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니로 1000km 대장정..연비는?


997, 998, 999… 1000km. 끝났다! 누적 주행거리계가 네 자릿수로 넘어가는 순간, 지난 이틀간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던 1000km 여정이 모두 끝났다. 이렇게 긴 거리인 줄 몰랐다. 무려 19시간을 달려야만 했으니까. 아니,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한 거지?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기아 니로가 1L에 25km, 심지어 30km까지 달릴 수 있다는 여러 콘텐츠를 보며, 문득 진짜 연비가 궁금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연비를 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다채로운 환경을 달리되, 주행거리가 길면 길수록 변수가 적을 테다. 그렇게 우리나라를 동서로 횡단하는 1000km 여행의 막이 올랐다.

“제발 이런 기획 좀 하지 마세요!” 출발도 전에 난항이다. <탑기어> ‘짠돌이’ 편집장이 기름값 아끼라며 앞을 막아섰다. “편집장님, 이 차 연비가 스쿠터 급이라 돈 얼마 안 들어요. 복합연비가 1L에 20.8km라니까 안심하세요.” 휴~ 어렵사리 소금쟁이, 아니 그를 설득해 사무실을 탈출했다. 사실 18인치 휠 달린 시승차 연비는 1L에 18.8km인데….

스티어링휠을 자세히 보자... EV6과 똑같다!

출발 전 니로 스티어링휠을 잡고 속삭였다. “니로야, 기름 많이 먹으면 나 스크루지한테 혼난다. 제발 기름 냄새만 맡으며 달려 다오….” 마치 그 바람을 들은 듯 니로는 엔진을 완전히 잠재운 채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신비한 소리를 퍼뜨리며 전기모터로 미끄러지듯 달리는 감각, 딱 전기차다. 그래, 기아 전기차 EV6을 타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스티어링휠이 똑같다.

출발 전 트립컴퓨터를 재설정했다 / '풀투풀' 연비 계측을 위해 기름을 연료 주입구 끝까지 꽉꽉 채워 넣었다

서울 도심은 언제나 한결같다. 꽉꽉 막혀있다. 덕분에 전기만으로 달리니 평균연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전기모터 최대토크가 17.3kg·m로 넉넉해 저속에선 엔진이 낄 틈은 없다. 결국 1L에 30km대 숫자를 띄우고 나서야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 엔진이 깨어났다. 고요하던 실내를 채우는 엔진 소리가 달갑진 않다. 엔진오일이 말라버린 듯 삭막한 소리다. 앳킨슨 사이클 (엔진 압축비보다 팽창비가 더 큰 고효율 방식) 때문인가….

꽉 막힌 도심을 인내한 끝에 니로 앞이 점점 트이기 시작했다.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기회다. 가속 페달을 콱 밟자, 순식간에 엔진이 깨어나 힘을 쏟는다. 세 차례 시속 100km까지 가속시간 측정 결과는 평균 9.5초. 실제 감각은 숫자를 웃돈다. 5500rpm까지 회전하는 자연흡기 4기통 소리를 6단 듀얼클러치 변속기가 싹둑 가르니, 가속감이 명쾌하다. 신형 변속기가 시스템출력 141마력 평범한 성능을 매콤하게 버무렸다.

연비를 원한다면 18인치 휠보단 16인치 휠이 낫다 / 산뜻한 색깔이 빛나는 엔진룸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연이은 급가속으로 1L에 30km 넘던 연비가 추락했다. 뭐, 어차피 더는 볼 수 없는 숫자다. 고속도로 위에서 니로는 더 이상 전기차가 아니었다. 수시로 엔진을 켰다 끄며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끊임없이 조율한다. 항속 중엔 전기로만 달리고, 가속할 땐 엔진과 전기모터가 힘을 합치는 식. 그러나 운전자는 계기판에서 눈을 떼면 그 변화를 전혀 알 수 없다. 전기모터와 엔진이 바통을 주고받는 과정이 그토록 매끄럽다.

