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현대 다이너스티, 구름 위를 나는 듯이

조회수 2022. 5. 21. 08:30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놀랍도록 부드럽다. 마치 구름 위를 나는 듯이


‘그랜저보다 더 비싼 차가 나온다고?’ 놀라웠다. 1990년대 현대 그랜저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세단. 그런데 그보다 고가의 세단이 나온다니, 세간의 이목이 어찌 모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1996년 5월 6일, 뜨거운 감자였던 현대 다이너스티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2세대 그랜저와 다이너스티. 이름을 바꿨지만 부분변경 신차였다
배기량 3.0L급 이상 시장에서 대형 세단 시장에서 선전했던 대우 아카디아

기대만큼의 충격은 없었다. 다이너스티는 사실상 2세대 그랜저를 바탕으로 앞뒤 스타일을 바꾼 부분변경 신차였다. 속내가 빤했다. 현대차는 2.0~3.5L까지 무려 네 개 엔진을 갖춘 방대한 그랜저 라인업에서 3.0~3.5L 상위 모델만 다이너스티로 바꿔 차별화를 꾀했다. 3.0L급 이상 대형 세단 시장에서 그랜저를 꺾은 대우 아카디아를 겨냥한 반격이자, 점차 규모를 키우던 수입차 업계로부터 고급차 시장을 지켜내기 위한 방어책이었다.

왕조(Dynasty)를 뜻하는 이름만큼이나 다이너스티는 화려했다. 재규어 XJ처럼 물결치듯 주름 잡은 보닛과 원형 4등식 헤드램프는 우아했고, 실내엔 고풍스러운 아날로그 시계가 자리 잡았다. 그 안엔 우리나라 최초의 운전석 자세 메모리 시스템 IMS와 뒷좌석 전용 에어컨, 히팅 시트 등 풍부한 편의장비를 담았다. 출시 가격은 3.5L 모델이 4140만원. 한국은행 화폐가치 계산 시스템 기준 오늘날 가치로 7580만원 넘는 호화 세단이었다.

현대차의 전략은 적중했다. 고급차 고객들은 ‘그랜저를 초월한 최고의 세단’이라는 권위를 얻기 위해 서슴없이 지갑을 열었다. 출시 초기 월 2000대 계약고가 몰리면서 출고 기간이 3개월가량 밀렸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독촉 전화 때문에 출고 담당자들이 애를 먹었을 정도라고. 1996년 7개월간 1만275대 판매고를 올리며 당시 2만여 대 규모였던 3.0L 이상 대형차 시장의 절반을 독식한다.

다이너스티 신문 광고. 대놓고 비율을 과장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다이너스티는 최고의 국산차로서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1997년 대선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당시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의 의전차로써 전국을 달렸고(놀랍게도 방탄차다),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초대회장이 북한에 500마리 소를 인도할 때 맨 앞에서 행렬을 이끌었다. 지난해 4월 별세한 영국 여왕의 부군 에든버러 공작이 1999년 우리나라를 찾았을 땐 공작의 의전차로 활약했다. 정주영 회장이 별세할 때까지 탔던 마지막 차 역시 다이너스티다.

다이너스티 크기는 길이 4980mm, 너비 1810mm, 높이 1445mm다

그 영광의 자동차를 출시 후 25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만났다. 첫인상. 참 늘씬하다. 길쭉한 보닛과 트렁크가 앞뒤로 쭉쭉 뻗은 데다가 높이는 한참이나 낮다. 보기에는 5m는 우습게 넘을 듯한데, 실제 길이는 4980mm다. 차체 길이 4990mm 최신 그랜저보다 짧다는 얘기다. 오로지 납작한 비율만으로 거대해 보이는 착시를 유도했다.

물론 그뿐이다. 가까이 다가서면 요즘 차가 얼마나 돼지처럼 살을 찌웠는지 새삼 놀랍다. 납작하고 좁고 그저 길기만 하다. 오늘날 같은 급이라고 볼 수 있는 제네시스 G80(길이×너비×높이 4995×1925×1465mm)과 붙여보면 길이는 단 15mm 짧을 뿐이지만, 너비는 115mm 좁고(1810mm) 높이는 20mm 낮다(1445mm). 좁은 어깨는 너비로 자동차세를 매기는 일본차에 뿌리를 둔 흔적이기도 하다(다이너스티 밑바탕인 2세대 그랜저는 현대차와 미쓰비시가 함께 개발했다).

