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기와집, 평민 초가집 → 지금 부동산 시세로 얼마?


서울만 놓고 보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집은 언제나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집값은 비쌀 수 밖에 없었죠. 조선은 개경에 살던 사람들을 대거 이주시키면서 서울의 토지를 나눠주었습니다.

ⓒKBS 역사스페셜

땅을 나눠준 기준을 보면 정1품은 35부(負, 오늘날 1493평). 정2품은 30부(1280평), 정3품은 25부(1066평), 이렇게 한품에 5부씩 차등으로 나눠주었죠. 7품 이하부터는 한 품에 2부씩 내렸고 서민은 2부(85평). 지금 기준으로 보면 넓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건폐율(토지 면적에 대한 건물 면적의 비율)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10% 초반에서 30% 정도였기 때문에 실제 거주공간은 이보다 훨씬 작았습니다.

도성에 사람이 많고 택지가 부족하다는 기록은 여러 차례 등장하고, 이로 인해 남의 땅을 차지하려는 과정에서 송사의 다툼도 잦았다고 전해집니다. ‘한치의 땅이 금과 같다’고 표현될 정도였죠. 사실 양반과 평민의 집이 차이가 났던 건, 신분에 따라 주택 규모를 제한하면서 부터입니다. 이는 대지와 주택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인데, 신분을 이용해서 남의 집을 빼앗아 집의 규모를 확대하는 것을 막겠다는 정책적 판단이었습니다.

“친아들 친형제와 공주는 50간(間)으로 하고, 대군(大君)은 <이에> 10간을 더하며, 2품 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으로 하고, 서민은 10간을 넘지 못할지며, 주춧돌을 제외하고는 숙석(熟石)을 쓰지 말 것이다. 또한 화공(花拱)과 진채(眞彩)·단청(丹靑)을 쓰지 말고 되도록 검소·간략한 기풍을 숭상하되, 사당(祠堂)이나, 부모가 물려준 가옥이나, 사들인 가옥, 외방에 세운 가옥은 이 제한을 받지 않는다”

_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1월 12일 정축, 1431년


게다가 ‘1가구 1주택’ 정책도 있었습니다.

성종(12년)은 재상들이 집을 두 채씩이나 보유함에 따라 서민들이 거주할 집이 없는 폐단을 지적하며, 한 채로 살다가 적장자에게 상속하면 충분하고, 차남 이후부터는 혼인 후 스스로 집을 짓게 하면 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기사가 있을 정도니까요.

이 당시에도 다주택에 대한 사회적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고위공직자들의 다주택 문제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고위공직자의 다주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로 인해 도성안의 주택 재고의 확보라는 판단도 함께 작용했을 것입니다.

주택 가격을 파악하기는 쉽지는 않습니다.

15세기 중엽경 중간 정도 수준(평범한 양반이 살 수 있는 정도의 집)의 집값이 면포 약 353에서 603필 정도이었으나, 16세기 중·초반경에는 최소 수천 필에서 최대 1만 5000필까지 기록됨을 근거로 15세기에 비해 집값이 급격히 상승했다고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서울의 집값은 이후로도 꾸준히 상승했죠. 17~18세기를 거치며 서울 인구수가 증가하는 과정에서도 다시 한번 급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1719년 160냥에 거래된 집이 1764년엔 200냥, 1769년엔 300냥, 1783년엔 350냥으로 서서히 오르다가 1800년엔 900냥, 1830년 1205냥, 1831년엔 1500냥으로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그러니까 100여년 동안 10배가 뛴 셈이죠.

노른자 땅은 프리미엄을 붙이는 관행도 있었습니다. 세조 때는 원각사를 짓기 위해 시전, 그러니까 조선시대 상가가 밀집해있던 종로 일대 민가를 철거했고, 이때 시세의 3배를 더 얹어줬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18~19세기 기준으로 집값을 추정해보면, 당시 쌀값은 3되가 10푼, 그러니까 0.1냥. 서울의 일반적인 양반집 집 가격은 2000냥. 이는 당시로 쌀 3000말이고, 여덟 식구가 1년에 먹는 쌀이 120말 수준임을 보면 2000냥은 여덟 식구가 25년간 먹을 수 있는 수준의 쌀 값입니다.

그런데 당시 서울에서 가장 비싼 집이 입동(종로구 종로2가·종로3가 일대)에 위치한 이은이라는 사대부의 집이었습니다. 규모가 380칸, 가격은 2만냥 이상. 서울에서 제일 비싼 이은의 2만냥 가격 집이 아파트 기준으로 130억원 정도라고 치면, 2000냥짜리 집은 13억 원 정도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집은 어떻게 구했을까? 당시에도 부동산이 있었을까?


한편, 조선시대에도 집을 구하려면 ‘집주름’이나 ‘사쾌(舍儈)’ 혹은 ‘가쾌(家儈)’ 같은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쾌(儈)’는 거간 혹은 중개인, 즉 집을 거래하는 중개인을 말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가옥의 매매, 전당, 임차를 중간에 주선하는 사람이 관련 서류를 작성하고 보증인으로 내세워 거래를 성사시켰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거래 쌍방을 도우는 중개인이었기 때문에 수수료를 받았죠. 중개 수수료는 거래가의 10% 수준이라고 전해집니다.

ⓒ수원시

1890년 이후 정부에서 이를 법으로 규정해서 관리하기 시작합니다.

별도의 허가증도 발급하고, 거래 쌍방에게 각각 매매가의 1%, 총 2%를 받았고, 임대의 경우에는 양측으로부터 05%씩, 총 1%를 받아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관행이었을 뿐 더 높은 수수료를 요구하는 집주름이나 가쾌들이 사회적 문제이기도 했죠. 서류 위조나 의뢰인의 부동산을 속여 뺏는 사건도 더러 있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양반들에나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상민들은 집을 지을 때에도 주변에서 흔히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각 지방의 자연환경에 따라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들이 달랐는데, 논 농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볏짚을 많이 사용하고, 나무가 많이 있는 곳에서는 나무를, 돌이 많은 곳에서는 돌을 가지고 집을 지었습니다.

논을 잘 볼 수 없는 산간 지역에서는 참나무 껍질로 지붕을 얹어 굴피집을 만들었고, 바람이 심한 제주도에서는 주변에 많은 돌을 사용하여 담을 쌓고, 지붕 위를 끈으로 엮어 맨 끝에 돌을 묶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집을 짓기도 했습니다.

소박했던 상민의 집을 초가삼간이라고 하는데 창고나 외양간, 부엌, 방으로 이루어지거나 부엌, 방 또는 부엌, 마루, 방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을 말합니다. 상민은 사는 곳을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았고, 같은 성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사는 경우도 많아 대를 이어 이웃과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았죠. 동네 모든 집이 하나의 우물을 사용하거나 빨래터를 만들어 같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