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 박열, 독립운동→납북→아들도 나라에 (꼬꼬무)[어제TV]

유경상 2022. 3. 11.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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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에서는 미처 그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박열의 이후 이야기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감동을 안겼다.

3월 1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독립운동가 박열, 가네코 후미코, 후세 다츠지의 운명 같은 이야기를 다뤘다.

1919년 3월 1일, 만세를 외치는 군중 속에 경성보통고등학교 2학년 박준식이 있었다. 같은 시각 충북 청원군에서는 소녀 가네코 후미코가 만세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후미코는 조선 사람들을 보며 감동을 느꼈다. 일본에서는 후세 다츠지 변호사가 조선인을 변호하고 있었다. 한국 남학생, 일본인 소녀, 일본인 변호사 세 사람의 운명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4년 후 허름한 일본 주택에 동거중인 남녀가 있었다. 벽에는 동지로서 작성한 남다른 동거서약서가 붙어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쓴 시 ‘개새끼’에 첫눈에 반했다. 남자의 이름은 박열, 본명은 박준식. 박열은 스스로 지은 이름이었다. 박열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하자 적진의 심장을 공격하려 18살에 홀로 일본으로 갔다.

동거중인 여자는 가네코 후미코. 박열이 일본어로 쓴 시를 교정한 사람이 후미코였다. 조선 이름은 박문자.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후미코는 박열 같은 투사가 30명만 있었으면 조선 독립은 물론 세계제패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박열과 후미코가 항일투쟁을 하던 중 7.9 규모의 관동대지진이 났다. 그 난리 속에 조선인들이 자경단에게 학살당했다.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헛소문이 났고, 일본 경찰들까지 학살에 가담했다. 군경과 자경단이 손발을 맞춰 조선인들은 집단 학살했다. 기록된 희생자만 6,661명. 일본 정권은 대지진으로 공황상태에 놓이자 폭발 직전 민심을 조선인에게 돌렸다.

그 사이 박열과 후미코는 일본 왕세자 암살 혐의로 체포됐다. 박열은 증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황태자 한 마리를 해치우려 했다”며 재판을 저항의 장으로 만들고자 했다. 박열과 후미코를 변호하기 위해 후세 다츠지 변호사가 찾아왔다. 조선인들이 그를 부르는 별명은 ‘우리 변호사’로 후지 다츠지는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하고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도맡아 했다.

박열은 재판에 네 가지 조건을 달았다. 조선의 예복을 입게 할 것, 나의 취지를 선언케 할 것, 조선말을 쓰겠으니 통역관을 세울 것, 내가 앉을 자리를 재판관의 앉을 자리와 같게 할 것. 일본 정부는 조선인 학살사건이 알려지며 세계 각국의 비난이 쏟아졌기에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재판이 필요했고, 조선 예복과 취지 선언의 두 가지 조건만 받아들였다.

박열은 재판장에서 “천황이란 국가라는 강도의 두목이다”고 선언했고,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고 말했다. 박열과 후미코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두 사람은 함께 만세를 외쳤다. 박열은 “재판장 수고했다”며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얼마 후 박열은 무기징역 감형을 제안 받고 찢어 버렸지만 신문에는 박열이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실렸다. 4개월 후 후미코는 독방에서 죽음을 맞았고, 22년이 지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다. 독립운동가들도 석방됐다. 박열은 나오지 못했다. 일본은 박열을 중심으로 재일교포들이 뭉칠까봐 두려워하다가 탄원이 빗발치자 풀어줬다. 22년 2개월 만이었다.

박열은 20대 청년에서 40대 중년이 돼 나왔다. 환영 인파가 무려 1만 5천여 명이 모였다. 박열은 재일교포 단체를 만들고 후학을 위한 장학 사업을 펼쳤다. 또 일본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찾아 조국으로 모셔갔다. 그 중 하나가 윤봉길 의사였다. 윤봉길 의사가 묻혀 있던 곳은 관리사무소 입구이자 쓰레기 하치장 옆, 계단 바로 앞 길바닥이었다. 사람들이 걸어가며 밟으라고.

1949년 박열은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아내, 두 아이와 함께였다. 박열의 아내는 기자였고, 박열을 인터뷰하며 인연이 닿았다. 그렇게 박열이 가족을 이루고 조국으로 돌아왔으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년 후 6.25 전쟁이 터졌고, 박열은 국민들을 두고 남하할 수 없다며 피난길에 오르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만 피난을 떠났고, 박열은 북한으로 끌려갔다.

16년 후 박열이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내는 아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편지를 적었다. 박열은 자신의 사진 뒷면에 ‘아들을 나라에 바쳐라’라고 적어 보냈다. 그 한 마디에 일본에서 살던 19살 박열의 아들이 한국으로 와서 3개월 만에 육군사관학교에 합격 평생 군인의 길을 걸었다. 박열은 1974년 북한에서 사망했고, 1989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에 추서됐다.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들 중에 일본인도 딱 두 사람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다츠지였다. 후미코는 “죽으면 꼭 조선 땅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고 박열의 고향 경상북도 문경에 안치됐다. 1953년 사망한 후세 변호사는 “나는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형제들에게 사죄한다”는 말을 남겼다.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캡처)

[뉴스엔 유경상 기자]뉴스엔 유경상 y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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