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욱의 따따부따] 한국 정치, ‘쇼(show)’가 되다

조명이 켜지고 카메라가 표정을 잡는다. 몸싸움과 야유가 교차하는 이 장면은 예능 프로그램의 한 컷처럼 보인다. 하지만 채널을 한 칸만 돌리면 그 무대는 국회다. 한국 정치는 언제부터 설명의 언어를 줄이고, '쇼'와 '팬덤'의 서사(레토릭)로 자신을 연출하게 되었을까. 정치는 본래 설명의 예술이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이유를 밝히고, 타협의 근거를 제시하며, 결과에 책임을 지는 과정이다. 국민을 설득하고 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 언어는 설명보다 연출에 가깝다. 긴 법안의 조문보다 10초짜리 영상으로 판단을 요구하고 있다. 논증의 과정보다 자극적인 장면 하나로 여론을 흔든다.
쇼의 첫 번째 규칙은 선악 구도다. 갈등은 단순할수록 소비가 쉽다. 그래서 정치는 자주 중세시대의 '도덕극'의 형식을 빌린다. '화해적 결말'이 아닌 바로크 시대의 '근대적 갈등'으로 변이한다. 상대는 틀렸을 뿐 아니라 '나쁜 편'이 된다. 현실적 대안을 요구하는 구조적 문제는 배경으로 밀려나고, 개인의 캐릭터만 전면에 선다. 대중은 빠르게 편을 고르고 박수와 야유를 보낸다. 하지만 이 구도는 정책의 질을 끌어올리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쇼의 전개는 팬덤 정치와 결합한다. 정치인은 행위 주체가 아니라 '응원 대상'으로 변질된다. 지지자는 시민이기보다 팬에 가까워진다. 팬덤의 논리는 명확하다. 내 편은 보호해야 하고, 비판은 공격으로 해석된다. 내부의 문제 제기는 배신이 되고, 외부의 지적은 음해가 된다. 정치적 판단은 정책의 효과가 아니라 '우리 편에게 유리한가'로 축소된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분노만 남는다.
팬덤 정치는 한국 정치에 서사를 제공한다. 선거는 '반전의 무대'가 되고, 위기는 오히려 '음해와 핍박'으로 지지층의 위로를 불러일으킨다. 지지율 하락은 잠시 흔들리는 장면일 뿐, 곧 반전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덧붙는다. 이 과정에서 실패의 책임은 흐려진다. 연출되는 쇼에는 다음 회차가 있다. 생방송이 아니라면 당일 회차마저도 편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는 다음 회차로 미룰 수 없는 문제와 그 결과로 인한 파급효과는 온전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팬덤의 충성은 설명보다 결속을 우선시하며, 정치인을 더욱 강경한 연출로 밀어붙인다. 실시간 반응의 과잉도 팬덤 정치를 키운다. 댓글, 해시태그, 여론조사는 응원의 지표가 된다. 메시지는 점점 짧아지고 날카로워진다. 숙고는 우유부단함으로, 조정은 후퇴로 읽힌다. 결과적으로 합의와 조정이라는 정치의 핵심 기능은 무대 뒤로 밀려난다.
그렇다고 팬덤과 '보여주기식' 쇼의 요소를 전부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요소들이 정치의 문턱을 낮추고 정치참여를 확장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과거라면 관심 밖이었을 이슈가 다채로운 사회 관계망을 통해 공유되고, 권력은 더 많은 감시를 받는다. 문제의 해결점은 균형에 있다. 설명과 설득이 전제되지 않는 열광, 책임 없는 결속이 반복될 때 민주주의는 피폐해진다. 한국 정치의 위기는 쇼 그 자체가 아니라, 팬덤의 논리로 모든 갈등을 해결하려는 태도에 있다. 정치는 지지층만의 응원전이 아니라 공동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이다. 상대방의 '다른' 의견은 적이 아니라 '화해와 타협'의 대상이다. 이를 잊는 순간, 박수나 야유마저 사라진 '암전'의 허망한 어둠이 다가올 것이다.
해법은 새롭지 않다. 첫째, 설명과 설득의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왜 필요한 정책인지, 누가 비용을 부담하며 어떻게 시행해 나갈지를 분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둘째, 정책의 속도와 국민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인스턴트식 정책은 '포퓰리즘'의 방증일 뿐이다. 국민은 관객이나 팬이 아니라 공동 제작자가 되어야 한다. 정책의 결과와 책임이 단순히 정권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존립과 국민의 생존을 좌우함을 명심해야 한다. 조명이 꺼진 뒤에도 살아남는 것은 국민의 삶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