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거에서 왜 '못살겠다 갈아보자' 문구가 나왔을까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이 대한민국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존중한다 해도 ‘건국의 아버지’라는 표현에는 손을 들어줄 수 없어. 오늘은 이승만이 대통령 선거를 세 번 치르면서 역사에 남긴, 그래서 이후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지긋지긋하게 남은 트라우마에 대해 얘기해줄까 한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또 한번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 이승만. 그런데 그가 그토록 무리해가며 밀어붙인 개헌안에도 발목을 잡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바로 대통령 중임(重任) 제한 규정이었어. ‘(대통령은)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연임을 하고 있었으니 3선 출마는 불가능했던 거야. 그러나 이승만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너머를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1954년 5월20일 실시된 민의원 선거는 ‘곤봉 선거’로 역사에 남아 있어. 그만큼 경찰이나 정치 깡패들의 폭력이 무시로 행해졌고 “야당은 반정부 당이며 공산당보다 나쁘고 야당을 찍으면 공산당”이라는 협박이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이렇게 사람들을 협박하고 가로막고 폭력을 휘두른 결과 자유당은 전체 지역구 203석에서 114석(56%)을 얻었다. 개헌 가능 의석은 136석. 67명에 달했던 무소속 의원 가운데 22명만 꼬드기면 개헌을 이룰 수 있었지. 마침내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1956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두지 않는다”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제출한다. 그런데 이 개헌안이 136표에서 한 표 모자란 135표로 아슬아슬하게 부결돼버려. 하지만 깨끗이 결과에 승복할 이승만이 아니었지. 이승만 정부는 ‘획기적인’ 수학 공식으로 개헌안 통과를 선언한다. 개헌 기준인 203석의 3분의 2는 135.3333인데 사사오입, 즉 4 이하는 버리고 5 이상은 올림하는 수식을 동원해볼 때 203석의 개헌 정족수는 135석이 맞는다는 황망한 논리를 세웠던 거야.
1948년부터 1987년까지 40년간 헌법은 무려 8차례나 바뀌었다. 현재 우리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9차 개헌을 통해 제정된 헌법 아래에서 무려 35년째 제6공화국을 살고 있어. 여러 문제점이 노출됐고 시대적 변화에 따라 개헌 필요성도 대두되었지만 정권을 쥔 사람들이 ‘개헌’이라는 말을 꺼내면 사람들은 흰 눈부터 뜨고 본다. “집권 연장을 하려는 속셈 아니냐!” 이건 헌법을 나라의 근간이 아니라 정권 연장의 도구로 취급해 누더기로 만들었던 독재자들이 남긴 트라우마라고 생각해. 그 시원(始原)이 다름 아닌 이승만이었던 거야.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출마의 길이 열린 이승만 대통령. 1956년 대선에서 자유당 후보로 옹립된 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3월 뜻밖의 ‘유시(諭示·구두로 또는 문서로 백성을 타이르는 행위)’를 내려보낸다. “나는 고령이고 삼선(三選)은 민주국가에 드문 예이며 또 8년간 재임하면서 통일 성업을 성취하지 못한 책임을 느껴” 3선을 포기하노라는 것이었지. 그런데 그의 ‘유시’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어.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니 민주주의를 따라서 가는 것을 보여야만 되며 대통령을 뽑는 데에도 전 민중이 합하면 힘이 더 되는 것이니 내 의도를 잘 설명해서 공론을 듣는 것이 좋을 것이므로, 자유당도 민의를 따라서 나가도록 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경향신문〉 1956년 3월7일).”
