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코리아 장현정 씨 인터뷰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저는 코다코리아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는 장현정입니다. 전반적인 활동과 사업에 참여하고 있고 주로 담당하는 건 회계 분야입니다. 이전에는 금융사 고객센터에서 수어 상담을 했어요. 영상통화로 농인분들과 상담하는 일이죠. 제가 3~4년 전에 일을 시작했는데 금융사의 수어 상담사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예요.
코다코리아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어요?
이길보라 감독님의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 상영회를 통해 코다들을 처음 만나고 교류하게 되었어요. 그땐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같이 단체를 설립해보자는 제안을 받았고 작년 정식으로 단체가 설립되면서부터 상근자로 합류했어요.
책 <우리는 코다입니다>를 보면 “코다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을 때 소속감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와요. 그리고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쓴 조기현 작가로부터 ‘영 케어러’ 담론이 부상하면서 ‘영 케어러’라는 단어가 확산되었고요. 자신을 코다와 영 케어러라고 정체화한 과정은 어땠나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통해 코다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됐어요. 그 전에는 ‘청각장애인 누구의 딸’ 이렇게 표현하곤 했는데 제가 스스로를 “코다입니다”라고 하자 단어로부터 소속감이 생겼어요. 중·고등학교 친구들이나 대학 친구들 중 어떤 커뮤니티 안에서도 코다라는 정체성 때문에 100% 소속됐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코다 모임에 들어가고는 공통적인 경험을 나누면서 가족을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혼자 부딪혀왔던 사람들끼리 만나니까 편해요.(웃음)
영 케어러의 경우엔, 뉴스나 책을 통해 이 단어를 접하게 되었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코다로서 살아온 삶이 영 케어러와 다르지 않더라고요. 이 단어가 있기 전에는 딸이니까 효도로써 통역과 병원 동행을 하는 게 당연했어요. 집안의 내밀한 사정까지 알게 된다는 게 어려웠지만요. 빚이나 부모님 건강 상태를 초등학생, 중학생 때부터 알게 되니까 심리적으로 위축되었어요. 그래서 얼른 사회에 나가서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했죠. 물론 주변의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요.

복지 서비스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알려주는 주변의 커뮤니티나 단체는 없었어요?
없었어요. 알음알음 물어봐서 주민센터에 가서 알아본다든가, 사회복지사분들을 통해 알게 되는 것 외에는요. 대부분 친척들한테 도움을 구했어요. 사회복지사가 매칭되는 것도 어떤 소득 수준 이하여야 하는데 부모님이 일을 하고 계시면 수급자가 될 수 없었거든요. 이모 두 분도 농인이셔서 집안에 코다가 많았지만 다들 어리니까 사촌오빠, 사촌언니로서만 존재했지 코다나 농인의 사회적 커뮤니티는 없었죠.
부모님을 돌보고 빨리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부모님에겐 꿈이나 진로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부모님 때문에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정치와 언론에 관심이 생겼고 진로를 그쪽으로 정하고 싶었는데 이게 쉽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길은 아니잖아요. 결국 정치언론학과에 진학했는데요. 원서 쓸 때까지 말을 안 했어요.
언론학을 전공하고 카드사에 입사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취업이 쉽지 않아서 선택한 길이에요. 카드사 상담센터가 말하자면 콜센터잖아요. 가장 빠르게 많이 벌 수 있겠다 싶어서 입사했어요. 수어로 상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보통 수어통역 자격증이 있는 분들은 통역 일을 하시니까 고객센터에서 일하진 않아요. 저는 자격증이 없지만 코다라서 수어를 할 줄 알고요. 코다인 게 장점이 되었죠.
많은 코다들이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청인들의 말을 통역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토로해요.
보통 통역이 필요할 때는 전문용어를 쓰거나 어려운 말을 할 때잖아요. 부모님에게 설명하기 위해 제가 한번 쉽게 풀어야 하는데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때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았어요. 월세가 뭐고 전세가 뭔지…. 계속 공부해야 했어요. 전화도 제가 다 받아야 하고요.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고 예민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게 어려웠어요.

교우 관계는 어땠어요? 청인의 자녀인 친구들과 다름에서 오는 어려움은 없었어요?
친구들과 멀어지는 경험은 없었는데 부모님이 농인이라는 사실을 말하기까지가 고민이 많았죠. 또 학기 초마다 선생님께 부모님에 대해 말해야 하는 상황이 오잖아요. 한번은 선생님이 교실 앞에 나와서 수화를 해보라고 하셨어요. 이 친구의 부모님이 청각장애인이니까 수어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 하면서 보여달라고 한 거죠. 저는 사람들 앞에서 수화하는 걸 안 좋아해요. 코다라고 수어를 다 잘하는 것도 아니고요. 부모님이 농인인 건 부끄럽지 않은데 사회적 인식이 저를 그렇게 만들더라고요. 연민과 동정의 눈길을 받거나 뭔가 신기한 걸 본다는 느낌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부모님 건강은 어떠셨어요? 통역 외에 현정 씨의 돌봄이 필요했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부모님은 계속 편찮으신 상태예요. 아빠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적이 있고 지금은 많이 좋아지셨지만 병원은 계속 다니시고 있어요. 항상 휴대폰에 병원 스케줄이 있어요. 아빠가 병원에 가실 때마다 최대한 같이 가고, 정말 사정이 안 되면 통역사분을 동행하게 하죠. 병원 시간이 너무 일러서 통역사분이 동행하지 못하면 영상통화로 의사와 대화하는 경우도 있어요. 저에게는 터울이 큰 언니가 있어요. 제가 어릴 때는 모든 돌봄을 언니가 했고 언니가 스무 살, 제가 중학생이 되면서 바통 터치가 돼서 (돌봄을) 거의 다 이어받았어요.
그래도 언니의 존재가 많이 의지되었겠네요.
언니가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또 언니가 책임감이 강하다 보니까 미안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언니한테 계속 손을 벌리고 기댔어요.
언니와는 돌봄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 적 있어요?
진지한 분위기에서 하기보다는 은연중에 계속 병원에 가야 하는 게 쉽지 않구나, 그런 얘기를 해요. 21세기인데 아직도 우리가 통역을 다녀야 하냐, 기술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영상으로 하면 안 되냐, 푸념을 늘어놓죠.

