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노래가 품은 역사]
조총련계 재일교포 첫 모국방문 때
부산항에서 울려퍼진 조용필 노래
'위대한 가왕' 조용필에 얽힌 사연들
시대를 풍미한 대중가수 속 최고반열
1975년 9월 13일. 추석을 며칠 앞둔 이날,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 방문단 698명이 2주 일정으로 부산항 제1부두로 입항했다.
국민들의 가슴은 뜨거웠다. 분단 30년 만에 처음으로 모국을 방문한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이 그토록 그리던 부모형제와 다시 만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도 고향과 혈육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이때 부산항에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1976년 개사 전 노래)가 크게 울려 퍼진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조총련 동포들은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광복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었다. 그들은 김포공항에서, 또는 부산항에서 보고픈 혈육과 상봉하면서 설움을 참지 못하고 오열을 터트렸다. 또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서울시민 환영대회에서 희극인 김희갑이 부른 ‘불효자는 웁니다’ 노래에 회한의 눈물을 쏟았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부산갈매기’ 등과 함께 부산을 상징하는 대표적 노래 중 하나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얻은 노래지만, 이 곡이 조용필이 아닌 다른 가수에 의해 먼저 불리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사가 다소 다르고 곡조의 느낌도 약간 다르지만 ‘돌아와요 충무항에’가 바로 그 노래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꽃피는 미륵산엔 봄이 왔건만
님 떠난 충무항은 갈매기만 슬피우네
세병관 둥근기둥 기대여 서서
목메어 불러봐도 소리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
‘돌아와요 충무항에’는 황선우가 작곡한 곡에다 지금은 통영으로 통합된 충무 출신의 가수 김해일(본명 김성술)이 작사한 후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불러 1970년 12월 16일에 발표했다. 그러나 ‘돌아와요 충무항에’는 당시에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김해일은 음반 발표 후 별다른 활동을 안 하다가 군에 입대했고, 1971년 휴가를 나왔다가 그 유명한 ‘대연각 화재’ 때 사망하고 말았다.
“내 아들이 작사했는데…” 가사 표절 시비
김해일의 사망 후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은 음반을 전부 회수해 불살라버렸고 그렇게 이 곡의 존재는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작곡가 황선우는 이 곡이 사장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1972년에 다시 당시 무명가수였던 김석일과 ‘김트리오’(‘연안부두’를 부른 김트리오와는 다른 밴드)의 멤버였던 조용필에게 비슷한 시기에 각각 취입시킨다.
황선우는 제목을 원래 자신이 원했던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꾸고 가사도 일부 수정했다. 하지만 두 가지 버전 모두 히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곡은 황선우가 작곡 겸 작사가로 기재되어 있지만, 가사의 상당수는 과거 김해일이 작사한 '돌아와요 충무항에'와 같았다. 이에 대해 작사자 김해일의 어머니가 2004년 가사 표절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 결과 3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이 났고, 이후 황선우가 김해일의 유족에게 1억6천만 원의 합의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가사 표절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4년 후인 1976년 조용필이 다시 이 곡을 빠른 템포로 편곡하고 가사의 일부를 수정하여 본인의 독집 앨범에 발표해 공전의 히트를 쳤다.
박성배 킹레코드 사장이 조용필에게 리메이크를 제의하며 이별한 연인을 보고 싶어 하는 가사를, 헤어진 혈육을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바꿨던 것이다.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 방문에 맞춘 조치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부분의 원래 가사는 ‘그리운 내 님이여’였다. 결국 이 노래는 '남녀 간의 애정·이별 노래'에서 '헤어졌던 부모·형제가 상봉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조용필이 빠른 템포로 바꾸고 가사 일부를 수정해 1976년에 부르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는 경부선을 타고 서울로 상경했고 전국을 강타했다. 1950년 경기 화성에서 출생해 경동고를 졸업하고 ‘웨스턴 컨트리 그룹’을 조직해 주한 미군부대에서 음악인생을 시작한 조용필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에도 조용필은 이 곡을 다시 조금 더 경쾌한 '고고' 리듬으로 편곡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1980년 정규 1집에 수록하였는데, 굴곡 많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버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다.
