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지만 끈덕지게, 빛을 향하여

한겨레21 2024. 10. 24. 11:3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표지이야기]한강 소설을 관통하는 ‘안티고네’들의 입맞춤… 백년을 건너가 울려 퍼질 ‘입술의 엘레지’
한강 작가가 미국 카네기 인터내셔널에서 선보인 설치 미술 작품 ‘더 퓨너럴’(The Funeral, 2018). © Han Kang

한강 작가는 미국 카네기 인터내셔널에서 ‘더 퓨너럴’(The Funeral, 2018)이라는 설치 미술 작품을 전시한 바 있다. 흰 눈 위에 빽빽이 들어선 앙상한 나무들이 이루고 있는 검은 숲을 표현한 이 작품은 ‘작별하지 않는다’(2021)의 첫 장면과 맞닿아 있다. 소설은 이렇게 표현한다.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 위로 흩어지던 눈발이, 잘린 우듬지마다 소금처럼 쌓여 빛나던 눈송이들이 생시처럼 생생했다.” 그런데 왜 이 아름다운 작품이 ‘장례식’이란 선연한 제목을 달고 있단 말인가? 그 꿈속에서 곧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 사이로 빠르게 바다가 밀려 들어오고, 무덤들이 잠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화자는 바다가 더 들어오기 전에 그 많은 무덤 아래 놓인 뼈를 옮겨야 한다는 초조함 속에서 달리기 시작하다 깬다. 깨어난 직후 그는 이 꿈이 ‘소년이 온다’(2014) 집필 이후 내내 따라다녔던 무거운 쇳날 같은 고통임을 알아차린다.

옳음을 지키기 위해 저항을 품은 이들

끔찍한 비극으로부터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는 절망의 낙차는 한강의 소설 속 인물들을 ‘안티고네’로 만들어왔다. 안티고네란 어떤 인물인가. 오이디푸스의 사후, 안티고네의 두 오빠는 왕권 다툼을 하다 서로를 죽인다. 당시 테베의 왕이었던 크레온은 이 두 사람을 애국자와 반역자로 나누어, 한쪽에는 성대히 장례를 치러주고 한쪽에는 들판에 방치하도록 지시한다. 이 명령 앞에 모든 이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안티고네만이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방치된 시체를 묻어주고자 홀로 나선다. 그러니 그는 왕권 같은 권력의 자리에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때로 그 폭압적 힘을 거슬러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감행하는 자다. 오이디푸스가 어떤 노력으로도 신의 간계와 운명을 넘어설 수 없음에 가장 처절하게 절망하는 인물이었다면, 반대로 그의 딸 안티고네는 세상의 어떤 권력으로도 인간의 근본적인 윤리를 꺾을 수 없음을 가장 의연하게 드러내는 인물이다. 5월 광주 항쟁을 그린 ‘소년이 온다’에서 합동 추도식을 치르지 못한 시체들을 지키며 초를 켰던 동호, 두려움에 떨리는 눈으로도 본능을 거슬러 싸우기로 결단하고 도청에 남았던 자들, 그리고 그 죽음들을 결코 잊지 않으려 애쓰는 모든 인물이 안티고네였다. 제주 4·3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끔찍한 학살 이후 오빠의 생존 가능성을 끝까지 믿으며 그 흔적을 추적해가는 정심, 이런 엄마의 기억을 확장해 동아시아에 있었던 여러 비극적 학살의 역사를 다큐멘터리로 기록해온 인선, 인선의 작은 새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제주의 폭설을 뚫고 가는 경하 역시 안티고네다. 긴 역사에 걸친 절멸과 혐오의 메커니즘을 잊지 않으려 하는 한강 소설 속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안티고네가 된다. 이 안티고네들의 손에는 흰 천이 들려 있고, 입술 사이에서는 죽지 말라는 애원의 말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 안티고네는 국가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학살의 현장에서만 불현듯 등장하는 것일까. 아니, 우리는 자신을 짓누르는 폭력과 고통의 세계를 고요하지만 격렬하게 거부하는 내적 투쟁을 한강의 초기작부터 내내 보아온 것 같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부터 ‘채식주의자’에 이르는 도정에서 우리가 만난 ‘연하지만 끈덕진 식물성의 세계’란 바로 그런 저항을 품고 있지 않았던가. 한강 소설에서 미학적 전위와 정치적 전위는 이미 한 몸으로 이어져온 셈이다. 생을 향한 끈질긴 갈망으로 핏빛 세계를 딛고 일어서는 이 형상의 원형을 나는 무엇보다 ‘흰’을 끌고 가는 목소리에서 본다.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에 놓인 특별한 이 책에는 내밀한 자전적 고백이 담겨 있다. 작가의 생애 이전, 어머니의 첫아기로 태어나 단 두 시간 동안 살아 있었던 존재가 있었다. 작은 배내옷에서 점점 싸늘해지는 아기를 향해 어머니는 간절하게 말했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한강 작가의 비디오아트 작품. 한강 작가의 비디오아트 누리집(han-kang.net/Visual-Arts)에서 만날 수 있다. © Han Kang

