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 결핍된 사회가 아픈 과학적 근거..'다정함의 과학'

이혜인 기자 2022. 2. 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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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다정함의 과학
켈리 하딩 지음|이현주 옮김|더퀘스트|376쪽|1만9000원

장기화되는 감염병으로 인해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굳이 수치를 보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코로나 블루’는 전 사회적인 증상이다. 지난달 11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1년 코로나19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4분기(12월) 우울 위험군의 비율은 18.9%로 국민 5명 가운데 1명이 우울 위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도 우울감의 원인이겠으나, 일상화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가족과 친구를 만나 온기를 나누기 어렵게 된 환경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친밀감, 다정함이 결핍된 환경은 실제로 건강을 악화시킨다. <다정함의 과학>에서는 ‘표준 토끼 모델’이라고 부르는 실험을 그 예로 소개한다. 1978년 미국의 로버트 네렘 박사는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와 심장 건강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하기 위해 토끼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다. 연구진은 몇 달 동안 토끼에게 고지방 식단의 사료를 먹이면서 콜레스테롤 수치와 심장박동수, 혈압을 측정했다. 그런데 유독 한 무리에서만 다른 토끼들보다 지방 성분이 60%나 낮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요인들을 샅샅이 뒤진 결과 유독 무리나 레베스끄라는 연구원이 돌본 토끼들만 지방 수치가 낮게 나타난 것을 알아낸다. 레베스끄는 토끼들에게 먹이를 줄 때 말을 걸고, 토끼들을 종종 껴안고 쓰다듬으며 돌봤다. 다른 변수를 통제하고 여러 번 실험을 반복한 결과 연구진은 지방 수치의 차이가 ‘다정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연구 결과는 세계적 학술지 ‘사이언스’에 등재됐다.

미국 컬럼비아대 정신의학 교수인 켈리 하딩 박사는 의사로서 수많은 환자를 만나면서 개인이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의학적 치료뿐 아니라 사회적·환경적 요인이 충족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저서 <다정함의 과학>에서 ‘다정함’이란 임상수치나 의학적 결과 외에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사회적 요인을 의미한다. 가족·친구·이웃 같은 친밀한 관계, 사는 곳, 직장, 교육과 목표의식 등 건강과 무관해 보이는 사회적 요인들은 복합적으로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다정함’이 개별 환자들에게 영향을 준 다양한 사례와 함께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생물학 분야의 연구 결과 등을 엮어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위해서는
사회적·환경적 요인 충족이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들
낮은 직급이 높은 직급보다 심장마비 사망 확률 최대 6배
모욕·무시 등 ‘미세공격’ 당하는 유색인종은 질병 발병률 높아

건강한 삶의 실현, 의료 서비스나 자기관리만으론 한계
사회는 좀 더 ‘다정’해질 필요가 있다

책은 벨라와 데이지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벨라는 누가 보더라도 중병에 걸린 환자다. 71세에 대장암을 선고받고 3년간 수술과 화학요법, 방사선 치료를 거듭했다. 데이지는 의료기록만 본다면 건강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혈액검사, 영상검사, 심장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이다. 하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들의 삶을 관찰하면 다르게 보인다. 벨라는 아들과 산책을 즐기고, 이웃들을 초대해 쿠키를 구워주면서 활기찬 일상을 보낸다. 반면 데이지는 늘 “정신이 어딘가 몽롱하고 피로하다”고 호소한다. 사람들도 잘 만나지 않는다. 임상적으로 ‘아픈’ 벨라는 건강한 삶을 살지만, ‘건강한’ 데이지는 아픈 삶을 사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 의학에서는 병에 걸린 상태와 병에 걸리지 않은 상태를 흑백 혹은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분류한다”며 “벨라와 데이지 같은 환자들의 차이점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진료실에서 사용하는 어떤 기구보다 더 넓은 렌즈로 그들의 삶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로체스터대 의료센터의 내과 전문의인 조지 엥겔 박사의 ‘생체심리사회(biopsychosocial) 모델’에 따르면 한 사람의 건강 상태는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맥락의 결과다. 건강은 두 사람 간의 관계, 가족, 공동체, 문화, 사회 및 국가, 생물권까지 확장해 살피고 정의해야 한다.

