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 넘은 관직 1품 名臣에 궤장 하사.. 국정경험 예우하는 '경로잔치'

기자 2022. 4. 2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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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사궤장연겸기로회도, 1623년, 지본채색, 46.8×62.5㎝. 국립중앙박물관

■ 박정혜의 지식카페 - ③ 사궤장 의례와 축하연 그림

신라시대 김유신이 처음… 고려 이어 조선에선 좌의정 지낸 성석린을 시작으로 세종대에 가장 활발

이경석 화첩, 교지 선포·축하연 등 사궤장 의례 과정 담아… 구경꾼 배제해 떠들썩한 잔치보다 엄숙함 강조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두어 나이 든 조신에게 경로의 뜻을 표하였다. 70세가 넘은 정2품 이상의 관료들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국가 원로의 지위를 획득했고 80세가 되면 노인직(老人職)으로 자급을 올려 받았다. 그러나 관직 이력에서 무엇보다 영예로웠던 것은 궤장(궤杖)을 하사받는 것이었다. 관직이 1품에 이르고 나이 70세가 넘은 노신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할 때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궤장을 하사하여 그를 관직에 머물게 했던 사궤장(賜궤杖) 제도를 말한다. 경험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안석(案席)과 지팡이에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의지할 수 있게 예우하여 국정 운영에 계속해 참여하도록 한 방책이다.

사궤장 제도는 중국 한나라 때 비롯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64년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595∼673)에게 처음으로 적용되어 고려시대로 계승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좌의정을 지낸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을 시작으로 세종대에 가장 활발하게 시행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사궤장 제도의 시행은 주춤하였는데 이 분위기를 바꾼 인물이 바로 1623년 77세에 궤장을 받은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었다. 전란 이후 처음 치러진 사궤장 의례이기도 했지만, 그 자리를 축하하는 사궤장연이 기로연과 한꺼번에 치러진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선조·광해군·인조까지 3조에 걸쳐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은 당시 기로신이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중단되었던 기로연을 이 기회에 부활시키자는 기로소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유례없이 사궤장연 겸 기로연이 공식적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그림 4). 자연히 기로신을 포함한 조정의 주요 관료들이 대거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으므로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이 일을 칭송하였다.

왕은 궤장을 하사할 때 축하연에 필요한 술과 음악을 함께 내렸다. 왕이 내리는 술을 선온(宣온)이라 하는데 선온에는 반드시 음식이 따라왔으며, 사악(賜樂)에는 악공과 기녀가 포함되었다. 그림을 보면, 선온 항아리와 음식이 놓인 붉은 탁자 및 궤장을 북쪽 중앙에 모셔 놓고 참석자들은 그 양옆으로 열 지어 자리 잡았다. 오른쪽 줄 가장 상석은 왕명을 받들고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자리이다. 선온을 가지고 온 중사(中使)와 승지, 약간 뒤로 물러서 앉은 승정원 주서(注書)가 그들인데 주서는 교지를 선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어서 나란히 자리한 일곱 명이 바로 기로신들이다. 왼쪽 줄 상석은 이원익의 자리이고 조금 간격을 띄우고 초대받은 손님들이 차례로 앉았다.

조선시대 의례 공간에서 자리 배치의 차례와 방향은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기록화에서도 사실과 거의 일치하는 표현이 바로 이 부분이다. 화면에는 이원익이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으로 나와 중사가 전해주는 선온을 무릎 꿇은 자세로 공손하게 받는 순서가 그려졌다. 가장 중요한 인물, 즉 좌차(座次)가 가장 높은 인물이 술잔을 받는 모습은 선온을 받는 그림에서 이후에도 기본 도상으로 채택되었다.

이원익의 ‘사궤장연겸기로회도’의 사실성은 배경 묘사에서도 돋보인다. 사궤장 의례는 대개 주인공의 집에서 치러졌는데, 이원익의 집은 한양의 동부 건덕방, 지금의 대학로 근처에 있었다. 그 위치는 멀리 배경에 불룩 솟은 낙산의 능선과 그 사이로 보이는 도성의 성가퀴, 암문 등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원익은 오랫동안 최고의 관직을 누렸음에도 집은 비좁고 누추했다. 그래서 논의 끝에 이원익의 집 근처 공터에 행사장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에도 수리하지 못하고 허물어진 채로 방치된 담장, 기와를 이지 못하고 군데군데 임시로 새는 곳을 가려 놓은 지붕 상태가 가감 없이 묘사되어 있다. 청백리이기도 했던 이원익의 욕심 없고 청빈했던 삶이 그대로 반영된 모습이다.