고속도로 다음 코스는 산행이다. 오늘날 태백산맥 밑을 지나는 편한 터널이 있지만, 일부러 다양한 환경을 달리기 위해 산맥을 넘었다. 구불구불 끝없는 오르막에서 엔진회전수가 치솟는다. 재밌게도 토크가 디젤 엔진처럼 든든하다. 엔진 최대토크 14.7kg·m는 보잘것없어도 전기모터가 17.3kg·m 힘을 더하면 얘기가 다르다. 경사로를 가뿐히 오른다.

한겨울 사진이 아니다. 봄기운 완연한 3월 말 사진이다

얼마나 올랐을까? 세상에, 봄기운 완연한 3월 말에 새하얀 눈 세상이 펼쳐졌다. 우리나라의 척추 태백산맥이 높긴 높은 모양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길은 점점 좁아졌고 노면은 험하게 바뀌었다. 심지어 도로도 얼어붙기 시작했다. 니로는 SUV니까 이 정도는 갈 수 있지 않을까? 턱도 없는 소리. 오르막 빙판길에 발을 딛자마자 등반은 끝났다. 네바퀴굴림은커녕 차동제한장치도 없는 니로는 앞바퀴 중 하나만 얼음을 밟아도 더는 나아갈 수 없었다. 심지어 차체 바닥은 어찌나 낮은지 방심하다가 바닥을 긁고 말았다. 이 차는 무늬만 SUV다. 확실하다.

사진은 멋지지만, 오르막 빙판길을 못 오르고 돌아가는 쓸쓸한 상황이었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차를 돌렸다. 누적 연비는 1L에 18km대까지 떨어졌다. 지금부터는 반등의 시간, 내리막이다. 동해안까지 아주 긴 구간일 뿐 아니라 경사도 급하다. 괜히 ‘브레이크 파열 주의, 저단 기어 사용’이라는 경고 표지판을 세웠을까. 보통 자동차였다면 변속기를 저단으로 바꿨겠지만, 니로는 전혀 그럴 필요 없다.

패들시프트는 변속기가 아닌 전기모터 회생제동 강도를 주무른다

그렇다. 니로는 진짜 전기차처럼 패들시프트로 변속기가 아닌 전기모터 회생제동을 주무른다. 아주 입이 닳도록 칭찬하고 싶은 기능이다. 모두 다섯 단계로 강도를 촘촘히 나눠, 내리막 경사에 맞춰 시시각각 전기모터 저항을 조절하며 내려갈 수 있다. 효과는 훌륭하다. 조금만 내리막을 달려도 ‘배터리가 충분히 충전되어 회생제동 패들시프트 기능을 제한한다’는 문구가 계기판에 뜰 정도다. 물론 하이브리드 배터리 용량이 작아서 그렇기도 하다.

내리막을 절반쯤 내려갔을 때, 멋진 굽잇길을 만났다. 연비 테스트인 만큼 달려볼 생각은 없었는데…. 이 차, 짜릿하다. 코너 안쪽을 향해 스티어링휠을 꺾어 넣자 앞바퀴가 기민하게 방향을 틀고, 뒷바퀴가 가볍게 뒤를 따른다. 예상 밖의 운전 재미에 빠져 속도를 더 높여봐도 마찬가지다. 낮은 무게중심과 단단히 조인 서스펜션이 쏠림을 든든히 억제한다. 무게중심 낮은 기아 3세대 플랫폼 위에 엔진과 배터리로 앞뒤 무게배분까지 균등히 나눈 결과다. 무늬만 SUV답다. 도로 위에서는 날렵한 해치백이었다.

아득히 보이던 동해 바다가 코앞으로 다가오며 마침내 중간 기착지에 도착했다. 어쩜 같은 날씨인데도 온도가 이리 다를 수 있을까. 산꼭대기에서는 칼바람이 불었는데, 동해안에서는 온화한 바닷바람이 분다. 누적 연비는 1L에 18km 대에서 20km 대로 올라왔다. 내 마음속에도 훈풍이 분다.