책에서는 좀 더 넓은 렌즈로 환경이 건강에 장기간 미치는 영향을 설명할 수 있는 연구 결과들을 소개한다. 생물학에서는 환경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더 중시되고 있다. 우리는 건강의 많은 부분이 타고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알고 있으나, 생물학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후성유전학’이라는 분야에서는 타고난 유전자가 어떻게 발현될지에 환경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

후성유전학 연구 결과 중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 시민들에게 일어난 건강 변화를 측정한 ‘기근 연구’는 유명하다. 1944년 무렵 독일 나치군은 네덜란드 서쪽에 사는 여성들과 아이들을 포함해 400만명이 넘는 시민들에게 식량 공급을 중단했다. 당시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 중 임산부들은 임신 기간 동안에 하루에 400~800칼로리만 먹으며 버텨야 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시민들의 집단 건강을 공중보건 기록이라고 알려진 데이터베이스에 오랜 기간 남겨두고 추적하는데, 이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기근으로 인한 영향이 한 세대를 넘어 최소 두 세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할머니가 임신 중 경험했던 나쁜 환경은 딸이나 아들뿐 아니라 손자, 손녀들의 심장병, 비만, 당뇨병, 정신질환 등 위험까지도 증가시켰다. 환경적 요인이 다음 세대의 DNA 전사나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후성유전학적 연구 결과다.

건강의 사회적 요인을 들여다본 사회과학적 연구는 많은데, 그중 ‘화이트홀 연구’가 잘 알려져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1960년대부터 런던의 화이트홀 지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건강 상태를 살폈다. 첫 번째 화이트홀 연구는 1967년 10년 동안 남성 공무원 1만7530명을 관찰한 것이었다. 연구진은 고혈압, 콜레스테롤, 체중, 흡연 여부 등과 같은 잠재적 심혈관 질환의 위험요인을 측정했다. 연구를 시작하고 7년 반 후 연구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얻었다. 심장 질환에 미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은 콜레스테롤이나 혈압이 아니라 대상자들의 고용 등급이었다. 가장 좋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상사부터 바닥을 청소하는 직원까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가장 낮은 직급에 있는 사람들이 높은 직급의 사람들보다 심장마비로 사망할 확률이 3~6배가량 높았다. 흡연, 영양분 섭취 등 다른 변수들을 모두 통제한 후에도 직위가 심장 질환에 미치는 영향은 유효했다.

연구진은 “사람들이 관리자로부터 사회적인 지지를 받는다고 느끼고, 업무 중 작업 통제권을 가지며 일에 대한 노력을 보상받는다고 느끼고, 업무에 몰입할 수 있을 때 그들의 정신과 신체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저자는 “대부분 사람들은 곁에 좋은 의사를 두는 것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 자료들을 보면 좋은 상사를 두는 것도 질병에 걸리지 않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소득격차, 혐오, 차별 등 사회적 요인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컬럼비아대에서 감정장애와 성별 임금 격차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성인 직장인 2만258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동등한 자격의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여성들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2.5배, 불안감을 느낄 확률이 4배 높았다. 남성과 같은 임금을 받는 여성들은 우울증과 불안의 위험이 증가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를 두고 “임금 격차 연구와 유사한 다른 연구들에 따르면, 여성들이 더 많이 감정장애를 겪는 것은 근본적인 생물학적 원인 때문이 아니라 사회불평등의 반영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1970년대 하버드대 정신과 의사인 체스터 피어스는 유색인종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미묘한 모욕과 비언어적 무시에 ‘미세 공격’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미세 공격’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질병 발병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현저하게 높았다.

우리는 사회가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지는 꼼꼼하게 따져보면서, 그 외의 요소들은 건강과 분리해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진정 건강한 삶은 개인의 자기관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회가 좀 더 ‘다정’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야기한 다양한 임상 사례를 기억하고 건강의 숨은 요인들을 살펴보면서 의료서비스에 더 큰 비용을 투자하는 것만으로는 더 건강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길 바란다. 완전한 건강은 의료서비스만으로 이룰 수 없다. 만약 더 건강해지길 바란다면 건강을 더 넓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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