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터지게 하는 유머.. 난파선 같은 침울한 삶에 '위안'이 되다


■ 서동욱의 지식카페 - (27) 유머
익살은 타인을 즐겁게 해주고 대화 상대방과 쟁점에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는 ‘지혜의 길’ 제공
유머가 통용 안되는 사회는 냉혹한 법의 광기만 존재… 촌철살인의 농담, 심오한 사상 전달 여부 떠나 ‘꿈’ 선사
닐 사이먼의 희곡들과 커트 보니것의 소설들만 읽으며 지낸 적이 있다. 늪지대 속으로 빠져드는 난파선 같은 침울한 삶은, 폭죽처럼 웃음을 터지게 하는 저들의 익살만이 일으켜 세워줄 수 있었다. ‘빌록시 블루스’(닐 사이먼)에서 군인들의 시답지 않은 대화들, ‘제5도살장’(커트 보니것)의 ‘웃픈’ 광경들은 갑자기 마개가 열리며 오렌지 향과 탄산가루로 된 인공 햇살을 회색 하늘에 가득 뿌리는 환타 한 병 같다. 유머가 날씨 자체를 바꾼다.
유머는 타인과의 관계를 즐겁게 해주고, 다루는 주제의 무거움 때문에 생기는 대화 상대자와의 경직된 관계를 풀어서, 쟁점에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는 지혜의 길을 열어준다. 그러니 유머는 축복이 아닌가? 그래서 프로이트는 ‘유머’라는 글에서 말한다. “유머는 희귀하고도 귀중한 재질이다.”(정장진 역) 그런데 이 말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다른 사람이 들려주는 유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유머를 구사한다는 것은 곧 실언한다는 것이고 이를 빌미로 자신이 고발당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 한마디로 후회할 괜한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머가 통용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인 사회가 달성됐을 때, 그것은 냉혹한 법과 답답한 당위의 눈치를 보며 겨우 자신의 안전한 길을 찾는 일만 할 수 있는 겨울이 도래했다는 뜻이다. 요컨대 유머의 유무는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웃음 없는 냉혹한 법만으로 이뤄진 사회의 광기를 그대로 보여 준 작품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인간은 하고많은 동물 가운데서도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이윤기 역) 그러나 신에게 복종하는 냉혹한 질서를 세우기 위해선 웃음(유머) 자체를 근절해야 한다.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허약함, 부패, 우리 육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웃음은 잠시 동안 범부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을 두렵게 여기는 마음은 곧 법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저 두려운 법을 지키기 위해, 웃음의 비밀을 알려주는 책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접근하는 자들을 죽이는 살인이 벌어진다.
그러니 유머의 위대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유머는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발생하는 것일까? 베르그송의 ‘웃음’의 몇 구절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이야기들을 보자. “대형 여객선이 난파된 적이 있었는데, 일부 승객만이 구명보트로 간신히 구조됐다. 그런데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용감하게 뛰어들었던 세관원들이 던진 첫 질문이 ‘혹시 뭐 신고하실 것 없으세요?’였다. 이와 유사한 예로 좀 더 교묘한 것이 있다. 열차에서 범죄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한 국회의원이 장관에게 말한다. ‘살인자는 피해자를 죽인 다음 플랫폼의 반대쪽으로 뛰어내렸는데, 명백한 교통 법규 위반입니다.’”(정연복 역) 이 이야기들은 왜 우리를 웃게 만드는 걸까? 기계적인 규칙성 또는 자동적인 사회적 규정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적 규정은 현실의 절박한 상황들에 대해 눈감고 자신의 의무만을 기계적으로 수행한다. 이 경직성의 한심함이 드러날 때 웃음이 터진다. “경직성이 웃음거리이며, 웃음은 이에 대한 징벌인 셈이다.” 그러니 저 유머는 사회적 규정의 엄격성에 극단적으로 충실함으로써 역으로 그 규정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희극성을 낳는 원인에는 사회생활에 미미하게 위배되는 (또한 특이하게 위배되는) 무엇인가가 있게 마련이다.”
유머는 이렇게 마비된 사회에 벌을 내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머는 철학 속으로, 존재론 속으로 파고든다. 철학자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스토아학파, 특히 철학자 크리시포스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크리시포스의 정신은 한마디로 유머다. 들뢰즈는 그의 익살에 대해 말한다. “크리시포스가 말했듯이, ‘당신이 짐수레라는 말을 할 때, 짐수레가 당신의 입을 지나간다.’ 그리고 이것이 짐수레의 이데아라면, 그것은 더 좋지도 더 편리하지도 않다.”(이정우 역) 이 농담 같은 말은 플라톤주의를 반박하고 있다. ‘짐수레’라는 말의 의미는 현상적인 세계 저편 어딘가에 있는 초월적인 이데아(초월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언어 안에 있을 뿐이다. 익살스럽게 말하면, 언어를 구사하는 입을 지나갈 뿐이다. 짐수레의 이데아가 있더라도 그것은 여느 평범한 짐수레보다 좋지도 편리하지도 않다. 즉 실상은 그저 내재적인 세계 안의 짐수레들만 있지, 그 세계를 초월한 이상적인 짐수레의 이데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스토아학파는 초월적인 세계를 반박하기 위해 유머를 사용한다. 이 ‘유머’란, 대화 속에서 이데아를 발견하기 위한 방식인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에 맞서는 화법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등장 인물 트라시마코스가 ‘잘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라고 부른 이것은 누가 뭘 물어도 무지한 척하며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이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서 궁극적으로는 진리(이데아)에 도달하게끔 하는 화법이다.