흰색의 이미지로 변주되는 목소리

갓 태어난 존재로서는 미처 해독할 수 없었을 사랑과 고통의 이 목소리는 이 책에서 여러 흰색의 이미지로 변주된다. 그것은 차가운 성에와 서리이고, 하얀 나비의 날개이며, 수천수만의 눈송이들이 되었다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부서지는 파도의 흰 포말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흰색은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 힘”을 가진 굵은소금이자, 우리 안에 너울거리며 끝내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 같은 영혼이다. 글의 서두에서 꺼낸 ‘더 퓨너럴’이라는 설치 미술 작품에 깔려 있는 흰 눈을 표현한 재료가 다름 아닌 소금이라는 사실은 영혼의 근원적인 회복에 대한 작가의 믿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연약하지만 깨끗한 혼들의 형상과 회복의 기척을 한강 특유의 섬세한 언어로 그려낸 소설이 바로 ‘희랍어 시간’이다. 한강의 세계 안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지만, 언어를 본질적 차원에서 탐색하며 끝까지 밀고 나가 독보적으로 아름다운 자리에 가닿은 소설이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은 언어를 잃어가는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다. 여자는 이혼하며 아이의 양육권을 잃은 뒤, 이십 년 만에 다시 언어를 상실하고 침묵의 세계에 잠겨 있다. 어린 시절에 독일로 이민 갔던 남자는 한때 가장 사랑했던 이들과 이별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멀어가는 눈으로 자책과 후회 속에서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이들의 만남이 희랍어를 배우며 이루어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중간태를 쓰는 희랍어는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이자 이미 세상에서 소멸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사라졌던 언어는 두 사람을 연결하는 걸 넘어 어떤 질문들을 발생시키는가. 원치 않는 결별과 잃어가는 감각 속에서 두 사람은 세계의 존재 의미에 대해 거듭 묻는다. 이 세계를 두고 보르헤스는 덧없는 환영 같은 곳이라 말했다는데, “그 꿈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

한강 작가의 비디오아트 작품. 한강 작가의 비디오아트 누리집(han-kang.net/Visual-Arts)에서 만날 수 있다. © Han Kang

무신론자가 발명한 사랑 이야기

과연 신은 존재하는 것인지, 세계는 왜 덧없고 아름다운 것인지, 인간의 혼은 자신을 해치는 어리석은 본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파괴되지 않는 것인지 묻는 소설 속 질문들은 아마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인류 차원의 질문일 것이다. 소설 중반부에 등장하는 “칼레파 타 칼라”라는 희랍어는 “아름다움은 아름다운/어려운/고결한 것이다”라고 세 갈래로 번역된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어렵지만 간신히 고결해지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듯, 정적의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한 걸음씩 나아가 도달한 자리에는 놀랍게도 태양의 흑점에서 시작해 심해에 이르는 우주적인 차원의 입맞춤이 있다.

