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vs 글씨' 이후 한석봉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조회수 2022. 3. 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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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명필가 한석봉의 인생사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조선 중기의 서예가. 한석봉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1543~1605)

우리나라 역사상 글씨 하면 떠오르는 인물을 말하라면, 대개는 추사 김정희와 석봉 한호를 말할 것입니다. 특히 한석봉은 어머니에 관한 일화가 더해지면서, ‘글씨 잘 쓰는 사람 = 한석봉’이라는 공식이 생겼죠.

불우한 환경에서도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으로 최고의 서예가 자리에 올랐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지금도 감동과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석봉이 글씨를 잘 쓰기까지 과정, 그러니까 어두운 방에서 떡 vs 글씨의 대결은 잘 알고 있으나,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최고의 서예가가 되어 잘 먹고 잘 살았을까요? 그는 행복했을까요?

한석봉은 낙하산 인사였다?

대개 우리는 한석봉이 과거에 급제해서 관직에 나간 것으로 알지만, 사실 그는 진사시까지만 봤습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사시 1차만 합격한 느낌이랄까요? 한석봉은 오로지 글씨를 잘 쓰는 능력으로 사자관(寫字官, 글씨를 정사하는 관리) 관직에 올랐습니다. 과거 시험(대과)를 치르지 않았으니 엄청난 출세인 것이죠.

한석봉의 친필

이러한 출세과도 뒤에는 든든한 후원군이 있었습니다. 그의 열렬한 팬 선조였죠. 그러나 한석봉의 출세는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 관리들의 반대에 부딪히는데요.

“한호는 용심이 거칠고 비루한데다 몸가짐이나 일 처리하는 것이 이방과 같아, 사람들이 그와 같은 위치에 있기를 부끄러워하니 내쫓아주소서." _<선조실록>에서

관리들을 감찰하는 사헌부에서 선조에게 올린 상소의 기록입니다. 성격이 더럽고, 옷을 못 입고, 마음을 들지 않으니 내쫓으라니. 그는 왕따였을까요?

글재주의 어마어마한 영향력

그러함에도 선조의 신뢰는 두터웠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웬만한 외교문서는 모두 한석봉의 손을 거쳤습니다. 얼마나 많은 글씨를 썼던지 사자관 특유의 서체가 만들어졌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한석봉의 친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윽고 그의 대한 명성은 멀리 명나라까지 퍼집니다. 그가 사신단의 사자관 자격으로 명나라를 찾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받겠다고 줄을 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명성은 임진왜란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던 명군 장수와 외교관들은 한석봉의 글씨를 얻기 위해 책들의 필사를 끊임없이 요구했습니다.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

조선에게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명나라 장수들을 1:1 접대해야 했던 조선에게 한석봉의 글씨는 돈 한 푼 안 들어가는 최고의 뇌물이었으니까요. 한석봉은 그렇게 임진왜란 내내 명나라 장수들에게 글씨를 써주며, 국난 극복에 한몫(?)을 담당했습니다.

글만 썼더니 군수가 됐다

임진왜란 이후 한석봉을 쉬게 해주려는 선조는 경기도 가평 군수에 그를 임명합니다. 문제는 이때부터입니다. 평생 글씨만 써온 그에게 수령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리 없었으니까요. 가평이라면 산 좋고 물 좋기로 유명한 동네로, 한양과도 가까웠고, 다스려야 할 백성의 수도 적었습니다. 행정 경험이 부족한 한석봉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선조였죠.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 선조는 한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러나 선조의 생각처럼 전개되진 않았습니다. 한석봉은 군정을 모두 아전들에게 맡긴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글씨를 가다듬는 데만 몰두했습니다. 수령이 행정을 포기한 상태이니 고을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고, 사헌부가 이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미운털이 박혀 있기에 더욱 열렬히 그의 파직을 요청하는 상소를 또 올립니다.

그러나 한석봉의 열렬한 팬 선조는 그를 내치지 않았습니다. 그를 가평 군수에서 흡곡(강원도 통천) 현령에 그를 임명했죠. 그리고 이때부터 한석봉도 까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공신 책봉 준비를 합니다.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공신에서 제외되고, 요리사, 의관들이 공신 반열에 올랐죠. 어쨌든 엉터리 공신 선정이 마무리되니 한석봉이 필요했습니다.

한석봉의 의도된 실수?

공신들에게 교서를 써서 건네야 하는데 한석봉이 교서 작성에 빠질 리 없었죠. 그러나 그의 불만 표출이었는지 단순한 실수인지 ‘신臣’을 ‘거巨’로 쓰는 식의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러자 또 사헌부가 또 득달같이 한석봉을 탄핵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사헌부의 파직 요청에 흔들릴 선조가 아니었습니다. 요지부동이었죠.

이어서 한석봉에게 녹권(공신 책봉자의 공신 확인증) 작업 명령이 떨어집니다. 한석봉은 이번에도 또 한 번 비슷한 사고를 치고 맙니다. 또 사헌부의 파직 상소.

깨질 것 같지 않았던 선조의 팬심은 결국 무너졌고, 선조는 결국 그의 파직을 윤허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한석봉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63세, 1605년의 일이었습니다.

도산서원 현판. 한석봉이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으로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당대 최고의 서예가가 된 한석봉. 하지만 벼슬에 올라서는 낙하산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고, 끊임없는 사헌부의 ‘딴지’에 마음고생도 해야 했습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란 말이 떠오르네요.


참고한 책 : 발칙한 조선인물실록(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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