위쪽만 열려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던 트렁크. 길이가 다른 차 보닛만큼 길다

역시 고급차다. 문짝이 얇은데 여닫히는 감각은 신기하게도 묵직하다. 두툼한 철문처럼 괜히 탑승자를 보호하는 듯 든든하달까. 사실 실제로 좀 믿어도 좋다. 그 안엔 ‘150mm 초광폭 도어 세이프티 빔’이 들어있다. 말 나온 김에 하는 얘긴데, 다이너스티는 천장에 ‘1.0t 루프강판’을 쓰고 C필러엔 ‘대형 멤버’ 를 집어넣어 그랜저보다 더 튼튼하게 손봤다.

운전석에 앉으면 가장 먼저 광활한 보닛 위에 우뚝 선 다이너스티 전용 후드톱 엠블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가 최고급 세단에 앉아 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차가 현역이던 시절엔 저 엠블럼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눈길을 안으로 옮기면 아낌없이 화려한 실내가 펼쳐진다. 타원형 아날로그 시계와 붉은빛 장미목 무늬 장식이 1990년대 호텔 인테리어를 보는 듯 고풍스럽다. 무엇보다 마감이 훌륭하다. 손에 닿는 모든 소재가 폭신하며, 창틀을 감싸는 고무 마감재마저 부드러운 천 소재로 감쌌다. 문짝 아래는 신발 자국이 남지 않도록 직물 마감재를 덧붙였고, 놀랍게도 발을 은은히 비추는 조명까지 들어있다. 괜히 현대차 기함이 아니다.

운전석 쪽으로 치우친 엔진이 보이는가? 일본 뿌리의 흔적이다

차 키를 돌려 V6 엔진을 깨웠다. 시승차는 V6 2.5L 사이클론 엔진을 얹은 2001년형 2.5 시그니처 모델(출시 이듬해 2.5L 모델이 등장했다). 무려 20년 세월 동안 29만km를 달려왔다. 그런데도 6기통 세단답게 조용하다. 어느 정도 진동이 전해져 오지만, 6기통 특유의 부드러운 회전질감 덕에 불쾌하진 않다. 자, 그럼 출발해볼까?

힘이 아주 장사다. 시프트레버를 D로 옮겼을 뿐인데 가속 페달 안 밟아도 시속 20km까지 혼자 잘도 달려 나간다. 이는 1990년대 자동변속기 자동차들의 특징. 덕분에 오르막에서 뒤로 밀리는 현상이 적다. 다만 정체 상황에서는 쓸데없이 브레이크를 자주 밟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가속 페달을 살짝 더 밟으면 길쭉한 보닛을 치켜들고 나아간다. 맞다. 서스펜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르다. ‘물침대’라는 별명이 딱 맞다. 더욱이 이토록 큰 차가 겨우 16인치 타이어를 달고 있으니 자잘한 노면 정보는 전혀 느낄 수 없다. 어떤 길 위에서든 매끈한 지하주차장을 달릴 때처럼 미끄러지듯 흐른다.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2007년형 현대 에쿠스보다 더 부드럽다.

속도 높여 달릴 때는 마치 배를 탄 기분이다. 일반 자동차가 뾰족한 모서리에 고무 씌우듯 충격을 거르는 감각이라면, 다이너스티는 모서리를 물에 불려서 아예 녹여버리는 감각이다. 어떤 충격도 서스펜션을 거치면 부드럽다. 대신 그만큼 노면 충격을 오래 머금어 꿀렁꿀렁 길쭉한 차체를 앞뒤로 느긋하게 흔든다. 안정감 따윈 없으나 큰 차체를 물 흐르듯 조종하는 기분이 썩 만족스럽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른한 승차감과 V형 6기통 엔진 특유의 정교한 회전 소리를 곁들인 주행감이 풍요롭기 그지없다. 노면 소리와 바람 소리도 옛날차 답지 않게 꼼꼼히 틀어막았다. 실제로 다이너스티는 정숙성을 높이기 위해 그랜저보다 흡차음재를 대폭 보강했다.