정리하자면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포함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김해일(1970년, 돌아와요 충무항에)→김석일(1972년, 돌아와요 부산항에, 개사)→조용필(1972년, 개사)→조용필(1976년, 개사 및 편곡)→조용필(1980년, 편곡) 버전으로 진화한 것이다.
일본에서도 널리 불린 ‘돌아와요 부산항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널리 알려져 수많은 일본 가수들이 리메이크했다. 일본에서 정식 싱글로 처음 발매한 가수는 코믹 엔카 그룹 도노사마 킹즈로, 1979년 ‘눈물의 부두’라는 곡으로 발매했다. 이후 1983년 아츠미 지로가 '부산항으로 돌아와요'라는 제목으로 정식 발매하면서 7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현재 이 곡은 아츠미 지로의 대표곡 중 하나로 남아있다.
이 외에도 일본 ‘엔카의 여왕’이라 불리는 미소라 히바리도 이 곡을 리메이크 하였고, ‘첨밀밀’을 부른 대만 출신의 유명가수인 등려군도 일본어 버전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등려군은 중국어 버전으로 최희준의 ‘하숙생’, 한명숙의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도 부른 바 있다.
일본에서 활약했던 김연자와 계은숙, 유명 미녀 엔카 가수인 야시로 아키, 모리 마사코, 흑인 엔카 가수 제로도 리메이크를 해서 불렀다. 일본 제목인 ‘釜山港へ帰れ’로 유튜브에 검색하면 20여 명 일본 가수들의 리메이크를 볼 수 있다.
일본어 버전의 특징은 가사가 항구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라는 내용으로 수정이 되었으며, 독특하게도 가사 중간의 ‘부산항’과 후렴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어로 번역하지 않고 한국어 발음 그대로 부른다는 것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산갈매기’와 함께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 응원가로도 유명하다. 부산 사직구장에서 롯데가 7~9회 역전승 했을 때 신문지의 물결과 함께 울려 퍼지는 ‘부산갈매기’와 ‘돌아와요 부산항에’ 합창은 장엄하기까지 할 정도이다.
과거 마산야구장에서 롯데 자이언츠 제2 홈경기가 열릴 때는 가사의 ‘부산’ 부분을 모두 ‘마산’으로 바꾸고 노래 제목도 ‘돌아와요 마산항에’로 바꿔 불렀으나, 2012년 NC 다이노스가 창단된 이후부터 ‘돌아와요 마산항에’는 더 이상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2014년부터 롯데 자이언츠가 울산 문수야구장에서 제2홈경기를 열면서 이 경기장에서는 가사의 ‘부산’ 부분이 ‘울산’으로 바뀌고 제목도 ‘돌아와요 울산항에’로 바뀌었다. 하지만 오륙도를 돌아서 울산항으로 가는 뱃길은 없다. 그래서 울산 홈경기에서는 ‘동백섬’과 ‘오륙도’ 부분을 ‘방어진’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가왕’ 조용필의 탄생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빅 히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조용필은 뜨거운 대중의 반응을 만끽하며 방송 출연 및 밤무대를 휩쓸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1970년대 연예계를 강타했던 대마초 파동이 그냥 비켜가지 않았다.
그는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4년 간 가요계를 떠났다가, 1979년 해금조치와 동시에 그룹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조용필은 1980년 정규 1집 음반 ‘창밖의 여자’를 발표했다. 조용필의 이 정규 1집 음반은 대한민국 최초로 100만장 이상 팔린(밀리언 셀러) 단일 음반이다.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빅히트하면서 1980년대 독보적인 최고의 가수가 된다.