유머의 위대함은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만 있지는 않다. 그것은 인간 마음의 한 비밀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유머의 미덕을 고통을 방어하는 힘에서 찾는다. 지나치게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갈등이 별것 아닌 듯 유머러스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보자. “그는 다른 사람들을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대하는 것인데, 이럴 때 그는 어린아이에게는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는 이해관계와 고통들을 미소를 지으며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된다.” 이런 관계는 한 사람 안에서도 성립한다. 한 사람 안에는 ‘초자아(Uber-Ich)’와 ‘자아(Ich)’가 있다. 초자아는 부모가 차지하고 있던 위상이 한 사람 안으로 내면화한 것이다. 초자아는 자아의 이상적인 상이기도 하며, 자아가 판단 기준으로 삼는 금지와 명령을 형성하기도 한다. 즉 초자아는 한 사람의 내면에서 자아에 대해 부모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초자아는 자아에 대해 엄격하고 무서운 주인의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겁에 질려 있는 자아에게 유머를 통해 위안이 가득 담긴 말을 해주는 자가 정말로 초자아”이다. 인간에게는 무시무시하게 위험한 사건들이 닥친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도 있고,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들의 비방에 누명을 쓸 수도 있다. 이런 어려운 국면 속에서 초자아는 자아에게 여유를 찾아주고자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이것이 그렇게 위험해 보이는 세계다. 그러나 애들 장난이지, 기껏해야 농담거리밖에는 안 되는 애들 장난이지!” 프로이트의 표현이다. 이렇게 자아가 처한 상황을 가볍게 만들고 부모가 아이를 보듬듯 어루만져주는 것, 그것이 유머다.
이런 프로이트의 유머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같은 일본 근대작가의 문장의 본질을 이루기도 한다. 소세키는 자신의 산문을, 하이쿠에서 유래한 ‘사생문’이라고 일컬었다.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이 사생문의 본질이 바로 저 프로이트적인 유머라고 말한다. 그는 유머에 대한 프로이트의 문장을 인용하며 말한다. “‘(유머를 지닌) 이 사람은 타인에 대해 어른이 아이를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소세키의 ‘사생문’에 관한 설명과 다를 바 없다. 소세키가 말하는 ‘사생문’의 본질은 유머라고 해도 좋다.”(박유하 역) 소세키에게 글쓰기라는 것은 글쓰기의 대상을 자식처럼 어루만지고, 심각한 상황에 유머라는 완충재를 집어넣는 일이다. 이런 문장이 달성된다면, 심오한 사상의 전달 여부를 떠나서 글쓰기 자체가 새끼를 핥는 어미의 혀처럼 인간에게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유머는 위협받는다. ‘우신예찬’이란 농담으로 대표되는 에라스뮈스의 자유정신이 초석을 놓은 근대 소설들, 즉 ‘신이 추방된 진정한 인간의 이야기들’은 유머와 함께 태어났다. 프랑스의 라블레가 쓴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연작, 스페인의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 영국의 스턴이 쓴 ‘트리스트람 샌디’가 바로 유머로 가득 찬 수다, 신성한 도덕법을 깨트리는 잡소리다. 이 자유로운 유머는 영원한 것일까?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쓴다. “유머는 ‘현대 정신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늘 여기 있어 온 게 아니요,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것도 아니다.”(김병욱 역) 그렇다. 언제 회색빛의 엄격한 도덕과 법이 단지 인간을 사냥하기 위해서 자신의 엄밀함을 뽐낼지 모른다. 자유에 대한 애정은 곧 유머에 대한 애정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 성공했다고 웃을 수는 없다. 누구도 어떤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자신이 성공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인생을 체념한 자만이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되뇌며 삶과 타협한다. 우리는 인생이 행복해서 웃는 것도 아니다. 당신의 삶을 보라. 행복과 불행의 조각들이 유리 파편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 인생 자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요컨대 성공이나 행복 같은 이념 내지 철학적 개념이 우리를 웃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은 웃음을 만들기엔 너무 추상적이다. 지적인 세계에서는 오로지 삶의 축복처럼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유머가 우리를 웃게 만든다. 그것은 액면가가 얼마 되지 않을지 모르나 손에 쥐고 무게와 촉감, 빛나는 광채를 느껴볼 수 있는 진짜 금화다. 지적인 세계 밖에서는? 아이들이나 강아지들이 우리를 웃게 할 것이다. 그들은 유머와 같은 자유를 보여 주지만, 당연히 유머보다 위대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스토아학파와 크리시포스
스토아학파는 기원전 3세기 제논이 창시했다. 그의 제자 클레안테스, 클레안테스의 제자 크리시포스가 이 학파의 초기를 대표한다. 이 학파는 헬레니즘 문명을 배경으로 하며 유물론적 견지에서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사상을 형성했다. 크리시포스는 문답법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신들이 문답법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크리시포스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를 사람들로부터 받았다. 그의 논변엔 유머의 색채가 있다. 이런 식이다. ‘만일 당신이 무엇인가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뿔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신은 뿔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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