분의 인터미션, 비스타비전이라는 고전적 촬영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과감한 시도를 하는데요.

인터미션은 단순한 휴식이 아닌, '라즐로'의 삶을 두 개의 장으로 구분하는 형식적 장치로 활용됩니다.

1부가 미국 정착기라면, 2부는 예술가로서의 고뇌와 투쟁을 그리죠.

비스타비전으로 촬영된 웅장한 건축물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시각적 압도감을 선사하며, 섬세한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은 '라즐로'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표현합니다.

속도와 효율을 추구하는 현대 영화계의 흐름과는 대조적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영화는 더욱 깊이 있게 미국 사회의 모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제공하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유력 수상 후보인 애드리언 브로디는 고통과 집착, 예술적 열정이 뒤섞인 '라즐로'를 섬세하게 연기해 냅니다.

그에게 첫 오스카 트로피를 안겨줬던 <피아니스트>(2002년) 이후 또다시 홀로코스트 생존자 역할로 돌아온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는 영화의 긴 호흡을 이끌어가는 중심축이 되죠.

이어 펠리시티 존스가 고통 속에서도 강인함을 잃지 않는 '에르제벳'을, 가이 피어스가 후원자이자 억압자라는 이중성을 지닌 '해리슨'을 설득력 있게 연기하면서, 두 배우는 각각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과 남우조연상 후보로 지명됐습니다.

<브루탈리스트>는 평범한 이민자의 성공담이나 예술가를 소재로 하는 영화를 넘어섭니다.

영화는 "자유롭다는 착각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노예 상태"라는 말처럼, '아메리칸드림'이라는 환상 뒤에 숨은 차별과 착취의 실체를 드러내죠.

시대와 공간을 넘나드는 웅장한 스케일로 미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편견과 혐오, 자본의 폭력성을 담아내며, 예술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고 승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작품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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