궤장은 기댈 수 있는 안석과 지팡이를 의미한다고 앞서 말했음에도 그림에는 교의에 기대어 놓은 지팡이가 그려져 있어 보는 사람에게 의문을 자아낸다. 그 이유는 세종대만 해도 궤는 기댈 수 있는 안석으로 만들어졌음이 분명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교의로 바뀐 채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예관들은 옛 제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교의가 안석을 대신하여 사용된 것은 1719년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계속되었다. 숙종에게 진헌할 궤장을 만들기에 앞서 예조에서는 중국의 옛 제도를 철저하게 상고하고 이원익 집안에 전해오던 ‘사궤장연겸기로회도’에 그려진 궤장의 모습까지 확인하면서 당시의 준행에 대해 폭넓게 자문을 했다. 마침내 교의의 사용이 규정에 어긋난다는 판단 아래 숙종의 재가를 받아 궤를 안석의 형태로 만드는 원래의 제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바로 잡은 궤장 제도는 고종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사궤장 의례의 과정은 45년 후 1668년(현종 9)에 궤장을 하사받은 백헌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사궤장례도 화첩에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인조·효종·현종 3조에 걸쳐 24년간이나 정승을 지낸 이경석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행정관료이자 외교관이며 문장가로서의 면모도 뚜렷한 인물이다. 사궤장 의례는 이원익의 예를 기준으로 삼아 치러졌지만 기로연만큼은 이경석 본인의 사양으로 성사되지 않았다.

이경석은 궤장을 하사받은 후에 그 과정을 세 폭의 그림으로 그리고 현종의 교서, 참석한 손님들의 명단, 축하 시문을 받아 화첩을 꾸몄다. 사궤장 의례의 주요 과정을 세 폭의 그림에 요약적으로 담은 점이 특징이다. 첫 번째 그림은 조정에서 파견된 일행이 행사의 현장인 이경석의 집으로 들어가는 행렬을 그린 것이다(그림 2). 오장을 든 장졸 두 명이 앞서고 집박전악과 악공들, 교서를 모신 가마와 궤장을 실은 가마가 그 뒤를 따랐다. 이어지는 기마 인물은 중사, 승지, 주서와 의례의 진행을 도울 예조의 관리들이다. 이경석의 집은 집안 대대로 세거해 온 서대문 밖 반송방에 있었다. 넓은 마당에 차일과 병풍으로 행사장을 조성하였고 대문 밖에도 손님들을 위해 크고 작은 네 개의 막차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하루 전에 액정서의 관리가 미리 와서 준비해 놓은 것이다.

두 번째 그림은 교지를 선포하는 장면으로 사궤장 의례의 가장 중요한 순서이다(그림 3). 의례는 주서가 교서를 낭독하고 승지가 궤장을 전달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차일 아래 궤장과 선온을 소중하게 모셔 놓고 교서는 붉은 보를 씌운 탁자 위에 준비되어 있다. 주서는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서서 교서를 읽고 승지는 주서의 뒤에 조금 물러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교서탁 앞에 앉은 이경석의 곁에 서 있는 인물은 중사와 두 명의 예관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날 가족 친지와 마을의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주변을 가득 메웠다고 하는데 그림에는 그러한 분위기 묘사가 완전히 배제되었다. 오히려 배경의 산과 행사장 좌우에 어려있는 짙은 서운(瑞雲)으로 인해 조용하고 엄숙한 느낌마저 감돈다. 화가는 경삿날의 즐겁고 떠들썩한 분위기보다는 왕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진중한 의례의 권위를 더 강조했던 것 같다.

세 번째 그림은 사궤장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그림 1). 병풍을 두른 북쪽에 궤장, 교서함(敎書函), 선온 항아리를 나란히 모셔 두고 참석자들은 서로 마주 본 대열로 앉았다. 오른쪽 줄에는 이원익의 ‘사궤장연겸기로회도’에서처럼 중사와 승지가 나란히 앉고 조금 뒤로 물러서 주서가 자리를 잡았다. 왼쪽 줄의 빈 방석은 중앙으로 나와 중사가 건네주는 선온을 받는 이경석의 자리이다. 이경석 다음에는 정1품 숭록대부인 정태화(鄭太和, 1602∼1673)·정치화(鄭致和, 1609∼1677) 형제가 앉았고 나머지 손님들은 뒤로 약간 물러앉음으로써 품계의 차이를 두었다. 오방색의 옷을 입고 가면을 쓴 처용 무동이 악공의 연주에 맞추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조선시대 이름난 재상 이원익과 이경석은 둘 다 왕실의 후예이며 3조에 걸쳐 오랫동안 정승을 지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간절하게 치사를 원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궤장을 하사받기에 이른 점도 유사하다. 이원익과 이경석의 사궤장연을 그린 그림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두 그림은 공통적인 표현이 상당히 많다. 이는 엄격한 예법에 따라 진행되는 의례를 그릴 경우, 화가는 반드시 앞서 제작된 사례를 참고하고 따르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화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인 보수적인 경향은 제작상의 이러한 습관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미술사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궤장

‘궤’는 몸을 기대어 편안하게 하는 안석을 말하며 ‘장’은 힘을 보조하는 지팡이를 의미한다. 영조대에 개정된 예서인 ‘국조속오례의’에 의하면 안석은 3척 4촌 길이로 양쪽 끝은 약간 높고 중앙은 오목하되 모가 없도록 만들었다. 지팡이의 길이는 7척 5촌으로 중앙에 대나무처럼 9개의 마디를 만들고 상단에는 비둘기 모양을 조각했다. 근심도 없고 소화력도 좋다는 비둘기 모양의 장식을 단 구장(鳩杖)은 한나라 이래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양로연에 참석한 노인들에게 구장을 나누어 주고 60세 넘어 기로소에 들어가는 왕에게 구장을 진헌했던 것은 모두 노인 공경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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