그러니 이 소설을 두고 두 사람의 입맞춤이 거대한 지하 무덤 ‘카타콤’ 같은 세계를 풍요로운 ‘심해의 숲’으로 바꿔내는 소설이라 요약해볼 수도 있겠다. 세계에는 여전히 이해하거나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하지만, 두 사람은 사이에 놓인 칼을 넘어 “고요하고 희미한 그 기척들, 믿어본 적 없는 신의 파편들”을 찾아낸다. 그 신의 파편들은 상대방의 연약하게 떨리는 목소리이자, 따스한 숨이고, 손바닥 위를 스치는 손가락의 감촉이다. 궁극에는 맞닿은 입술들 또한 영원히 어긋나게 될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이 심해의 숲에 나란히 누워 물거품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이마에, 눈썹에, 두 눈꺼풀에 소중히 입 맞추는 환상적인 장면은 한강의 소설에서 드물고 귀한 평화로운 사랑의 장면이다. 세계의 모든 악과 고통을 바로잡을 만큼 전능하지 않더라도, 선하고 슬퍼하는 신은 반드시 존재할 거라는 소설의 가정은 연인의 형상으로 완성된다. 인간은 연약하고 고통받지만 어느 날 곁에 서늘하게 누운 이의 기척으로 외로움이 문득 환해지는 날이 올 거라 말하는 이 소설은 신의 무정함에 등 돌린 무신론자가 발명한 사랑 이야기다. 또한 이 세계가 피가 흐르고 눈물이 솟는 곳인 동시에 아름답고 성스러운 곳이기도 하다는 걸 응시하며 쓴 ‘입술의 엘레지(悲歌)’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입술은 무엇도 해칠 수 없이 다만 인간을 부드럽게 쓰다듬을 뿐이므로.

한강의 소설에서 반복해서 말해지는 명제는 삶은 끔찍한 비극으로 붕괴되곤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바닥에는 어떤 끈덕진 힘이 자리하고 있어 인간은 다시 밝은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빛을 향해 가볍게 위로 솟구치는 식물의 이미지나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불꽃들로 드러난다. 이 불꽃이 만들어내는 정갈하고 부드러운 생명의기운을 두고 미래를 향한 기도라고 말해도 될까.

2019년 5월25일(현지시간)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강 작가가 자신의 원고를 배내옷 입은 아기처럼 흰 천에 싸서 내려놓고 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라는 제목을 단 이 미공개 원고는 오슬로 공공도서관에 봉인되었다가 2114년 출간될 예정이다. 연합뉴스

결혼식 같기도, 장례식 같기도, 자장가 같기도

한강은 2019년 노르웨이의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가 쓴 ‘사랑하는 아들에게’라는 미공개 원고는 오슬로 공공도서관 ‘침묵의 방’에 봉인되었다가 2114년 미리 심어둔 가문비나무를 통해 출간될 예정이다. 작가는 흰 천을 끌고 숲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 자신의 원고를 배내옷을 입은 아기처럼 흰 천에 싸서 전달했다. 원고와 숲의 결혼식 같기도, 장례식 같기도, 땅을 어루만지는 자장가 같기도 했다는 그 장면은 약 백 년 뒤에도 그 글을 읽을 존재들이 살아남아 있을 것이라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믿음으로써 생겨났다. 그 기적 같은 장면에는 “죽지마, 죽지마라 제발”(‘흰’)이라는 간절한 목소리가 다시 어른거린다. 오랜 침묵을 뚫고 나오는 기도, 세상에 갓 태어난 존재를 어떻게든 살리려는 마음으로 쓰여왔고 앞으로도 계속 쓰일 한강 작가의 ‘입술의 엘레지’는 백 년을 건너가 울려 퍼질 것이다.

강지희 교수.

강지희 문학평론가·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