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운전 회사 대표, 고객 이름으로 시민단체에 “물 한 바가지”

한겨레 2023. 5. 25.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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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사회적기업 마중물대리 장경훈 대표
사회적기업 마중물대리 장경훈 대표. 김소민 자유기고가

소년은 학비를 내지 못해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한테 맞았다. 중학생이 방학 동안 부모님 몰래 아이스케키를 판 돈은 학비에 턱없이 부족했다. 몰락했어도 대구, 칠곡에서 내노라했던 부잣집 자존심에 어른들은 소년이 돈벌이하지 못하게 했다.

“(맞았을 때 느꼈던) 비애감, 자괴감, 모멸감은 말도 못 해요. 그렇게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들을 다시 끌어 올려주는 게 마중물이에요. 펌프에 처음 붓는 물 한 바가지요.”

사회적기업 마중물대리 장경훈(67) 대표 이야기다. 이 대리운전회사는 수익 중 운영비를 빼곤 모두 고객 이름으로 기부한다. 희망제작소, 굿피플, 대한사회복지회 등 전방위로 11년 동안 3억여원 이상을 기부했다. 2021년 보건복지부와 한국사회복지협의회는 이 회사를 ‘지역사회공헌인정기업’으로 뽑았다. 지난달 경기 화성시에 위치한 회사 근처에서 장 대표를 만났다.

“젊어 고생 사서 한다”며 17살에 가출한 그는 충북 제천 한수면 수해복구현장 우체국건축 공사 토목현장에서 모래를 지켰다. 베니어판으로 얼기설기 지어놓은 숙소에서 여름하복 단벌로 여름부터 1월까지 버텼다. 그 뒤 채석장에서 콤프레샤(공기압축기)를 다뤘다. 기름 독이 올랐다. 택시운전 하던 시절, 노무사가 되려고 공부하다 노동법을 알게 됐다. “기사들 하루 사납금 3500원씩 올리면서 월급은 한 3만원정도 올려줘요. 이런 협상이 어디 있어요.” 어용노조에 맞서다 해고됐다. 그는 대법원까지 갔다. 기각됐다. 업계에 “또라이”란 소문이 돌았다. 발전기 수입, 탁송, 카캐리어(자동차 운반 차량) 등 여러 사업도 벌였다. 카캐리어 사업을 할 때는 하청에서 재하청으로 밀리면서 대금이 느닷없이 줄었다. 그는 카캐리어 차주 조직을 만들었다. 기아자동차 카캐리어 노조의 ‘시초’다. 그 뒤로 배차를 받지 못했다. 망했다. “조용히 살면 편하게 벌었을 텐데...내 ‘쪼’대로 사는 거죠.”

대리운전할 때, 그는 ‘쪼’대로 살 수 없었다. 대리회사에서 보험료를 편취하는 등 “말도 안되는 일이 너무 많았”어도, “모욕과 폭력”을 겪었어도 이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징벌할 방법이 없어요. 무력해진 느낌이었어요.” 한강대교에도 두어 번 갔다. 그렇게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 마중물대리 사업 모델을 그렸다. “좋은 회사가 성공해야 다른 사람들도 따라올 거 아니에요.” 그런데 돈이 없었다.

2011년 화성에 대리운전 회사 설립
11년 동안 운영비 빼고 3억 기부
희망제작소 사회혁신사업 3천만원 등
“펌프에 처음 붓는 물 한 바가지죠”
재작년 ‘지역사회공헌기업’ 선정

“앞으론 통일 문제에 관심 가질 터”

2011년 4월 경기 화성 병점중심상가에서 40대 초반 남자를 태웠다. 그 남자 집, 오산까지 15분 거리였다. 그가 구상하는 사업을 이야기하자 그 남자가 말했다. “대박인데요. 돈 있으면 할 거예요? 제가 빌려드릴게요.” 마중물대리의 마중물 5천만원을 빌려준 그 남자는 “실패해도 괜찮으니 투명하고 정직하게 운영하라”고 했다.

연 매출 10억여 원 규모 마중물대리에서 장 대표의 월급은 500만원이다. 이 회사에서 가장 적은 월급은 하루 4시간30분 근무 월 280만원이다. “일한 시간으로 따지면 제 월급이 적어요.” 첫 5년 동안 그도 대리기사로 뛰었다. 부인 이연규 이사는 24시간 콜센터를 맡아 전화를 받았다. 부인이 잘 땐 그가 가수면 상태에서 전화를 지켰다. “이 사업의 핵심은 대리기사와 고객이에요. 나머지 플랫폼이며 사무실은 편의성을 높이는 수단인데 그 수단이 사업을 지배해요. 본말이 전도된 거죠.” 마중물대리 화성 동탄남광장 천막에선 홍보 전단 대신 대리기사들에게 감자, 고구마, 떡을 줬다. “기사들이 쉴 곳이 없거든요.”

그는 ‘마중물’을 오래 꿈꿨다. 도법 스님과 함께 ‘생명평화’ 탁발순례에 참여해 서울, 경기 시민단체를 둘러봤다. 2008년엔 대운하 저지를 위해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도보순례를 함께 했다. “사회를 바꾸려면 누군가 온몸을 던져 일해야 하지 않나요. 그래야 감동이 있죠. 시민 사회단체들이 좋은 일 하는데 다들 돈이 없었어요.”

“굉장히 피곤했는데 이상하게 가고 싶더라고요.” 지난해 12월 22일 희망제작소에서 ‘소셜디자이너클럽 컨퍼런스: 다시 만난 세계, 소셜생태계와 청년’이 열렸다. 커피찌꺼기를 자원으로 되살려 지구를 살리고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고유미 커피클레이 대표, 지역 농산물 새벽배송에 도전하는 김만이 초록코끼리 대표, 대전 시민과 별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창의적 문제해결사 김영진 사회적협동조합 혁신청 이사장, 광주에 청년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과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 김태진 ㈜동네줌인 대표 등이 ‘소셜디자이너’란 이름으로 모여 경험과 아이디어를 나눴다. 인구감소, 지방소멸, 불평등, 기후위기 같은 사회문제를 상상력과 열정으로 해결해보려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전 희망을 봤어요. 젊은 사람들이 ‘나는 이런 삶을 원하고 그걸 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하는데 정말 좋은 거예요. 시궁창 같은 사회에서 산뜻한 샘물을 본 느낌이었어요. 이 청년들이 제대로 성공하는 모습 보여주면 사회가 따라오겠구나 싶었어요.” 그는 희망제작소에 사회혁신사업 후원금으로 3천만 원을 기부했다.

그의 다음 꿈은 통일이다. 왜냐고 물었다. “하고 싶으니까! 왜? 왜가 필요해요? 꼴랑 대리 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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