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태규가 아내를 "하시시박 작가님"이라고 부르는 속사정
지금은 나의 반려자가 된 파트너에게 두 번째 만남에서 프러포즈를 했다.
연애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호감 가는 누군가를 만나고 다투기도 하고 그러다 상처 입고 다독이고 다시 만나는 식의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 버거웠다. 모두가 그런 연애를 하는 건 아니겠지만, 내게는 부담스러운 과정으로만 느껴졌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타인의 세상에 초대된다는 건 새로운 우주를 만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 경험이 실재함을 절감한 건 지금의 파트너를 만났을 때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어떠했는지 떠올려 본다.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누군가와 연애를 했고, 적극적으로 관계 형성에 임했을 텐데….
부모님은 대체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순간 어머니가 가장 역할을 하게 된 이후부터는 두 분이 다정하게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오가는 말다툼이 유일한 교류였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는 은근히 두 분의 이혼을 기대하기도 했다. 이혼은 TV 드라마에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일이었고, 그로 인한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모님은 이혼하지 않으셨고, 나는 사람의 감정이란 경제적인 현실이 가하는 타격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기력해짐을 목격했다.
그런데 이 경험이 나의 못난 연애에 영향을 줬느냐 묻는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른 상태의 나를 찾아보자.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릴 적 웅변을 배웠던게 참으로 후회된다.
경청이 아닌, 큰 소리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부르짖는 법을 배우다니.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일보다 어려운 건,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태도다. 그러나 나는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주워 담지도 못할 말들을 쏟아내는 법을 배웠다. 이 역시 못나기 짝이 없는데, 내 연애를 방해한 결정적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이쯤 되니 누군가 체계적으로 연애를 가르쳐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성공적으로 유혹하는 기술이나 밀고 당기기의 기술 말고, 두 사람이 균형 잡힌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방법을 배우고 싶다. 만약 그런 수업이 있다면 나는 맨 앞줄에 앉아 열심히 많은 것들을 묻고, 또 들을 것이다.
우리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제일 먼저 배운 건 인사였다. 선생님께 인사하기, 친구에게 인사하기, 부모님께 인사하기. 이는 기초적 사회화 교육이자 주변인과의 관계 형성에 필요한 첫 번째 단추다. 이러한 기본적인 교육이 후일의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품성과 태도를 기르는 것일 테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가 정해 놓은 교육과정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성장한 누군가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다. 그 자신은 물론 타인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러한 감정적 학대는 유독 연애에서 두드러진다. 그 어떤 관계보다도 친밀하고 강력하며, 동시에 취약하고 폭력적인 연애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개인의 몫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될 일이다.
관계의 역학 속에서 진심으로 함께 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을 기르기 위한 가이드가 필요하다. 고립보다는 연결을 추구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끊임없는 조정의 과정으로 빚어지는 상호작용을 가르치는 수업이 공교육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과목명은 ‘연애’. 꽤 두툼한 교과서의 맨 마지막 장 제목은 ‘이별’. 별다른 내용 없이 빈 페이지로 남겨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굳이 저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내', '와이프'라고 표현되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