이 알쏭달쏭한 ‘유시’의 속내는 대통령 불출마가 아니라 ‘전 민중이 합한 민의’에 있었어. 즉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출마를 포기하려 하는데 온 국민이 원한다면 또 모르지’라는 체면치레였지. 자유당 사람들은 이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민의’ 집결에 총력을 다한다.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이끌던 국민회는 물론이고 각종 직능단체, 참전동지회 등 별별 조직들이 일제히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모시자는 데모에 나섰다. 대처승(아내와 자식을 둔 승려)들을 몰아내고 절을 장악하는 ‘정화 투쟁’을 펼치던 조계종 승려들도 나섰으며 급기야 우마차(牛馬車) 조합이 서울 시내에 진출하면서 서울 도심을 말똥 소똥 천지로 만들어 놓았다. “민의(民意)뿐 아니라 우의(牛意) 마의(馬意)도 이승만을 원한다”라는 데모였지. 이승만 불출마 반대 도장을 받는 과정에서 죽은 사람 도장이 동원돼 ‘귀의(귀신의 뜻)’도 동원됐다는 빈축을 샀다. 이후 이승만은 물론 그 뒤를 이은 한국의 독재자들은 ‘국민의 뜻’이라는 수사를 놓친 적이 없다. 아울러 ‘국민의 뜻’을 남발하며 자신의 야욕을 위해 민의를 조작하고, 관(官)의 힘으로 민(民)을 참칭한 이들에 대한 트라우마를 국민들 역시 간직하게 됐지.
다시 1956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이승만은 강력한 도전자를 맞는다.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던 신익희가 유력한 야당 후보로 떠오른 거야. 민주당 후보 신익희는 그때만 해도 서울에서 대규모 인파 수용이 유일하게 가능했던 한강 백사장에 30만 인파를 끌어모아 사자후를 토한다. “주인 되는 사람이 심부름하는 사람 청해 놓았다가 잘못하면 ‘여보게 이 사람, 자네 일 잘못하니 가소’ 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요새 무슨 표어를 보면 ‘모시고’ ‘받들고’ 뭐고 뭐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다 봉건 잔재의 소리입니다. 모시기는 무슨 할아버지를 모십니까? 받들기는 뭐 상전을 받듭니까?”
‘거국적으로’ 치러진 이승만의 팔순 잔치
1955년 이승만의 팔순 생일잔치는 거국적으로 치러졌다. 서울운동장에 학생 수만 명이 모여들어 매스게임을 했고 공군 비행기가 ‘81(우리 나이로 셈하여)’을 수놓으며 하늘을 날았지. 개인 우상화의 시작은 북한보다 남한이 먼저였는지도 몰라. 신익희는 이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거야. 그러면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지금까지 회자되는 선거 구호를 외친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하지만 신익희는 유세를 하러 호남으로 가던 열차 안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하고 만다. 선거 불과 열흘 전이었지. 선거를 열흘 앞두고 유력 대통령 후보가 사망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서울 인구가 150만명이던 시절 30만명을 한강 백사장에 끌어 모은 기대주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거야. 하지만 야당 후보는 한 명 더 있었어. 진보당 후보 조봉암.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며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끈 주역이었지. 일제강점기에는 공산주의 운동의 맹장이었지만 해방 후 박헌영을 공개 비판하고 전향을 선언한 사람이야. 그는 1952년에도 이승만에게 도전장을 냈고,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무려 216만 표를 받아 500만여 표를 얻은 이승만의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했다. 거기에 선거 직전 사망한 신익희에게 던진 ‘무효표’가 160만 표를 넘었으니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어. 4년 뒤에도 대통령 선거는 돌아올 테니까.
이문열의 소설 〈변경〉은 1950년대 말 기차 승객의 대화로 시작한다. “우남이 기어이 죽산을 죽여버릴 작정인 모양이더군.” “들었어. 그런데 운석이나 유석은 뭘 하나?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말리지 않고.” 여기서 우남은 이승만의 호고 죽산은 조봉암의 호다. 운석은 1956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민주당 후보 장면의 호이고, 유석은 민주당의 차기 대권주자로 나서게 되는 조병옥의 호야. 1950년대 말 한국을 뒤흔든 진보당 사건을 묘사한 얘기였지. 이는 이후 한국 현대사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정치 보복’과 ‘사법 살인’ 트라우마의 원천이 된다(다음 호에 계속).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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