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감옥: 언어와 문법에 뿌리박은 남녀차별

5000년 전 문자가 발명된 이래, 강하고 총명하고 교육수준 또한 높았던 여자들은 무수히 존재했지만, 그들이 가부장체제에 맞서기 위해 단합된 운동을 조직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최초의 조직화된 여성운동은 영국과 미국에서 19세기 후반 시작된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여성운동이 먼저 시작된 이유는, 다른 나라보다는 마녀사냥 열풍이 덜 가혹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또 하나 비밀이 있다.

1848년 뉴욕주 세네카폴스의 한 교회에서 200여 명의 여성들이 대중집회를 열었다. 세계 최초의 여성운동집회로 기록된 이 자리에서 이들은 세네카 폴스 선언문(Declaration of Sentiments and Grievances)을 채택했고, 이는 여성참정권운동의 시발점이다

유럽의 주요 언어들은 대부분 명사마다 성별을 구별하는 반면 영어는 성별을 구별하지 않는다. 유럽의 언어에서 수동적인 것은 대개 여성이다. 예컨대 무언가 채워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물건들―항아리, 배, 칼집, 권총집―은 여성이다. 또 그 안으로 무언가 통과하거나 지나가는 것들―문, 통로, 문지방―은 여성이다. 반대로 찌르거나 후려치거나 부수는 도구, 자르거나 쪼개는 장비, 공격하는 무기는 거의 예외없이 남성이다.

이렇게 사물을 남녀로 구분하는 것은―여기에 작동하는 논리가 조악하기 그지없지만―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추상명사를 남녀로 구분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여성혐오’가 언어 속에 깊이 뿌리박혀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프랑스에서 권력(pouvoir)은 남성관사(le)가 붙고 질병(maladie)은 여성관사(la)가 붙는다. 이탈리아에서 우유부단(indecisione)은 여성명사이고 명예(onore)는 남성명사다. 스페인에서 결석(불참; vacante)은 여성명사이고, 용기(valor)는 남성명사다. 독일에서 정신(Geist)은 남성명사이고, 약점(Eigenheit)은 여성명사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이러한 명사의 성별구분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차별적 성별관념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고정관념을 심어준다.

걸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아이들은 남자와 여자가 해부학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부터 문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만물을 남녀로 구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러한 ‘문법 교육’은 알게 모르게 성별의 ‘가치’를 주입하지 않을까?

정적이거나 수동적이거나 사악하거나 나쁘다고 여겨지는 가치는 모두 여성이라면, 이런 문법을 배우는 여자아이들은 자신과 남자아이들의 관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받지 않을까? 더 나아가 그러한 문법 규칙에 맞춰 자신의 행동을 조정하지는 않을까? 유럽의 어린아이들은 이런 문법 규칙을 배우며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능동적이고 긍정적이고 공격적인 명사들, 또 의미가 선명한 명사들은 남성과 연관되어있는 반면, 전반적으로 모호하고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명사들은 여자와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배운 남자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더 우쭐함을 느끼지 않을까? 또래 여자아이들을 업신여기지는 않을까?

영어는 또한 2인칭 단수대명사가 하나밖에 없다는 점에서 다른 유럽 언어와 구별된다. 영어에서는 상대방을 부를 때 그 누구든,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남자든 여자든 하나의 호칭(‘you’)을 사용한다. 독일에서는 가족이나 연인처럼 가까운 사람에게 쓰는 경우(du), 낯선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쓰는 경우(Sie)를 구별한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에도 이러한 구별이 존재한다.

대명사와 호칭은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를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화자가 상대방을 뭐라고 지칭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경우, 이러한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상대방이 내가 선택한 호칭을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판단이다. 이러한 문법은 수직적인 계층화를 촉진하며 구성원 간에 지배-종속관계를 강화한다. 대명사와 호칭의 용법은 사회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없는 2살 아이의 머릿속에 엄격한 위계질서를 심어놓는 역할을 한다.

2-3살 때 습득한 문법(문화)의 덫에서 빠져나와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모국어를 초월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영어권 여자들은 유럽 대륙의 여자들보다 자신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영어권 남자들은 유럽대륙의 남자들보다 평등을 원하는 여자들의 소망에 좀더 호의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영국과 미국에서 여성참정권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라 여겨진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많은 언어학자들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전세계 사람들이 같은 말, 같은 문자를 쓰면 민족주의로 인한 전쟁의 공포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써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인공언어 ‘에스페란토’다.

하지만 국제언어 운동은 곧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세기가 시작되었다는 현실을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영어는 세계공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다행스러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지칭하는 영어가 전 세계에 확산할수록, 민주주의와 평등의식도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영어는 유럽의 언어들보다 평등하다. 물론 여전히 영어 속 표현에는 남녀 차별이 있다. 최근에는 이런 차별 표현(가령 배우 actor /여배우 actress)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예를 들면 남성 배우든 여성 배우든 그저 ‘배우’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여성 배우가 스스로 (여배우가 아닌) 배우라고 소개하고, 그렇게 불려지길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 글은 출판사 크레센도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ㄸ허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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