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시 한 편

바람이 제법 쌀쌀해졌지만, 여전히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날들입니다. 맑은 날의 푸른 하늘과 아직 거리에 남아있는 울긋불긋한 단풍잎을 보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 계절을 만끽하고 싶어집니다. 오늘은 이렇게 가을의 끝자락이 아쉬운 11월에 읽기 좋은 따뜻한 시집 한 권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풀꽃 시인’ 나태주 님의 신작 시집, 「버킷 리스트」입니다. 작가님을 꼭 닮은 듯한 할아버지가 구름 위에서 꽃잎 나팔을 부는 듯한 표지 그림부터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리운 날에는 그림을, 쓸쓸한 날에는 음악을’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너를 생각하고 싶다’는 시인의 말이 마치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여 첫 장을 넘기기 전부터 깊은 공감을 자아냅니다.
풀꽃 시인, 나태주를 만나다
책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시구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을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겁니다. 저는 특히 그의 시에 담긴 섬세하고 여성적인 감수성, 그리고 세상을 향한 따뜻한 사랑 때문에 작가님을 더욱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때로는 아내와 딸에 대한 마음을 담은 시들을 통해 가족을 향한 그의 깊고 따뜻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시가 더욱 진실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시집 「버킷 리스트」에는 동명의 서시 ‘버킷 리스트’를 시작으로 마지막 시 ‘지구 떠나는 날’, 그리고 에필로그 ‘시로 쓴 버킷 리스트’까지, 무려 36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한 편씩 읽으며 1년을 보낼 수 있는 구성이지요. 여기에 지연리 님의 아기자기하고 예쁜 삽화가 더해져, 마치 한 권의 아름다운 시화전을 감상하는 듯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글쓰기의 어려움과 인생의 기록
책 첫 문장 쓰기가 어렵다
아니, 첫마디 말 하나
단어 하나 쓰기가 어렵다
무어라 쓸까?
생각 끝에 ‘인생’이라고 써본다
그런 다음 ‘기억’, 그리고 ‘나’라고 써본다
그렇구나!
책은 내 인생의 기억을 쓰는 것이었구나
(p.23)
누구나 글을 쓰기 위해 고뇌의 시간을 보냅니다. 수많은 작품을 써 오신 나태주 시인께서는 쉽게 글을 쓰시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 시를 읽고는 글을 쓰는 모든 이가 겪는 창작의 고통은 다르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글쓰기는, 책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과 기억을 녹여내는 지난한 과정이라는 시인의 고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작가가 온 인생을 담아 써 내려간 글을, 우리는 얼마나 진중한 자세로 읽어왔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삶, 얻음과 잃음의 기로에서
삶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어느 것을 잡고
어느 것을 놓을 것인가?
오늘도 그것은 나에게
풀기 힘든 문제.
(p.167)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손에 쥔 것을 놓아야만 새로운 것을 잡을 수 있듯,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얻고 동시에 무언가를 잃어가며 살아갑니다. 시인은 인생의 연륜이 깊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을 잡고 어느 것을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풀기 힘든 문제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과자 두 개를 두고 고민하는 것이나, 어른이 정의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나, 그 선택의 무게는 각자의 삶에서 똑같이 무겁고 중요합니다. 이 시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짊어진 삶의 무게를 따뜻하게 위로해 줍니다.
함께여서 비로소 ‘완성’되는 우리
완성
집에 밥이 있어도 나는
아내 없으면 밥을 먹지 않는 사람
내가 데려다 주지 않으면 아내는
서울 딸네 집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면서
반편이 인간으로 완성되고 말았다.
(p.319)
‘반편이’라는 단어는 ‘지능이 보통 사람보다 아주 낮은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각자 완전한 개체였던 두 사람이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존재가 되어, 이제는 혼자서는 부족한 ‘반편이’가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존재가 되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서로에게 스며들어 자신을 덜어내고 상대를 채워주며, 마침내 ‘너 없이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부부의 사랑. 나와 상대를 동격으로 존중하며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이 아름다운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시인의 가장 큰 꿈, ‘버킷 리스트’
노벨문학상을 준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더 크고도 시급한 버킷 리스트,
남아 있는 오직 하나
나의 꿈이라면
우리나라 사람 아닌 다른 나라 사람
그 가운데서도 젊고 어리고 순한 가슴을 지닌
다른 나라의 젊은 청춘들이
우리글 한글을 배워
내가 쓴 한글 시를
한글 그대로 읽어 주는
것이랍니다
(시로 쓴 버킷 리스트 발췌, p.364~365)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적는 ‘버킷 리스트’. 평생을 시와 함께한 노시인의 마지막 꿈은 무엇일까요? 그는 노벨문학상보다 더 크고 시급한 꿈으로, 외국의 젊은이들이 우리글 한글을 배워 자신의 시를 한글 그대로 읽어주는 것을 꼽습니다. 스스로 ‘허황된 꿈’이라며 겸손해하지만, K-컬처와 한류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쓰는 지금, 이 꿈은 이미 이루어졌거나 곧 이루어질 현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글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시인의 마음이 국경을 넘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11월,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시집을 읽다 보니 어느덧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특히 쌀쌀해지는 11월의 감성과 꼭 맞는 시가 있어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11월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p.214)
어느덧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한 해. 시인의 말처럼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왔고, 버리기엔 아까운 시간입니다. 짧아지는 낮의 길이만큼이나 우리에게 남은 인생의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에 조급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시인은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라고 다짐합니다. 아쉬움과 후회는 털어버리고, 남은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채워나가야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 「버킷 리스트」는 쌀쌀한 계절, 우리 마음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책입니다. 곁에 두고 매일 한 편씩 아껴 읽으며,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연말을 준비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도서 정보]
• 저자: 나태주
• 그림: 지연리
• 출판: 열림원
• 발행: 2024.08.08.
※ 본 포스팅은 도서관 대여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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