돌봄이란 게 쉽지 않잖아요. 이전 인터뷰를 통해 워킹맘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잠을 잘 시간도 없다고 했던 게 기억나요. 더군다나 어릴 때는 친구들과의 약속, 학교 일정을 챙겨야 하는데 내가 아니라 부모님의 일정이 우선되느라 평범한 학창 시절은 아니었겠어요.
학교 다닐 때는 결석이나 조퇴를 하는 일이 많았고 회사에서도 휴가를 자주 썼어요. 다행히 다 이해를 받아서 문제가 되진 않았는데 어쨌든 하루의 시간을 다 보내버리는 거잖아요. 아깝기도 했어요. 최근에 대전에서 서울로 이주해왔는데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부모님이 연세도 많고 편찮으신데 떨어져 살아도 되나, 뭔가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해서요. 대학교도 대전에 있는 곳을 선택했으니 서울 오는 문제로 10년을 고민한 거죠. 이동하거나 (부모님과) 헤어져야 할 때 불안이 항상 있어요.
서울에서 독립하고, 새로운 삶을 찾고 나서의 장점은 뭐예요?
저는 퍼스널 스페이스를 크게 갖고 싶어 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자유로울 수 있는 지금이 좋아요.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코다로서 부모님이 원망스럽지는 않았어요?
사회를 향한 원망이 컸어요. 부모님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다양하지 못해서 주로 공장에서 일하셨어요. 분명 잘하시는 게 있을 텐데 공장만 전전하셔야 한다는 게 원망스러웠어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 일자리를 따라서 이사 다니느라 전학을 다섯 번 정도 했어요. 심지어 같은 학교로 다시 전학 간 적도 있어요.(웃음)
코다가 소외되지 않는 사회 시스템 구축을 위해서 코다코리아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선은 농인의 자녀들이 ‘나는 코다다’, ‘코다에 대해서 알아보자’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부터가 시작인 것 같아요. 저는 인생의 선배나 멘토가 있었다면 좀 더 수월했을 텐데, 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것이 코다코리아 활동을 하게 된 이유가 되었고요. 성인인 코다가 어린 코다에게 영향을 주고 싶다는 게 저희의 장기적인 목표예요. 코다 교육이라든지 코다 캠프를 통해서 어린 코다들에게 멘토가 되어주기도 하면서 코다로서의 삶이 개인적인 어려움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나아가고 정책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어요.

코다코리아에서 정책 제안을 한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우선 학교에 수화 통역사를 배치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영화 <코다>를 보면서도 학교 행사나 일이 있을 때 통역사가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았거든요. 현실적으로 교육청 단위로만 있어도 훨씬 나아지겠죠. 또 그 전에 농인에 대한 교육이나 환경이 개선되어야 자연스럽게 코다의 환경도 바뀐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희도 농인 교육 개선을 위해 농인 단체들과 함께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공론장이 생기고 농인 교육 환경이 개선되면 좋겠어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여쭤봤는데 코다로서의 장점은 뭔가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다양한 경험을 하게 돼요. 코다코리아 슬로건도 “고요의 세계와 소리의 세계를 잇다”거든요. 정말 농인 사회와 청인 사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게 코다예요. 그 정체성이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요.
현정 님은 돌봄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어떤 형태의 돌봄을 받게 되기를 바라세요?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좀 멀어지고 싶은 것 같아요. 저는 돌봄을 계속해와서 돌봄을 하는 사람의 어려움과 고충을 잘 알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돌봄을 요청하기 더 어렵고요. 가족이라는 것에 얽혀 있기보다, 거리가 있는 느슨한 관계로서 서로를 돌보는 관계를 꾸리고 싶어요. 그리고 어려움의 경중을 떠나서 어렵다고 하면 바로 도와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면 좋겠어요. 남들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에서 벗어나도 제가 도움이 필요할 때 지원이 주어지면 좋겠어요.
아직 코다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앞에서 코다로서의 고충을 많이 얘기했는데 정말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코다를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다르거나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회 구성원이에요. 최근 부모님과 여행을 갔는데 휴게소에서 밥을 먹었거든요.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어떤 분이 저희를 보더니 김밥을 주고 가더라고요. 안 받겠다고 했는데 정말 선한 얼굴로 웃으면서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글. 양수복 | 사진. 김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