"지금 이 순간 니로는 훌륭한 레저용 전기 카트다"

선루프와 앞뒤 모든 창문을 활짝 열고 해안가를 달렸다. 바다 내음이 들이치고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이 순간 니로는 훌륭한 레저용 전기 카트다. 내리막에서 가득 채운 배터리가 엔진을 깊은 잠에 빠뜨렸다. 파도 소리 감상을 방해하는 소음은 오로지 타이어 소리뿐이었다.

헤드업디스플레이는 운전 피로를 덜고, 등받이 각도 조절 기능을 갖춘 뒷좌석은 편안했다

누적 주행거리계는 이제 겨우 500km를 가리켰다. 절반밖에 채우질 못하다니…. 아직도 500km를 더 달려야 한다는 생각에 속히 귀갓길을 재촉했다. 그동안 니로 승차감은 매우 만족이었다. 시속 100km를 넘는 고속에서 바닥에 찰싹 달라붙고 노면 요철을 넘고 나면 재빨리 자세를 추스른다. 다만 10시간 넘게 운전만 하고 있노라니 승차감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다가온다. 역동성을 강조한 모델이 아닌 만큼 조금만 더 서스펜션 긴장을 풀어도 좋겠다.

운전자 보조 시스템은 장거리 주행에서 보험처럼 든든하다

어두운 밤길을 달려, 마침내 서울에 도착. 시간은 밤 11시쯤이었다. 누적 주행거리계는 아직도 880km다. 더 달려야 한다. 남은 120km를 채우기 위해 왕복 60km를 조금 넘는 경기도 외곽으로 출발했다. 이미 잠잘 시간이 훌쩍 지난 만큼 피로가 몰려온다. 그나마 고속도로 주행보조 기능이 있어서 다행이다. 졸지는 않았지만 만약 졸더라도 니로가 알아서 차선을 지키고 앞차와 거리를 조절할 테다. 마치 보험 들어놓은 듯 든든하다.

새벽 1시. 나는 아직도 달리고 있다. 그래도 끝이 머지않았다. 990…997, 998, 999…1000km. 드디어 끝이다. 새벽을 넘어가는 바람에 무박 2일이 되어버린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했다. 자유로 위에서 바로 멈출 수는 없어서 35km 더 달린 후 여행을 마쳤다.

누적 1035km를 달렸다

19시간 1분, 성인 남성 세 명과 촬영 장비를 싣고 누적 1035km 주행 후 기록한 트립컴퓨터 연비는 1L에 21.8km였다. 하이브리드에 불리한 고속도로 주행이 어쩔 수 없이 많았는 데도 공인 복합연비보다 1L에 3km 높다. 참고로 니로 고속도로 공인연비는 1L에 17.7km다.

자, 여기까진 트립컴퓨터 얘기이고 진짜 주유로 더 정확한 결과를 내보자. 처음 출발했을 때처럼 주유구 입구에 기름이 넘실거릴 만큼 가득 채웠다. 중간에 넣은 20.020L를 포함해 모두 48.832L가 들어갔다. 1035km를 나눈 최종 연비는 1L에 21.195km. 트립컴퓨터 연비보단 낮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다.

이제 완전히 의심을 거둬도 좋다. 기아 니로는 1L에 30km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내 SUV 시장에서 국산차와 수입차를 통틀어 가장 효율이 뛰어나다. 도심, 고속도로, 해안도로, 오프로드, 굽잇길을 모두 아우른 1000km를 달린 후 1L에 21km 넘는 고효율로 증명했다. 더욱이 전기차 닮은 운전 감각과 탄탄한 주행 성능, 풍부한 편의장비까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오늘날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SUV다. 훌륭하다.

다음 날 아침, 편집장에게 니로 시승 결과를 보고하며 영수증을 함께 냈다. “음, 1000km나 달리느라 고생 많았어요.” 예상보다 무미건조한 반응에 실망하고 나가려는 찰나, 나는 문틈 사이로 분명히 보았다. 그의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윤지수 사진 이영석, SUGAR P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