조용필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KBS·MBC 등 각 방송사의 가수왕상·최고인기가수상·최우수남자가수상 등 대중가요와 관련된 상을 휩쓸었다. 그는 1980년대 KBS·MBC 가수왕 합계 10번, KBS '가요톱텐' 1위 69번, 공연 횟수 합계 1135번, 1999년 누적 앨범판매 1000만 돌파 등 한국 가요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86년 말 더 이상 가수왕에 오르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뒤에는 거의 방송 활동을 하지 않고, 해외와 국내에서 라이브 공연에 주력했다. 조용필은 록과 발라드, 트로트와 한국 민요를 리메이크하는 등 대중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면서 1980년 1집 ‘창밖의 여자’를 시작으로 2013년 ‘헬로(Hello)’까지 총 19집의 앨범을 발표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오빠부대’로 불리는 젊은 여성 팬층을 탄생시켰다. 당시 조용필이 무대에서 ‘비련’의 첫 소절인 ‘기도하는~’을 내지르면 장내는 “꺄악~” “오빠~”를 외치는 여성팬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조용필은 1986년에 일본에 진출하여 발매한 앨범 ‘추억의 미아1’이 100만장 이상 판매되는 대성과를 거두어 그 해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였다.

남인수 이미자 나훈아, 그리고 조용필
한국 가요사에 있어서 최고의 가수는 누구이며 최고의 노래는 무슨 곡일까?
좀 오래된 조사이지만 1999년 12월 22일 MBC가 ‘20세기 한국인의 노래 100곡’에 관해 서울시민 1011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위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였고,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양희은의 ‘아침이슬’, 민요 ‘아리랑’ 그리고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뒤를 이었다. 최고의 가수로는 조용필, 나훈아, 이미자, 조성모, 송대관, 설운도, 현철, 엄정화, 김건모, 주현미 등이 꼽혔다.
같은해 동아일보도 한 세기 동안 대중음악사를 수놓았던 국내 주요 뮤지션 10명을 정리했다. ‘이난영, 남인수, 현인, 이미자, 패티김, 나훈아, 김민기, 신중현, 조용필,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들이다. 동아일보 기사의 조용필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20세기의 단 한 뮤지션을 꼽으라면 이 사람이다. 포크를 계승한 한국 가요 문법의 완성, 보컬과 작곡의 한국적 정체성, 밴드와 녹음에 대한 집중투자, 서구 팝에 대한 한국 가요의 시장 우위 확립 등 업적이 찬란하다.”(1999년 12월 28일자 15면)
한국 가요사에는 수많은 스타 가수들이 명멸했다. 1940~50년대 쌍벽을 이루며 가요계를 양분했던 남인수와 현인, 1960년대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와 최희준 패티김 김상희 남진 나훈아, 그리고 배호와 신중현 문주란 등이 가요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70년대 들어선 김민기와 양희은, 송창식 등이 포크 음악의 새 장을 열었고, 하춘화 송대관 최헌 윤수일 등이 당대를 풍미했으며 ‘혜은이 vs 이은하’의 라이벌 구도도 있었다. 1980년대에는 조용필의 독주에 맞서 이용과 전영록, 그리고 윤시내 심수봉 주현미 현철 태진아 설운도 이문세 김수철 정수라 나미 이선희 등이 각축을 벌였다.
1990년대 이후엔 변진섭 신승훈 김건모 조성모 장윤정 백지영 등이 가요계를 주름 잡았고, 서태지와 아이들·H.O.T·god·핑클·보아·비·동방신기·슈퍼주니어·빅뱅·소녀시대 등이 새로운 음악세계를 개척했다. 한편 싸이와 방탄소년단(BTS)은 미국 빌보드 차트 최상위권에 오르면서 한국을 넘어 글로벌 가수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이 많은 가수들 중 가장 뛰어난 TOP5를 꼽으라면 나는 ‘이미자, 나훈아, 신중현, 조용필, 서태지’ 이렇게 5명을 꼽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또 한 명만 꼽으라면 누가 뭐래도 주저없이 ‘조용필’을 선택할 것이다.
조용필은 그런 가수다.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