그러나 여유는 어디까지나 고속으로 크루징할 때 얘기다. 가속할 땐 4단 변속기가 답답하다. 변속 충격이 클 뿐 아니라, 고단 기어를 너무 끈덕지게 물고 늘어진다. 가령 오르막길 앞에서 가속 페달을 더 밟아도 묵묵부답이다. 분명 엔진은 스로틀을 더 열었겠지만, 변속기가 고단 기어를 고집하니 힘을 못 낸다. 기어를 바꿀 때까지 가속 페달을 꾹 밟으면 그땐 또 엔진이 성질이 잔뜩 부리며 돌진한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수동으로 조작해야 마음 편하다.

힘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배기량이 2.5L에 달하는 만큼, 최고출력 162마력, 최대토크 20.8kg·m 적잖은 힘을 낸다. 그래서 가속은 준수하다. 다만 물속에서 헛발질하는 듯 동력 손실 큰 변속기가 힘을 깎아 먹는 느낌이다. 제원상 최고시속은 195km다.

연비는 어떨까. 약 200km를 실제로 주행하는 동안 쭉쭉 떨어지는 계기판 연료 바늘을 목격했다. 처음엔 연료탱크가 작은 줄 알았더니 제원상 크기가 72L에 달한다. 6기통 엔진이 1710kg 덩치를 끌면서 기름을 부어 먹는 모양이다. 1999년 기준 공인 연비는 1L에 8.78km였다.

팔걸이 리모컨과, 거울, 그리고 재떨이까지. 예스럽지만 나름대로 편의장비가 풍족하다

시승은 모두 마치고 보니 다음 일정까지 2시간가량 쉴 틈이 생겼다. ‘뒷좌석 한 번 체험해 볼까?’ 직접 앉아보면 실내 길이 1950mm 당시 국산차 중 가장 큰 차였는데도, 공간은 오늘날 쏘나타만도 못하다. 그런데도 조수석 뒤쪽 ‘회장님 자리’에서 2시간 동안 한 번도 안 깨고 꿀잠 잘 수 있었다. 뒷좌석 전동 슬라이딩으로 등받이를 눕히고, 앞좌석 등받이 중간이 발판으로 빠지는 ‘조수석 릴랙스 시트’ 기능을 쓰면 웬만한 요즘 F세그먼트 세단도 부럽지 않다. 정말 편하다. 좁은 공간에서 편안한 자세를 구현해낸 번뜩이는 아이디어다.

후기형은 디테일을 손봐 훨씬 세련스럽다

현대 다이너스티는 당시 우리나라 대형 세단 고객이 원했던 매력 요소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장엄한 스타일, 매끈한 승차감, 풍요로운 편의장비, 철저한 방음 대책까지. 2세대 그랜저를 바탕으로 우리 취향을 여실히 담아냈다. 승차감만큼은 오늘날 대형 세단보다도 더 부드럽다. 정말 구름 위를 떠다니는 느낌이랄까. 노골적일 정도로 또렷했던 성격이 고가 대형 세단으로서 장장 10년의 역사를 이어갔던 비결은 아니었을까.

윤지수 사진 이영석



다이너스티에 얽힌 시시콜콜 이야기

최초의 기록을 쓰다

최근 메르세데스-벤츠가 S-클래스를 내놓으며 세계 최초로 뒷좌석 에어백을 달았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웃기지 마시라. 1997년 다이너스티엔 이미 조수석 뒷자리에 뒷좌석 전면 에어백을 달고 있었다. 내비게이션과 뒷좌석 전용 TV를 최초로 얹은 국산차도 다이너스티다.

미쓰비시가 탐냈다

수술이 성공적이었던 모양이다. 현대차가 1996년 6월 다이너스티를 내놓자, 한 달 만에 미쓰비시가 즉각 디자인 기술 수출을 요청해왔다. 국내 제조사가 처음으로 선진국에 디자인을 수출할 길이 열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실제 일본 출시는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리무진

1997년 허리를 늘린 다이너스티 리무진이 등장했다. 에쿠스 리무진이나 체어맨 리무진처럼 앞뒤 문짝 사이를 늘린 스트레치드 리무진이 아닌 뒤쪽 문을 늘린 롱휠베이스 스타일이다. 우리나라 최초 리무진이자 처음으로 길이 5m를 넘은 국산차였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